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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회색양복에 대한 민주적 통제권

♤폴 토드·조너선 블로흐,『조작된 공포 - 세계 정보기관의 진실』, 창비, 2005 ♠

미하엘 엔데의 모모라는 소설 속에는 회색 양복을 입은 무리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서 회색 연기를 뿜는 시가를 만든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를 소리없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아끼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조차 못하고 그저 시간을 아끼며 아둥바둥 살아간다. 조작된 공포. 사람들은 아낄 필요가 없는, 심지어 아끼는 가치가 아닌 시간을 아껴가며 회색 양복들에게 속은 채 살아간다. 회색 양복들은 자신들의 공작을 통해 사회에 대한 지배권과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공고히 다진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그들 자신이다. 자신들이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를 통제하려하고 그들 자신의 존재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폴 토드, 조너선 블로흐가 지은 『조작된 공포』를 통해 우리는 이 회색 양복들과 너무나 닮은 정보기관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겉으로 위장된 안전, 안보라는 가치와는 다른 권력과 속임수, 통제, 감시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보기관의 보다 실제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서두에 냉전 시대를 지나면서 정보기관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테러리즘을 정보기관이 어떻게 규정하며 어떻게 대항하고 때로는 협력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정보기술의 발달이 가능하게 한 개인에 대한 전반적이고 일상적인 감시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이후 구체적으로 미국과 유럽, 러시아 등 세계 각 국, 각 지역의 정보기관의 모습을 기술한다. 정보기관의 자의적인 활동 영역 설정, 수사, 구금, 준군사 조직 보유 등 행정-사법-군사 기관을 아우르는 초법적 권력 행사, 비밀주의, 테러리즘과의 모호한 관계,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정보 기술에 대한 맹신 등의 문제점들이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제시된다.

특히 이스라엘의 사례를 통해 비정상적인 정보기관을 통해 추구되는 극단적인 자국의 이익이 어떤 식의 결과(안보의 딜레마라고 표현되는 불필요한 주변국과의 무력충돌이나 긴장)를 불러 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론으로 가면서 이미 존재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정보기관을 어떻게 통제하고 보다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옮긴이가 덧붙인 보론에서는 한국 정보기관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개괄과 정보기관의 개혁을 위한 좀 더 구체적인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정보기관들은 더 강한 권력과 더 분명한 기술적 수단을 추구하는 데만 눈이 멀어 있다. 필요 없는 비밀주의와 부적절한 권력이 건전한 정보활동에 가하는 위협을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테러의 반정립이라 할 시민사회의 대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저자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보기관들이 보여주었던 ‘정보 수집과 민주적 책임성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는 정보기관과 보안조직을 감독하는 감찰관을 두어 …… 모든 기밀 문서를 요구할 수 있고, 정보기관의 어떤 직원에게든 정보를 공개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의회의 감사를 받는 연례보고서와 회계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일반인이 진정을 하면 정보기관이 합법적으로 적절하게 활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직접 대응 할 수 있다.”

캐나다의 경우도 비슷하다. 독립적인 감독기관이 존재하고 감시를 받으며 회계감사를 받고 프라이버시 위원회, 인권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정보기관이 받는 민주적 통제의 구체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정보기관은 단순히 정보를 조사하고 모으는 일을 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정보기관은 경찰이나 법 집행기관이 아니다. 준군사적 책무도 없으며 정해진 임무를 수행할 때 무력이나 생명에 치명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모두, 정보기관의 수임사항을 엄격히 제한하고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테러리즘’이나 ‘전복’이란 용어 사용을 피하는 데 중점을 두어왔다.”

사실상 이런 정보기관을 무능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 최고 능력을 자랑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이스라엘 정보기관도 자신들의 총리가 암살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역시 세계 최고라는 미국도 9.11을 막지 못했다.

9.11이후 모든 나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애국법, 테러방지법 등 반테러법이라는 노골적인 인권침해 법률들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정보기관의 권한을 확대하고 불법적이고 인권침해적인 요소를 무책임하게 포함한 ‘법’들이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문민정부 이래로 정보기관의 개혁은 앵무새 노래 후렴구처럼 반복되었으나 실재로 이루어 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시도되었던 작지만 의미 있는 개혁조치들은 전부 제자리로 돌아왔다. 노무현 정부로 넘어오면서 ‘근본적인 제도 개혁보다는 조직의 일부 축소·조정을 선택’하였고 이것은 국가정보원이 테러방지법의 제정을 집요하게 추친하는 부분적 배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옮긴이가 쓴 보론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대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다. 민주적 통제라는 제도적인 대안 이외에 우리가 정보기관에 대해 경계해야할 점들에 대해 보다 분명히 말하고 있다.

비밀조직인 정보기관의 수사권 폐지, 정보 수집의 목적, 대상, 방법을 민주주의 원칙과 인권기준에 따라 엄격히 정할 것, 또한 수집한 정보의 누설과 악용을 막고 피해를 당한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의 도입, 독립적인 감독 기관의 정기적인 감독, 예결산 심사, 회계 감사, 인권침해 사례 재조사 등 국내 정보기관을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이 언급되어 있다.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와 달리 정보기관의 규모, 구조, 그 임무와 인적, 물적 활용 실태에 관한 정보는 비밀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는 말처럼 정보기관의 모든 것이 비밀로 부쳐질 필요는 없다. “비밀 정보기관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활동방식으로 인해 민주적 사회 구조에 위협이 된다. 비밀 정보기관에 의한 감시와 추적이 일상화되면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위한 조건들은 의심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정보기관들이 공식적으로 맡은 역할이 우리들을 테러로부터, 적들로부터, 여러 가지 가상의 위협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인권침해를 감당해야 하는가. 『조작된 공포』를 통해서 제시되는 대안들을 통해 우리는 인권침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들을 만날 수 있다. 애초부터 모호한 테러, 테러리스트라는 대상을 놓고 그들이 누구인지, 적인지 아(俄)인지 일일이 구분해 가며 싸울 일이 아니다. 정보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빠른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