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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진실규명에 관한 입장 발표

<보도자료>


진실이 승리할 때까지 행진은 계속됩니다.
-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진실규명에 관한 입장 발표



<순서>
사회 : 박래군 집행위원
1. 참석자 소개
2. 여는 말씀 :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3. 사건 진상규명 경과와 진실화해위원회 결정 보고 : 김선택 집행위원장
4. 피해자 심경 발표 : 강기훈 씨를 비롯한 당시 전민련 관계자 등
4.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에 따른 재심 계획 발표 : 이석태 변호사
5. 기자회견문 낭독
6. 질의응답




일시 : 2007년 11월 14일(목) 오후 2시
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이창복(경기대 이사장), 함세웅(신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상근(목사, 대 한기독교서회 대표이사), 이부영(단국대 민주동문회 회장), 임기란(전 민가협 상임의 장), 지선(스님, 전 백양사 주지), 박정기(박종철 열사 부친)
[연락처]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집행위원(T. 02-365-5363, laegoon@hanmail.net)
<기자회견문>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실규명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007년 11월 13일, 사건 발생 16년 6개월 만에 우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일부 진실을 규명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1991년 5월, 공안당국에 의해 날조된 유서대필조작사건을 참담한 심정으로 접한 이래, “진실과 건전한 상식의 승리”를 염원하였던 우리는 벅찬 심정으로 이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제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강기훈 본인은 비로소 “아이들에게 죄인이 아님”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심초사하면서 진실규명을 위해 뛰다가 지금은 투병 중이신 그의 어머님께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인 민주화운동에 관여했던 많은 이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대해서 “김기설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국가는 종전 국과수의 필적감정, 기소 및 유죄판결에 대해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습니다. 또 확정판결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유서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당시 감정결과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로 작용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정황적인 증거들을 보완하고 있지만, 이 모든 정황들도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3심까지의 판결은 모두 잘못된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잘못된 기소이며, 오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은 그 자체로 한계를 보여줍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전경에 맞아 죽은 때로부터 6월 29일 전경들이 명동성당에서 철수하기까지 6월 민주화항쟁 이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최대로 분출되었던 격동의 시기에 발생했던 사건이란 시대적 배경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시기에 13명의 열사들이 분신, 투신, 의문사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시기 직전에는 수서지구 특혜분양사건, 국회의원 뇌물외유사건, 대구 낙동강 페놀방류사건 등의 비리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의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이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억압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5월 7일 고위당정회의를 거쳐서 5월 8일 오전 7시에는 치안관계장관회의를 가지면서, 분신의 배후를 수사할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 김기설 열사는 그날 오전 8시 7분경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한 후 투신하게 됩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정권의 위기를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해결하여 갔습니다. 결국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기획하고, 실제 조작한 모든 과정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번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은 이 사건의 출발이 된 유서대필 조작 부분만을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과거사정리법의 한계이고, 실질적 권한이 없는 현재의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계입니다. 그런 미약한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당시의 관계기관대책회의 등 이 사건을 기획했을 책임자들을 밝히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당시 감정에 참여하였던 감정인들을 포함해서 실질적인 공동심의를 하였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종의 범죄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당시 유서대필 감정에 대한 외압 부분은 밝히지 않는 점은 문제입니다. 또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은 이번 조사 결과에 승복하고 고백하기보다는 이번 결과를 평가절하하고, 자신들의 책임만을 모면하기에 급급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현직에 남아 있는 사건 조작의 책임이 있는 검사들은 당장 현직에서 사퇴해야 할 것입니다. 현직을 떠난 법조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당시 검사와 판사들도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최소한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재심 청구 시점부터 이들의 퇴진을 위한 투쟁에 나설 것입니다.

우리는 법원이 이번 결정에 기초한 재심청구를 수용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곧바로 재심준비에 착수하고, 빠른 시일 내에 재심을 청구하고, 재심에서 승리한 뒤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책임을 물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대로 법원의 재심 결정이 있기 전이라도 국가 차원의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여 고통을 가했던 점에 대한 당연한 절차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기획과 조작의 책임자를 끝내 밝혀 강기훈 씨와 같은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17년째 이어지고 있는 진실을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을 향한 우리의 행진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2007년 11월 14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첨부자료 1> 대책위원회가 2006년 4월 12일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했던 진정 내용


■ 진실규명 요청 내용


○ 신청의 취지
- 국가권력의 폭력적인 사건조작에 대한 규명을 통한 진실의 규명
- 사건의 진실규명을 통한 피해자의 명예회복


○ 사건의 내용
- 1991년 노태우 정권은 정권 차원의 부패비리사건 등으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 의해 타살당한 것을 계기로 민주운동세력이 총공세를 펼치자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성을 훼손하여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려 하였음.
- 1991년 5월 8일 피해자의 전민련 운동 동료인 김기설 열사가 분신하기 하루 전인 5월 7일 치안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어 “분신의 배후” 운운하면서 당시 연이은 분신자결의 배후를 추궁하겠다고 밝혔고, 마침 김기설 열사가 분신하자 검찰이 주도하여 분신의 배후를 수사하기 시작하였음.
- 검찰은 서울지검 강력부에 이 사건을 배당하여 김기설 열사와 피해자의 필적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필적 감정을 의뢰하여 피해자의 필적과 김기설 씨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를 끌어내었음. 그렇지만 필적감정은 세 명이 작성한 전민련 업무일지를 한 명이 작성한 것으로 잘못 감정한 것에서 드러난 것처럼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었음. 또 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은 이 사건 재판이 진행 중인 1992년 초 뇌물을 받고 감정한 혐의로 구속되었지만 끝까지 국과수의 필적감정 결과로 기초로 자살방조죄로 기소하여 피해자가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처럼 명예를 훼손하여 정신적 고통을 주었음.
- 법원은 검찰의 이런 엉터리 감정결과를 기초로 한 기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여 피해자에게 3년형을 확정 판결하여 복역하게 하였음.
- 피해자가 유서를 대필하여 주었다는 고 김기설 열사는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한 사망자로 인정받았음.


○ 진실규명이 필요한 이유(재심 이유)
- 당시 노태우 정권 차원의 치안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피해자를 지목하여 사건을 조작한 경위
-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강압을 행사해 필적 감정을 조작한 경위와 이유, 책임자
- 검찰이 압수수색 등을 통해 수집한 필적 자료 일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은폐한 경위
- 법원이 검찰의 시간과 장소조차 특정하지 못한 공소 사실을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하게 된 경위
- 검찰의 피해자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강압수사 과정
- 사건의 진상규명을 통한 피해자와 고 김기설 열사의 명예회복과 과거 국가폭력의 실상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방지책 마련키 위함.
<첨부자료 2>
유서대필 조작사건 당시 담당 검사들의 주요 행적
이름
당시 직위
현재
당시 주요 역할과 발언 등
정구영
검찰총장
변호사
- 5월 8일, “분신 배후에 조직적 세력이 있는지 철저히 수사하라. 타살 가능성도 있다.”는 등 분신 배후 수사 지시
전재기
서울지검장
변호사
- 서울지검에 전담반을 구성하여 타살 가능성 및 불순세력과 연계한 계획적 자살인지 여부 수사 지시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
변호사
(전 대법관)
- 유서대필 조작사건 총 지휘
- <전민련 사회국 업무일지>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서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길길이 날뛰며 광분
- 참고인 임무영을 한 때 또 다른 범인으로 단정하여 수사를 지시
-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난센스” / “특정 단체가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07. 11. 13)
신상규
서울지검 강력부 수석검사
광주지검장
-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주역
- 실무적으로 사건을 총 지휘하였으며, 참고인 임무영에 대한 구타와 피의자 강기훈에 대한 잠 안 재우기, 그 외 참고인에 대한 강압수사 협박
송명석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사망
-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주역
- 참고인에 대한 협박과 강기훈에 대한 잠 안 재우기, 강기훈 등 가족에 대한 협박 등으로 일관
박경순
상동
변호사
- 필적 자료 관련 수집 및 필적 자료 은폐
- 안기부와 수사 공조 담당
곽상도
상동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 참고인에 대한 조사
- 강기훈 잠 안 재우기 수사 담당
남기춘
상동
서울 북부지청 차장검사
- 초기 필적 관련 자료 수집 및 군부대에서 입수한 김기설 필적 은폐
- 명동성당 농성 당시 가톨릭 주교회의 등에 공권력 투입을 위한 사전 작업 진행
- 임무영에 대한 구타 시행
- 강기훈에 대한 욕설, 고문 협박

이름
당시 직위
현재
당시 주요 역할과 발언 등



- “당시 필적 감정 결과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 검찰이 수사하고 법원이 1,2,3심을 거쳐 결론을 내린 것” / “당시 증거물로 제출되지도 않았던 김기설 씨의 필적을 가져다 감정한 뒤 이것이 옛날 감정 결과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수사와 재판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07. 11. 13)
윤석만
상동
변호사
- 필적 감정서 관련 실무 작업
- 대검 문서분석실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오가면서 필적감정서가 검찰의 의견대로 나오도록 실무적 역할
- 안기부와 공주 수사 담당
임철
상동
변호사
- 참고인 조사
- 참고인 및 가족들에 대한 협박과 회유 등 담당
- 강기훈에 대해 “국가보안법 사건은 봐 줄테니 유서대필 했다고 자백하라”는 협상 제의
정진섭
상동
변호사
- 김기설 분신 후 옥상에 점퍼를 입은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서강대 총무처장의 목격담을 “건물 옥상에 두 세 사람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이 몸에 불이 붙은 채 뛰어내렸다”고 왜곡한 장본인
안종택
상동
서울북부지검 검사장
-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공소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국가보안법 관련 수사를 진행
- 공산주의자 10대 강령을 들먹이며 “운동권은 살부회 같은 조직도 있는 순번 정해서 서로 죽게 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확신을 갖고 공판 등에서 끊임없이 허위사실 유포


<첨부자료 3> 참고자료

○ 사건 당시 검찰의 주장

1991. 4. 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 사이의 일자 불상경 서울 이하 불상지에서… 김기설의 명의의 유서 2매를 작성함에 있어, 김기설은…고등학교 1년을 중퇴한 학력의 소유자로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함에도 피고인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유서를 작성하여 줌으로써…김기설의 분신자살 결심과 결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한 것이다<검찰의 ‘자살방조’ 공소장에서>

피고인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자의 10대 신조를 맹신하고…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로서의 피고인의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상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검찰 ‘논고’ 중에서>

○ 사건 당시 피고인 강기훈의 주장

잠시 후면 검찰청으로 떠나게 될 지금의 제 심정은 진실하기에 떳떳하면서도 한편으로 하소연할 길 없는 억울함과 무거운 마음이 교차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결백한 저에게 유서대필자, 자살방조범이라는 범죄자의 굴레를 씌우려드는 공권력에 맞서 제 양심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무고한 개인이 권력의 힘에 의해 끝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강기훈씨 ‘검찰 출두 성명서’ 중에서>

진실을 짓밟히는 우리의 고통은 한순간일 것이나, 진실을 짓밟는 자들에 대한 양심의 역사적 심판은 영원할 것입니다.< 변호인 ‘상고이유 보충서’에서>
<첨부자료 4> 쟁점으로 본 유서대필 조작사건(2005년 대책위 작성)

진실이 두려운 검찰

1. ‘권력의 시녀’에서 ‘권력의 주역’으로 나선 검찰

1991년 4월 26일, 스무 살도 못 되는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군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백골단에 맞아죽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커다란 분노를 일으켰으며, 재야세력과 학생들은 ‘고 강경대 열사 살인폭력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를 결성하여 노태우 정권에 맞섰다.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에는 안동대 김영균, 5월 4일에는 경원대 천세용 학생이 잇따라서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여 분신하였다. 들끓어 오르는 분노는 대책회의 주최의 5월 4일 ‘백골단 해체 선포의 날’ 평화 시위에 엄청난 양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서 20여 만 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는 노태우 정권을 ‘6공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5월 6일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구치소 수감 중 입은 상처를 치료받던 병원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어 노동계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5월 8일 오전 8시경 전민련 사회국 부장 김기설 씨가 서강대 건물 옥상에 유서를 남긴 채 분신, 투신하였다. 김기설 씨가 분신한 직후 검찰은 현장 조사를 통한 증거를 확보하기에 앞서 ‘배후세력에 의한 분신자살’이라고 앞질러 발표하였다. 김기설 씨가 분신할 당시 다른 사람이 있었다거나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 있어 혼자 열 수 없었다는 식의 여러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이는 하루도 채 안 되어 모두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해명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검찰은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부검한다며 가족 등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안실의 벽까지 뚫고 들어가 시신을 탈취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물론 수구언론과 일부 지식인들도 분신 배후가 있다는 선동에 나선다. 김지하 씨는 5월 7일자 조선일보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라’고 망발을 서슴지 않으며, 서강대 박홍 총장도 성경에 손을 얹은 채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겁을 준다.
5월 7일 청와대 고위당정회의와 5월 8일 오전 7시에 있었던 청와대의 치안관계대책회의에서 분신 배후에 대해 철저히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 하였고, 5월 8일 정오경 정구영 검찰총장이 검찰에 직접 지시한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 검찰은 공안합수부 등을 통해 합법을 가장하여 공안통치의 주역으로 나서기 시작하였으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통해 ‘권력의 시녀’에서 ‘권력의 주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6공화국은 검찰공화국이 되었다.

2. 검찰의 필적 은폐
남기춘 검사(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 필적 은닉 과정 진상규명 필요

김기설 씨가 분신한 당일부터 검찰의 수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김기설 씨의 필적을 확보하기 위해 김 씨의 주민등록상의 집(안양시 호계동)이나 동사무소에까지 가서 필적을 입수하게 된다. 이때 동사무소에서는 주민등록분실신고서를 수집했으나, 호계동 집에서는 필적을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다(중앙일보 91년 5월 9일자, 3면). 그러나 1998년 3월 15일(원래는 1993년 10월 24일에 방영할 예정이었으나 하루 전날에 방영 취소)에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의하면 이때 검찰은 가족으로부터 모든 필적을 수집해간 것으로 드러났다.
남기춘 검사(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는 5월 13일 김기설 씨가 근무했던 군부대에 가서 필적을 입수하게 된다. 특히 이때는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검찰의 선입견이 없어야 할 시점이다. 유서필적과 김기설 씨의 글씨가 다르다는 필적감정이 나온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따라서 김기설 씨가 작성한 필적이라면 그 근거를 남겨야 할 때였다. 특히 김기설 씨 필적이라고 남기춘 검사에게 제출하였던 서기선 하사는 김기설 씨가 제대하는 날 그때 함께 제대하던 동료 2명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자신의 수첩에 직접 써주었으며, 김기설 씨 자신의 수첩에 주소를 적어주고 있는데 전역병을 태우는 버스가 오자 급하게 써내려갔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남기춘 검사는 이러한 진술을 듣고도 수첩을 통째로 제출받지도 않고 김기설 씨의 필적이 있는 부분만을 찢어낸 후에 필적 입수 사실을 은폐하였다. 당시 서기선 하사와 함께 남기춘 검사를 만났던 이찬진 변호사(당시 군부대 법무사관)가 2심 판결만을 앞둔 시점에 제보하게 되어 필적 은폐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수사를 진행하던 담당 검찰은 전민련이 김기설 씨의 필적을 수집하여 제출하면 방명록 전체를 가져오지 않고 김기설 씨 필적 부분만 찢어 와서 신뢰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지적하였으나, 남기춘 검사는 김기설 씨의 필적 부분만을 찢어서 주머니에 넣고, 진술서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남기춘 검사가 입수한 필적은 서기선 하사 눈앞에서 직접 쓴 필적이었다. 검찰이 김기설의 것으로 발표한 필적(주민등록신고서, 큰누나에게 선물한 책표지 글씨, 군 시절 친구 안혜정에게 보낸 편지) 중에 김기설 씨가 쓰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유서를 쓴 시점과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이찬진 변호사도 당시 남기춘 검사가 저녁 식사자리에서 유서필적과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묻기까지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필적은폐 사실이 드러나자 검찰은 진본을 공개하지 않은 채 지방에서 팩스로 보낸 필적만을 공개하였다. 필적 원본이 공개되어야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 은닉되었는지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김기설 씨는 5월 4일 전민련 사무실 근처의 여관에서 후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자살 결심을 밝힌 바 있다. 이날 김기설 씨가 여관 숙박부를 작성하였는데, 검찰은 당연히 이 여관에 김기설 씨가 투숙한 사실을 확인하고 필적을 확보하기 위해 수사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기록 어디에도 이 여관에 대한 조사나 숙박부 입수 노력 흔적을 발견할 수 없으며, 이 또한 검찰이 의도적으로 필적을 은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3. “강기훈이냐 임무영이냐” - 파탄난 검찰 수사
“세 사람이 쓴 업무일지가 유서필적과 같다”

전민련 사회국 업무일지는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물이다. 전민련은 검찰의 요청에 따라 1991년 5월 11일 업무일지를 제출하였다. 이때는 전민련 측에서 검찰이 유서 대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김기설 씨 필적 등을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검찰은 업무일지, 유서, 1985년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강기훈의 당시 자술서 필적에 대하여 감정의뢰를 하였고, 국과수 문서분석실은 이 필적들이 동일하다고 감정하였다.
강기훈 씨가 검찰에 출두한 이후 7월 3일까지 검찰은 업무일지를 강기훈 씨가 조작한 것으로 판단하고 강기훈 씨를 집중 추궁하였다. 검찰은 강기훈 씨에게 “유서와 같은 글씨인 사회국 업무일지도…검찰에 제출하기 위해 새로 작성”(1991년 6월 25일 강기훈 제1회 신문조서)하였으며, “업무일지를 조작하기 위해 유서를 대필한 자가 급하게 써 내려갔다.”(7월 3일 강기훈 제5회 신문조서)고 추궁하고 있다.
계속 추궁을 받던 강기훈 씨는 업무일지에 김기설 씨 필적이 대부분이지만 다른 사람의 필적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검찰은 전민련 관계자들이 연이어 연행하여 조사를 벌이게 되었다. 조사 결과 업무일지에는 김기설, 임무영, 이동진 씨 등 세 사람의 글씨가 섞여 있었다.
검찰은 결국 임무영이 유서를 대필한 것으로 수사방향을 바꾸어 현상수배를 내려 7월 6일 임무영을 체포하였다(동아일보, 91. 7. 9. 검찰 ‘유서대필’ 수사 혼선/ 한겨레, 91. 7. 9. 임무영 씨 새 용의자). 임무영 씨는 7월 9일까지 검찰청 내 특별조사실에서 3-4명의 검사에게 잠 안 재우기,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5월 8일 전후의 행적에 관한 자술서를 쓰거나 김기설 씨의 유서를 그대로 쓰게 되었다. 강신욱 부장검사(현 대법원 판사)는 임무영 씨가 가혹행위를 당하는 현장에서 지휘하였으며, 진술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담배꽁초가 들어있는 종이컵을 임무영 씨 얼굴에 던지고, 따귀를 때리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물론 검찰은 임무영 씨를 유서대필과 관련하여 조사한 내용 중 7월 9일자 진술조서 이외에는 다른 기록을 은폐하였다.
검찰은 임무영 씨에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자 7월 9일부터 강기훈 씨에게 업무일지를 조작하였음을 자백하라고 다그치기 시작한다. 임무영 씨와 이동진 씨에게는 세 사람이 공모하여 업무일지를 조작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업무일지를 세 사람이 썼다는 사실은 국과수의 감정이 엉터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임무영 씨를 유서대필범으로 수사하는 것은 검찰이 강기훈 씨를 유서대필범으로 몰고 간 모든 수사가 파탄 났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4.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반인권 검찰
잠 안 재우기, 욕설, 폭행, 협박 다반사
중요 참고인 재판 출석 방해
“고등학교 중퇴자는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하여 유서도 못 쓴다.”고 고인의 명예훼손


정권에 항의하여 분신 사망한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왜곡하여 운동 조직에 의해 조종을 받고 분신을 했다는 어이없는 발상을 해낸 검찰은 온갖 강압수사를 통해 짜 맞추기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검찰에 연행된 사람들의 거의 다 잠을 자지 못하거나 심한 욕설을 동반한 윽박지르는 식의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홍성은 씨의 경우 1991년 5월 13일 연행된 이후 15일 밤 검찰수사관과 집에 잠깐 들린 것을 제외하고 17일까지 약 100여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강압과 협박’으로 홍성은 씨의 허위진술을 얻어낸 후, 곧바로 재판 전 증인신문을 통해 홍성은 씨의 진술을 ‘증거’로 보전해놓고 홍성은 씨가 나중에 진실을 말하기 어렵게 1달 이상을 검찰의 보호 아래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재판 전 증인신문은 변호인의 조력 없이 행해지는 등의 문제가 많아 후일 ‘슬롯머신사건’과 관련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홍성은 씨는 1993년 10월 11일 검찰청 민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내 수첩에 적힌 김기설 씨의 이름 전화번호는 강씨가 적어준 것이 아니었으나 검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해 검찰의 의도대로 진술했다.”고 폭로하면서 2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려고 했으나 검찰수사관이 하루 전날 집으로 찾아와 압력을 행사하여 출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한겨레신문, 93. 10. 12.).
강기훈 씨에게도 40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수사를 하였으며, 검사들은 강 씨에게 욕설 등 온갖 모욕적인 폭언을 동반한 반인권적인 수사를 조사를 진행했다. 임무영 씨의 경우에도 특별조사실에서 잠 안 재우기, 허벅다리 짓밟기, 안면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고 강신욱 부장검사로부터도 직접 따귀를 여러 대 맞는 등의 강압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임무영 씨를 유서대필 혐의로 연행한 이후 48시간이 가까워지자 집시법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여 구속한 상태에서 유서대필 혐의를 계속 수사하였다.
검찰은 고인의 명예도 훼손할뿐더러 저학력자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검찰은 공소사실에서 “김기설은 광탄종합고등학교 1년을 중퇴한 학력의 소유자로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함에도 피고인(강기훈)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하여 유서를 작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대단한 문장력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도 아닌 유서를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기 때문에 직접 쓸 수 없다고 주장하여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뿐더러 저학력자들에게 편견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검찰의 김기설 씨가 군 시절 동창에게 보낸 편지는 증거로 법원에 제출하고 있다. 그 편지는 유서보다도 문장이 더 뛰어나다.
검찰은 운동권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색안경을 끼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있지도 않은 분신배후를 찾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인권의 범죄자들이었다.

5. 뇌물을 받고 구속된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을 비호하는 검찰
“만약 김씨가 허위감정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면 경찰 몇 명은 옷 벗을 각오를 해라.”
검찰, “돈은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없었다.”

1992년 2월 17일 강기훈 씨의 필적과 유서가 같다고 감정한 김형영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이 오랫동안 뇌물을 받고 감정을 해온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형영 씨는 1980년에도 허위감정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동료 감정사의 감정으로 풀려난 바 있으며, 98년에도 토지사기단과 결탁하여 감정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김형영 씨는 소송 중인 양쪽 당사자로부터 돈을 받기도 하였다.
강기훈 씨 2심 재판을 앞두고 터진 김형영 씨 뇌물수수 및 허위감정 의혹에 대하여 검찰은 소극적으로 수사에 임하였고, 결국 “돈은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없었다.”며 수사를 시작한 지 6일 만에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하면서 서둘러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당시 제기되었던 허위감정 여부나 문서전문위조단 등의 의혹에 대해서 검찰은 외면을 하였다.
한겨레신문은 1991년 2월 19일자 “국과수 ‘거짓감정’ 수사 뒷얘기”에서 “1월 중순께 문서위조단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지방경찰청 특수기동대 소속 수사관들이 김형영 씨에게 인쇄소에서 인영 등을 복제해간 사실을 추궁하며 1시간가량 연행조사를 벌이자 김씨는 이 사실을 강기훈 씨를 기소했던 서울지검 형사1부에 연락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서 풀려난 김 씨는 며칠 뒤 형사1부에 조사받은 사실을 알렸고, 이에 발끈한 한 간부검사는 경찰 간부에게 ‘만약 김씨가 허위감정과 관계없는 것으로 나타나면 경찰 몇 명은 옷 벗을 각오를 하라.’고 호통 치며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귀띔이다.”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형영 씨가 연락한 형사1부는 강신욱 검사가 부장으로 있었다.

6. 대표적인 정치사건인 유서대필조작사건, 진상규명 필요
“상식과 진실의 승리를 위하여 유서사건 담당 검사 퇴진해야”


1991년 강경대 타살 이후 잇따른 분신으로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5월 7일 청와대 고위당정회의에서 잇따른 분신사건의 배후관계를 철저히 수사하기로 방침을 정하고(한겨레신문, 91. 5. 10. <분신배후 검찰 주장의 허구성>), 5월 8일 정해창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로 삼청동 안가에서 서동권 안기부장, 이종남 법무장관, 최병렬 노동부장관 등이 참여하여 치안관계 대책회의를 열고 분신자살 배후를 수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정구영 검찰총장은 분신자살사건의 배후에 이를 부추기는 조직적 세력이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라는 긴급지시를 전국 검찰에 내렸으며, 유서사건에는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 등 10여명의 검사가 대거 참여하게 된다.
안기부 또한 6월 29일 전민련을 압수수색하여 다량의 필적을 압수해 갔으며, 7월 7일에는 안기부에 연행된 전민련 활동가 김형민, 정윤서 씨를 삼청동 안가에서 강기훈 씨와 대질조사를 하는 등 검찰의 유서대필사건에 적극 협조하였다.
대한변협은 93년 7월 ‘유서대필사건’을 대표적인 정치 판결로 지목하고 이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을 정치판사로 규정하여 퇴진을 요청한 바 있다. 이는 검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과거 공안기관에 저질러진 수많은 조작사건에 대하여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마땅히 유서대필 조작사건도 건정한 상식과 진실이 승리한다는 사례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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