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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10호> 참을 수 없는 어떤 '인권의 보편성'의 가벼움

준비 10호 | 2008년 10월 21일  


이번 18대 국회에는 두 개의 ‘북한인권법안’이 제출되어 있다. 하나는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이 대표 발의한 ‘북한인권법’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한나라당의 황진하 의원이 대표 발의한 ‘북한인권증진법’이다. 지난 17대 국회에서도 두 개의 ‘북한인권법’이 한나라당 의원의 대표 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결국 제정에는 실패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국회에서는 지난 국회에서와는 달리 ‘북한인권법’의 순조로운 제정이 예상되고 있다.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갖고 있고 이명박 정부 역시 ‘북한인권’ 문제를 주요한 사안으로 언급해왔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북한인권’을 주요한 의제로 다뤄온 보수 북한인권 단체들의 경우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가장 주요한 논거 중의 하나로 인권의 보편주의적 특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성찰하지 않는 ‘인권’이 도리어 얼마나 해악적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

‘북한인권’과 인권의 보편성?

보수 북한인권 단체들은 “인권의 보편성에 따라서 북한에서도 똑같이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황진하 의원이 대표발의한 ‘북한인권증진법안’도 “인권은 인류 보편적 가치로 모든 이에게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로 제안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인권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인권의 보편성’은 인권의 가장 주요한 속성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인권 보장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로서의 인권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권의 제1명제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사회 상황과 역사·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변화한 ‘인권’의 개념

‘인권’은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현재와 같은 인권 개념은 서구 사회에서 근대의 출현과 더불어 등장한 개념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기존의 왕과 귀족의 절대권력을 부정할 수 있는 이념을 필요로 했고, 공장에서는 땅과 영주에 얽매여 있는 농민들 대신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는 노동자를 원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격변의 시기에 기존의 절대권력에 의한 인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노동력을 팔기 위해 땅과 영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이동의 자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재산권 등의 근대적 개념의 인권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신흥 부르주아들은 기존의 권력에 대항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인권에서도 여성과 식민 노예들은 동등한 권리 주체에서 배제되었다. 즉,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인권의 역사에서 본 ‘보편성’ 논쟁

그 후 역사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권의 내용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1948년 발표된 유엔 세계(universal, 보편적)인권선언은 적어도 선언적으로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동등한 인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특히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세계대전으로까지 비화된 독일의 인종차별적 악랄한 ‘반보편주의’인 자민족절대주의에 대한 강한 부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반보편주의에 대한 부정으로서 보편성의 강조는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세계인권선언조차도 구체적인 실현에 있어서는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게 실현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논란을 빚어왔다. 세계인권선언의 서구 중심적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도 그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인권의 보편성이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되지 못하고 ‘단일한 내용의 인권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단선적인 맥락으로 이해되어버리면, 인권이 오히려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할 뿐임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인권’이라는 이름의 반인권적 과정과 결과라는 역설이 발생한다.*

인권학자인 마카우 무투아는 “보편주의적 신조와 교의를 창조하려고 들면 서로 다른 성격의 사회들을 파괴하거나 고사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인간존엄성을 위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려면 신중하게, 열린 마음으로, 복합성을 존중하면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 증진을 위해서 외부에서 찍어 누르듯이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인권침해적 상황에 대한 사회적 의미와 목적 그리고 그 결과를 조심스럽게 확인하고 현지인들의 견해를 직접 들어본 후 대화와 이해를 통해 현지인들이 스스로 그러한 상황을 조절하거나 없앨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모든 사회에서는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을 지지하지만, 각 문화의 다양성과 상이성을 인정하고 각 문화가 보편인권을 자신에 맞는 방식대로 해석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사회에 따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 상대주의 주장은 오히려 독재정권이 자신의 반인권적인 행태들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어 오기도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보편성과 상대성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이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항상 유념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국제사회는 이러한 논의들을 반영해, 1993년 비엔나 국제인권대회의 선언문은 인권의 보편성을 재확인하면서도 “국가와 지역적 특성의 중요성, 그리고 역사적·문화적·종교적 배경을 유념해야 한다.”(제5조)고 규정했다.*

보수 북한인권 단체들,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성찰적인 태도 가져야

한 보수 북한인권 단체 인사는 “북한인권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며 “북한인권 주장은 인권의 보편성에 따라 북한에도 똑같이 보편적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일 뿐”이라고 훈계하듯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인권의 보편성이 그렇게 단순하고 자명하기만 하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와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보수 북한인권 단체들과 ‘북한인권법’은 인권의 보편성을 앞세워, 다른 체제를 갖고 있는 북 사회에서도 종교·집회·언론의 자유 및 자유주의 정치체제, 시장경제 등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와 동일한 내용의 인권이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물론 종교·집회·언론의 자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자유권, 사회권, 민주적 정치체제 등과 같은 모든 인권의 목록들은 반드시 북에서도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각각의 권리 목록에 어떠한 내용을 채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접근해야 한다. 인권의 보편성에 따라 북에서 인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북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들이 전제된 상황에서 북 인민들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인권의 내용들을 채워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외부자들은 북 인민들이 인권의 주체로서 스스로의 힘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인권을 요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조력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보편성을 지지하면서도 인권 상대주의와 인권 제국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성찰적인 인권의 보편성’의 태도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북한인권’에만 관심 있는 차별적인 ‘보편성’

또한 ‘북한인권’을 중심으로 주장하는 보수진영의 인권의 보편성 주장은 오직 북에서의 인권의 보편적 실현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역시 보편성을 거스르고 있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북에서도 인권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북의 인권 현실에만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보수진영은 우리 사회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수진영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에서도 인권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은 옳은 말이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인권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당연하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인권현실은 우리가 직접적인 주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책임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보수진영은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의 인권침해 현실에 대해 침묵해왔고 심지어는 인권침해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 가해하거나 침묵함으로써 동조하고 있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안 중 하나인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대해 보수진영은 찬성하고 지지해왔다. 인권침해 가해자가 다른 사회의 인권침해를 지적하는 위선적인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위배하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권의 보편적 실현의 어려움

인권의 보편성은 인권의 원칙 중 가장 실현하기 어려운 원칙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 노숙인, 빈민, 장애인, 여성, 청소년/녀,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도 인권의 주체인 ‘인간’이라면 인권의 보편성에 따라 이들의 권리도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들의 권리는 너무나도 쉽게 부정 당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는 비정규직‘보호’법, 이주노동자들을 추방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인간사냥 강제단속, 차별을 금지한다고 하면서도 보수진영의 반대에 부딪혀 성적지향, 출신국가 등의 차별 사유를 삭제한 채 제정을 추진해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조장했던 차별금지법안 등의 현실은 인권의 보편적인 실현이 중요하면서도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북인권 현실은 인권의 보편성을 고민할 때 여러 가지 맥락에서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보수 북한인권 단체들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인권의 보편성’은 스스로가 자신의 논리를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다. 그렇다고 북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이 인권의 보편적 실현을 위한 대안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다만 인권을 가장한 반인권이 판치고 있는 요즘, 성찰하지 못함으로써 왜곡하고 해악을 끼치기 보다는 진지한 고민으로 차분히 보편적인 인권의 실현을 모색해나가는 태도가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 * 부분 「인권의 문법」에서 일부 인용(「인권의 문법」, 조효제, 후마니타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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