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조양호 일가 퇴진하라"가 낯선 이유

[인권으로 읽는 세상]노동자에게 갑질은 일상

5월 12일 저녁, 서울역 앞에 가면을 쓴 대한항공 노동자들이 다시 모였다. 5월 4일에 이은 두 번째 촛불 집회였다.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킨 대한항공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발언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 3월부터 물컵 던지기를 비롯해 폭력과 폭언 등 한진 총수 일가의 '갑질'이 연일 폭로되면서 대한항공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왔다. 3일 연속 비행근무로 지친 몸을 이끌고 참여한 승무원부터 불법 하도급이라는 '칼질'에 시달린다고 말한 계열사 직원까지 함께 모였다.

2014년 12월 '땅콩회항'으로 지탄 받을 때 고개를 숙인 것은 잠깐일 뿐이었다. 이번 갑질 사태는 대한항공이 여전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조씨 일가 OUT", "총수 일가 퇴진"을 외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갑질을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한다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그런데 '사장 퇴진'이라는 요구가 낯설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자주 듣게 되는 구호는 아니었다. 사장 나오라는 요구는 흔하지만 물러나라는 요구는 익숙하지 않았다.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사장 퇴진' 구호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할까?  

갑질은 일상이다 

촛불을 든 노동자들은 하나 같이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의 자부심을 이야기 했다. "비행기, 그냥 뜨지 않는다"고 말한 비행기 정비 노동자에게도 대한항공은 자부심이었다. 연간 2천만 명 이상을 실어 나르는 국내 최대의 항공 회사 대한항공. 이런 대한항공의 명성은 대한항공 노동자 2만 명, 자회사·계열사 노동자 4천 명, 여기에 집계되지 않는 수많은 하청 노동자가 모여서 하루에 수백 편씩 비행기를 띄웠기에 가능했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2014년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이 취업하고 싶은 직장 선호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땅콩회항'이라 불리는 갑질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2018년 3월, 만 3년을 겨우 넘긴 지금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갑질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수만 명의 노동자가 땀 흘려 대한항공의 명성을 만들었지만 정작 노동자의 삶은 "사람답게 일 좀 하자"고 외쳐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양호 일가가 유별난 사장이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자. 지난 4월 취업포털 사이트 인크루팅에서 직장인 89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갑질을 경험했다고 답한 노동자는 97%였다. 5월에는 노동단체 직장갑질119가 그 동안 제보받은 갑질 사례 중 최악의 사례를 모아 발표했다. 생리휴가를 쓰는 직원에게 생리대 검사를 하겠다는 공공기관부터 성추행을 일삼는 방송 제작사 대표, 식사 때 신입 직원에게 턱받이를 해달라는 회사의 사장까지 대한항공이 아니어도 노동자에게 갑질은 일상이다. 

돈 줬으니까 당연하다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갑질을 경험한다. 돈을 주는 사장은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루아침에 근무지를 옮기거나, 직무를 바꾸기도 한다. 이 모든 결정과정에 당사자인 노동자는 참여할 수 없다. 누군가는 근로계약서를 쓰고 돈 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기업의 일방적인 결정이 노동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근로계약서에는 명시되어있지 않다. 사장이 전보를 보내면 노동자의 삶의 터전이 바뀐다. 새로 옮겨갈 동네에서 출·퇴근을 고려해야하고, 집값을 걱정해야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직무를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쌓아온 업무의 숙련도를 포기하고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부터, 그게 불가능하면 퇴직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우리 사회는 너무 쉽게 경영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조현민'들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갑질의 조건이다. 

사장이 돈 줬으면 아무거나 시켜도 된다는 인식 틀은 법과 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근로기준법은 갑질에는 무기력하다. 흔히 말하는 임금, 해고, 휴가 등 경제적 권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에게 갑질에 대항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조합이어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는 경영권을 침해하고 회사의 영업을 방해한다는 불법 딱지가 붙기 일쑤다. 이럴 때 노동조합법도 노동조합을 보호하지 않는 것을 노동자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기업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거리에 나선 대한항공 노동자들을 향해 "그 정도 월급 받으면 참아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촛불을 든 대한항공 노동자는 "월급명세서에 갑질을 참으라는 항목은 없었다"고 답했다. "총수 일가 퇴진하라"는 구호가 낯설었던 이유는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권리를 경제적 권리로만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총수일가 퇴진하라는 구호와 함께 지금껏 회사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민주주의가 회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월급을 더 받으면 더 참아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도 참기를 강요당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서울역 앞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한 시민이 올라가 노동자들에게 물었다. "대통령 권력이 세냐, 조양호 권력이 세냐." 모두가 "대통령이요"라고 외쳤다. 대통령도 끌어내렸는데 조양호 끌어내리기가 그리 어렵겠냐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 가면을 쓰고 있던 한 대한항공 노동자는 작은 목소리로 "조양호"라고 답했다. 기업의 총수를 끌어내리는 일이 여전히 막막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리로 나왔다. 2017년 촛불이 대통령을 끌어내렸듯 그/녀의 일상에서, 삶터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은 노동자의 삶을 쥐고 흔든다. 회사 안으로 민주주의가 들어갈 때 노동자의 삶이 사장 맘대로 흔들리는 것을 멈출 수 있다. 조양호 일가의 퇴진이 그 시작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