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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단어장] 평등

A: 에구. 추워라. 안 그래도 추운데 가슴 시린 부고까지 왜 이리 많냐.
B: 그러게. 노래로 글로 삶으로 동행해주던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시니 이 추위가 더 힘드네.
A: 그분들에겐 한껏 애도라도 표할 수 있는데, 난 학대받은 아동의 죽음에는 그것도 못하겠더라. 면목이 없어서 말야.
B: 나도 그래.
A: ‘어떻게 아이한테 그럴 수가…’, 흔히 이런 말들을 하는데, 난 솔직히 그 말이 젤 면목 없어. 아이를 평등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아놓고 문제가 터진 후에야 ‘특별’ 취급하는 것 말야.
B: 나도 그런 말부터 나오던데. ‘어떻게 아이한테 그럴 수가 있어?’
A: 그런 말 하는 심정이야 알지. 하지만 ‘어떻게 아이한테’ 이 말은 늘 아이를 예외 취급하는 거 아닐까? 근데 그게 예외로 잘 해주는 게 아니라, 어른 맘대로 훈육할 때는 ‘특별’이 명분이다가, 정작 중요한 아동의 권리문제에 대해선 쭈뼛거리고 예외 취급하고 배제하는 장치는 아닐까?
B: 일단, 가련한 얘기에 울컥하고 그걸 표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A: 맞아. 인지상정이지. 아동이건 또 누구건, 누가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되면, 같이 아프고 내 몸 한구석이 저린 것 같고. 근데 그 다음이 늘 없기 때문에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 아닐까?
B: 그 다음이 뭔데?

‘위한다’가 아니라 동등하게

A: 누굴 ‘위한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말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우하고 동등한 관계를 맺는 것. 그런 관계 위에서 당연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
B: ‘위한다’가 뭐가 어때서? 위해주는 게 뭐가 나빠?
A: ‘위한다’는 걸 만약에 천대, 무시, 차별, 동정과 시혜… 이런 식으로 바꿔 말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B: 뭐,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 그건 쫌 듣기가 별로네.
A: 아동을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우한다면, 아동이 처한 문제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는 운명이나 팔자의 문제로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중요한 공적 사안으로 다루고 뭔가 다른 식으로 제도를 운영하겠지. 당연한 권리의 문제로 다루는 것과 뭔가 위기이고 예외적 상황이니까 조처하는 건, 정말 다른 거 같아. 근데 늘 예외로 취급하니까 문제가 터지면 ‘천하에 죽일 XX’ 식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괴물’로 만들거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치다 잊는 것 같아.
B: 아이가 어른과 같지는 않잖아? 굳이 ‘동등하다’라고 하지 않아도 네가 말하는 권리를 지켜주기는 가능한 것 같은데….
A: 내가 말하는 동등함은 권리의 평등함이야, 권리에 대한 자격을 가질 만한 어떤 본질, 본성, 능력이 원래 우리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게 있는 셈치고 서로를 그렇게 대하자는 약속이 인권이니까.
B: 우린 정말 불평등하잖아. 날 때부터 가진 자원과 자질도 다르고 지금 사회구조 속에서 격차도 크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 듣기는 좋은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궁할 때 그런 원리에 호소하면, 다들 코웃음이나 칠 텐데.
A: 너, 평소 인권에 대해 코웃음 치진 않잖아?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러면 인권의 대전제에 대해 비웃는 사람들에 맞장구치듯 같이 코웃음 치면 안 되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 ‘누구나 박탈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대접받아야 한다’가 인권의 원칙이잖아. 이게 말이고 말에 그칠 뿐이라고 고집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 말대로 평등하고 그 말대로 평등한 존재로 살아야겠다고 치받아야지.
B: 하긴, 평등의 토대가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권리도 인권이 아니라 특권일 뿐이지.


‘급’의 틀 깨기

A: 저성과자 낙인찍기, 쉽고 편리한 해고, 함부로 뒤집는 보육예산 집행, 이런 게 불평등한 구조로 고통 받는 노동자나 양육자에게만 고통이고 권리침해일까? 아동의 빈곤, 거기서 야기될 가능성이 큰 학대, 이런 걸 생각하면 아동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하지. 아동의 입장이 빠지고 확실한 권리 보유자인 어른 중심으로만 인권을 이해하면 그 인권은 한국 사회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B: 아동만이 아니야. 흔히 사회구조 속에서 취약하다고 분류‘당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동등한 사람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규정받아. 취약한 아동이나 또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취약해진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건 기존의 위계 속의 누구와 같은 ‘급’이 된다는 뜻일까?
A: 맞지 않는 틀 속에 들어갈 수야 없지. ‘급’을 나누는 틀 자체가 문제인데 그걸 그냥 두고 급수를 올리면, 그냥 끼어든 거밖에 안 돼.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00와 같아졌다’는 인간승리 인생역전 드라마를 계속 만드는 거지. 주인공만 바꿔가면서 말야. 그 주인공은 엄청 빡세게 살아야하고.

모두가 과자를 받는 게임

A: 난 어렸을 때 학교 교실에서 책상 밀어놓고 하는 의자놀이가 참 싫었어.
B: 나도. 처음엔 하는 척 하다가 ‘이걸 열심히 해서 뭐해?’ 이런 생각에 팔짱 끼고 물러나 있곤 했어. 마지막으로 남은 의자 하나에 앉은 애도 그리 신나 보이진 않았고. 중간에 의자 뺏으러 다투는 것도 그저 몸싸움 즐겨하는 애들만 좋아했지, 그 애들도 의자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아.
A: 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그 과자게임이 좋더라.
B: 과자게임?
A: 응. 원래 책에 나오는 게임이름은 그게 아닌데 난 그냥 과자게임이라 불러. 게임의 모든 참가자에게 엘리스가 자기 주머니에 있던 과자를 상으로 나눠줬던 것 같아. 오래 돼서 자세한 얘긴 희미한데 내 기억이 그렇다구.
B: 대충 어떤 얘긴데?
A: 강물에 흠뻑 젖은 새가 다른 짐승들에게 몸을 말리기 위한 경주를 제안해. 일단 경주선이 일직선이 아니라 동그라미야. 동그라미니까 누구든 어디서 출발하든 상관없어. 언제든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다 원할 때 멈추면 돼. 다들 뒤죽박죽으로 달렸는데 경주가 끝나자 모두의 젖은 몸이 말라 있었어. 그렇게 경주가 끝나자 ‘모두가 이겼다’고 선언하고 모두가 상을 받게 되는 얘기야.
B: 에이, 그건 유토피아 얘기지. 다 과자를 받으면 누가 노력하려 들고 힘든 일을 하겠어?
A: 과자를 인권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어때? 인권은 성과나 업적의 대가가 아니잖아. 사람이면 사람으로서 받을 당연한 대접이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당연한 것이 ‘원래’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정하는 거지. 그 당연한 걸 정하는데 누구나 참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게 평등의 원리고. 무엇보다도 젖은 몸을 말리는 건 모두에게 좋은 거잖아. 모두에게 좋은 그런 공통의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게 평등의 의미 아닐까?
B: 하지만 한국 사회는 불평등해야 발전이 있다고 하잖아. 평등과 불평등이 같이 논해지는 게 어째 이상하다. 우리가 너무 불평등에 익숙해서 그런가.
A: 불평등에 불만을 제기하면 여기저기서 ‘노력, 노오력’ 타령하는데, 한국 사회는 노력 타령으로 불평등을 아예 문제 삼지조차 않으려는 것 같아.
B: 하긴, 일 자체에 이상한 위계를 두고 있어. 다만 하는 일이 다를 뿐인데, 일의 위계를 사람의 지위와 연결시키는 게 문제 아냐? 나에게는 쓰레기 치워주시는 분의 일이 펀드매니저의 일보다 소중해. 소중하다는 건 위계하곤 다른 건데. 그런데 한국 사회에선 이 두 가지 일에 위계를 매기고 그 위계에 따라 사람의 지위를 높고 낮음으로 나누잖아?
A: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사회경제적 위계를 바꿀 수 없는 일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고 있어. 그런 위계를 불평등이나 차별로 여기지 않고 실력이고 능력이라고만 평가하는 게 문제 아닐까? 그런 평가 기준을 문제 삼아볼 순 없을까? 난 과자게임을 떠올릴 때면 그런 생각이 들어.

평등은 사회성을 풍부히 한다

B: 그건 그렇고, 너 연말에 왜 또 전화기 끄고 잠수 탔어?
A: 한 해를 어떻게 사나 불안하고, 내 자신이 창피스럽고, 그런 생각하다 보니 우울하고, 누구 만나면 괜히 갈구고 싸울 것 같아서.
B: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그렇지.
A: 주변 사람의 평가, 사회가 나한테 매기는 평가를 어떻게 신경 안 쓰고 살아?
B; 평가하면서 또 불안해지고 창피해지려고?
A: 왜 다른 사람들은 잘 해내는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못하는 것 같지?
B; 너, 과자게임 좋아한다며? 근데 왜 자꾸 반대로 비교에만 힘을 써?
A: 그러게. 내가 불평등에 젖은 사람인가 봐. 성격까지 변하는 것 같아.
B: 불평등하면 사람도 달라져?
A: 불평등한 경쟁체제에서 이득을 보려면 나만 생각해야 하잖아. 사람하고 친하게 지낼 시간을 아까워하고 아껴야 하니까 사회적인 걸 멀리해야지. 근데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고 그걸 풀려니 또 돈을 더 벌어야 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 보면 주눅 들고 눈치보고. 나보다 만만한 사람 보면 빽 소리 지르고 함부로 하게 되고. 이 사회가 하도 불평등하다고들 하니까 이 사회에 대한 애착도 떨어지고…. 일단 사람을 보면 의심부터 하게 돼. 당신도 기회와 여건만 되면 날 이용하려 들겠지. 뭐, 이런 의심.
B: 야, 정말 그러다가 너 정말 성격 변하겠다.
A: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나 다양성에 편견을 조장하고 쌍심지를 켜게 만든다고 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뭔가 덧입히고 덧칠해서 보는 거지.
B: 편견이나 혐오가 기승을 부린다는 말이구나. 그럼 평등하면 뭐가 좋을까?
A: 일단 나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나다운 것이 남과 비교해서 부끄럽거나 비정상인 게 아니라 존중받는다면 스트레스가 확 줄 것 같아.
B: 그럼 평등할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위험 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서로를 뭉개기보다 추켜세우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겠네.
A: 옛말에 “평등이 동료애를 낳는다”고 했어.
B: 평등이 우리의 사회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말이구나. 하긴 격차가 너무 나면 친구가 친구가 아니게 되고 모임 같은데 나가기도 꺼려지지.
A: 사회공동체의 삶에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것도 애착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참여는 서로 평등한 사람들끼리 도모하는 거라고 느껴야 가능한 거야.
B: 한쪽에는 조아리고 다른 쪽의 누군가에겐 발길질을 하는 관계에서 ‘공동’의 삶을 궁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굴종하거나 무시하면서 어떻게 상호적일 수 있고 공동의 것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어?
A: 평등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감정을 헤아리는 게 쉬워져. 불평등은 경제적 격차만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말라붙는 거야.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도 상상할 수도 없게 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득실거린다고 생각해봐. 정말 무섭지 않아?
B: 너, 그렇다고 또 전화기 끄고 방에 콕 처박히려고? 제발, 그러지마. 우리 사이에서라도 ‘공동’의 것이 뭔지 같이 생각하자구.

공동의 장, 공동의 무대를 만드는 평등

B: “서는 데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야” 송곳의 이 대사 생각나지? 정말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는 대사 아냐?
A: 맞아. 정말 명대사지. 근데, 이런 의문도 들더라. 다른 데를 디디고 산다 하지만 사회라는 게 가능하려면 다르기 이전에 공동으로 디딘 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B: 공동으로 디딘 데?
A: 응. 갑을병정으로 이어지는 위계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 발길질을 해댄다고 하지. 갑이냐 을이냐 서있는 위치에 따라 풍경은 분명 다를 거야. 하지만 갑과 을을 나누는 위계라는 문제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공통의 문제이잖아. 각각의 배역들의 처지가 다르지만 공동으로 선 무대, 공동의 장 같은 게 있는 거지.
B: 송곳처럼 튀어나와 저항하는 노동자도, 위에는 조아리고 아래로는 발길질하는 중간관리자도 사실, 그 공통의 문제 속에서 고통을 겪는 거잖아. 왜 그 젤 악질로 굴던 사람, 결국 잘렸어. 분명, 악역인데 그 사람에게 오히려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더라.
A: 난, 그런 감정이입이 단지 먹고사니즘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공감만은 아니라고 봐. 사람의 인성까지 바꾸도록 몰아가는 힘, 이런 불평등한 위계구조 속에 ‘같이 있다’는 느낌 아닐까?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도 있다,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째야 하는 거지. 그런 막막함의 공통성을 느낀 거.
B: 그 막막함은 공통이지만, 저마다 선 데에 따라 다른 막막함을 느끼지. 우리가 공동으로 디딘 데, 서로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게 무너지면 각자의 서는 데가 생길 수 없는 그런 토대를 찾는 일에 누구나 예외 없이 참여할 수 있어야지. 젤 중요한 평등은 우리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동등하다는 거. 내 삶뿐 아니라 공동의 삶을 결정할 힘이 있다는 거야.
A: 나의 삶, 나의 처지가 적어도 ‘무효표’나 영향력 없는 ‘사표’처럼 취급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평등한 사회에서 내가 감내하는 문제가 그냥 내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의 문제로 다뤄졌으면 좋겠어. 영웅이나 정치가가 쨘 하고 그렇게 해줄 게 아니니 내 주변하고라도 공동의 문제에 머리를 맞대야지. 그게 사람 사회에서 동료가 되는 평등의 힘일 거야.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