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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기억하는 4.16] 사회운동과 세월호

[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우리의 삶에서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참사에 직면하자고 제안한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할 때 사회를 바꿀 힘이 된다. 매주 <인권오름>에 실릴 글이 질문을 함께 품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1. 사회운동, 세월호 참사의 구조적인 원인을 묻다

세월호 참사…, 시민들은 과거 대형 참사와 다르게 반응했다. 배는 침몰하는데, 그 광경을 눈으로 보고 있는데, 국가는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모두들 의아했다. 아니, 우리의 국가가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 영정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것은 내 탓일 수도 있다는, 우리 기성세대가 이룩해놓은 사회가 야기한 문제일 수 있다는, 세월호 침몰의 배경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안산 분향소를 처음 방문했을 때, 사회운동가들이 할 수 있는 건 같이 통곡하는 것뿐이었다. ‘운동의 위기’라는 말을 되뇔 것도 없었다. 우리들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야기한 비극이라는 사회운동가들의 직관은, 그저 ‘미안하다’는 시민들의 직관과 사실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구조적인 원인을 파헤쳐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아픔을 공유하고 넋을 기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재난사고에 대해, 이제는 사회운동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2. 사회운동이 함께 한 세월호

‘구조적 원인을 파헤쳐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안전’이라는 단어를 덩그러니 써놓고, 이게 무언지, 왜 우리가 이 담론을 사회운동의 의제로 삼아야 하는지 그에 대한 대답부터 해보기 시작했다.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저 칠판에 쓰여 있는 안전은 영토와 재산의 안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위한 안전이다. 안전하려면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안전에 대한 시민의 권리 회복이 우선이다. ‘안전’에 대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의미부여와 가치 판단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했다. <존엄과 안전>, <안전대안> 이 명칭들은 그렇게 작명되었다. 구조적 원인을 파헤쳐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대모임을 구성하자고 제안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보는 인권단체 활동가들, 처음 보는 사회단체 활동가들, 처음 보는 안전보건 활동가들, 처음 보는 노동운동 활동가들, 처음 보는 안전교통 활동가들, 처음 보는 환경운동 활동가들…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 부딪힐 일도 별로 없었던 이들이 모였다. 그렇게 <안전대안팀> 활동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유가족들을 만나 슬픔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안산에서, 진도 앞바다에서, 서울시청 앞에서, 국회 앞에서, 청와대 앞에서….
누군가는 국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또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다르기 위해서는 결국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고, 그러려면 특별법에 ‘안전’에 대한 유가족들, 그리고 시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생전 접해 본 적도 없는 ‘해양사고’ 자료들을 들여다보았고, 또 누군가는 ‘안전사회’ 담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도서관을 뒤졌다. 서로 자기가 할 일을 찾아 알아서 움직인 것이다.

출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 출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3. 사회운동이 깨달은 세월호

이 과정에서 이들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유병언’이라는 유령을 쫓느라 온 나라가 떠들썩한 사이, 앞뒤 재지 않은 기업들의 이윤추구 행위로 수많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기업의 책임은 제한되어 있고, 기업주들은 늘 위기를 모면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위험이 곳곳에 만연해 있었지만, 정부는 안전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켜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폭발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야기할 것이 분명한데도 정부는 노후한 핵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의 생명을 언제 어떻게 가로챌지 모르는 위험 앞에서,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일을 멈출 수 없는 노동자의 비참한 처지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민들의 알 권리가, 참여할 권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10년마다 반복된 대규모 해양재난사고가, 하나같이 과적과 과승, 그리고 예방을 위한 정부의 관리감독 소홀에서 비롯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안전한 나라, 안전한 대한민국은 언감생심, 세월호 침몰의 원인인 과적․과승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규제를 강화할 방안조차 마련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연안여객에 대한 정부 대책도 생색내기식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한 종합대책이라는 것은 고작 안전관련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안전 문제를 시민 개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호주머니나 털어내려는 기만책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4. 사회운동을 움직이게 한 세월호

정권의 책임환기에만 그치지 않는, 정치적․사회적 대안을 향한 운동…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규모 청원운동이 시사하듯, 사회운동은 다르게 움직이려 했다. 진실을 밝힐 권리가 시민에게 있다는 점에서 법을 구성하는 주체는 시민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제도를 바꾸려는 것도 역시 시민의 권리였다. 3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명한 서명함을 들고, 유가족들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국회로, 청와대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정치운동, 사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내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기까지였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문제를 ‘정치공방’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세월호의 비극을 한국사회 성찰의 계기로 삼으려 하지도 않았다. ‘정치공방’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사이, ‘국가 공동체와 시민의 안전’이라는 질문은 시민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미안하다’는 시민들의 직관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원하고 소망했던,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다른 사회, 그런 한국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던 시민들의 갈구가,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바람이 또다시 그렇게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월호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유가족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고 있다. 기억한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 이전에, 세월호 참사를 처음 목도했던, 그 비극의 무대를 보면서, ‘미안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아닐까?
‘세월호를 인양하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진도 앞바다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고 있다. 인양한다…. 어쩌면 우리가 인양해야 할 것은 ‘세월호’ 이전에,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달라진 한국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던,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다짐했던 그 심정은 아닐까?

2015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시청 앞 광장에서 ‘세월호’가 움직이고 싶은 사회운동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임

박준도 님은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이며, '존엄과 안전위원회' 안전대안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