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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거리는 사랑방] 사람의 꿈과 힘을 불러일으키는 운동

“분회장이 되기 전에는 큰 빌딩을 갖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경희대 총장과 직접 교섭해보는 게 꿈입니다 ” 이 말을 듣고 눈물이 삐져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게 꿈이 바뀌지?’하는 벅찬 마음을 눈물이 먼저 알고 신호를 보낸 게다. 작년 3회 청소노동자행진 사회를 맡은 경희대학교 청소노동자이자 공공노조 서경지부 경희대 분회장 백영란 님의 말이다. 다른 분들도 꿈을 이야기하였다. 청소노동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꿈을 말하기도 하였다. 꿈이 바뀌고 꿈이 생기고……. 인권운동은 사람의 꿈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잊혔거나 감히 꿀 수 없었던 꿈을 꾸게 만드는 것, 도전하게 만드는 것, 그게 운동이 아닐까.

2010년부터 인권운동사랑방을 비롯한 단체와 노조가 함께 청소노동자 권리 찾기인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 캠페인을 2년간 했고, 올해까지 청소노동자행진을 4년째 하였다. 여성, 고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그녀들을 만나는 일은 우리 사회에 철저히 위계화된 사회의 차별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였다. 남성노동과 여성노동이라는 성별 위계, 핵심노동과 주변노동이라는 노동 위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위계와 차별. 그 차별은 성별화된 노동공간과 임금격차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청소노동자들을 설문하고 심층면접도 하면서 노동과 성별화된 사회에 대한 공부도 병행하였다. 물론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도 했다. 그다음 해 캠페인단과 청소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알려내는 과정에서 만난 청소노동자들은 몇몇 학교에서 노조를 만들기도 하였다. 홍익대학교, 경희대학교, 세종대학교, 한국종합예술학교, 서울시립대 등등.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하기도 하면서 꿈을 꿨다. 그리고 그 꿈에 나도 덩달아 즐거워서 신이 났다.

그에 비하면 국가인권위원회 관련 투쟁은 신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무자격자 현병철 씨가 위원장이 된 후, 인권위의 관료화가 심해진 터라 인권위원 인선투쟁을 하는 건 힘도 받지 않고 절박하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더구나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통 움직이지 않는 관료를 만나거나 국회의원을 만나 설득하는 일은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작년 인디스페이스에서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을 보러온 현병철 위원장을 망신시키려고 했을 때, 시민들이 보여준 마음은 큰 위안이었다. 결국, 시민들의 지지로 현병철은 극장에서 쫓겨났다.) 현병철 인권위원장 연임반대투쟁으로 연일 바쁜 일정이었지만 3회 청소노동자 행진을 함께 준비하는 활동은 나에게 오히려 힘을 줬다. 새벽 4시, 여의도 환승역에서 만난 청소노동자들, 함께 캠페인을 한 청소노동자 간부들과 활동가들 모두 내 마음과 몸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인권운동에서 중요한 게 스스로 권리주체화(자력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난 사람들에게서 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기에, 당사자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난 사람들의 힘을 믿는다. 사람들의 힘이 모여 출렁거리는 운동이 바꾸는 세상, 세상의 질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듯, 운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에 역동적이다. 나는 여러 사람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가는 변화, 역동성 속에 휘말리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사람들과 사람들의 관계, 각각이 선 자리(위치성)나 힘의 방향과 형태가 바뀌기도 하고, 그 역동적 움직임 속에 참여한 사람들이 느끼는 공감은 대중적 흐름이 결과론적으로 실패하든, 성공하든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한번 맛본 대중운동의 힘, 역동성은 우리를 감동시키니까.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비폭력 직접행동의 경험이 유난히 많았던, 2008년과 2009년에 했던 백혈병․HIV/AIDS 감염인의 의약품 접근권 실현을 위한 연대활동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2008년에는 백혈병 치료제인 스프라이셀과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의 약값이 결정되는 시기여서 기습 항의 시위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복지부와 심평원, 그리고 초국적 제약회사 로슈에 들어가 기습시위를 했던 일들. 회의실에 진입하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잠복했던 일, 로슈에 기습으로 들어가 딱지를 붙였던 일(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 손해배상 청구라도 받을까봐 스티커를 잘 떼어지는 비싼 걸로 했던 기억이 있다.), 회의장에서 피케팅을 하며 침묵시위를 하거나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던 일 등등. 사실 그때 함께 하던 보건의료 활동가들, 에이즈감염인 인권활동가들, 정보공유연대 활동가들, 모두들 열정적이어서 일이 많아도, 회의가 길어져도 즐거웠다.

그중에서도 로슈 규탄 국제행동을 할 때 외국의 에이즈인권단체나 인권활동가들이 보여준 적극적인 활동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그저 서명 정도 받으려고 이메일을 뿌렸는데 ACT-UP 파리에서는 로슈 앞에서 피를 뿌리는 퍼포먼스 등 강렬한 시위를 했고, 뉴욕에서는 로슈 광고대행사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을 만든 로슈는 한국이 건강보험 시스템 때문에 약가가 낮게 책정되자, 전 세계 공급약가를 유지하려고 3년째 아예 한국에 공급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감염인인 가브리엘은 건강이 몹시 나빠져 죽음의 위협까지 받아야 하였다. 그래서 정말로 그들의 활동이 고마웠고, ‘연대란 이런 거구나, 국경을 넘어 함께 손잡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우리는 2009년 특허청에 푸제온 강제실시를 청구했지만 기각당하였다. 로슈는 기만적이게 푸제온을 무상공급함으로써 강제실시 요건을 피해갔기 때문이다. 특허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는 특허권자의 사익과 공익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제3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생각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활동가들의 연대가 있었기에, 푸제온 무상공급이라는 반쪽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사회권팀에서는 당사자권한강화나 자력화를 중요시했고, 그래서 그동안 했던 건강권과 노동권 활동에서도 사람 만나는 일, 사람 안에 잠재된 힘을 같이 끌어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활동을 하면서 내 안의 힘들, 꿈들은 얼마큼 자라났을까? ‘여러 사람 덕분에 훌쩍 자랐어요.’라고 감히 말은 못하더라도, 함께 한 그 날들이, 함께 할 그 날들이 나를 설레게 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