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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삶의 공백을 채우는 인권의 언어

인권의 관점에서 본 사회복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바라볼 때 각자의 경험 속에서 구성된 가치관으로 판단한다. 60~80년대에 10대를 보낸 사람들에게 가난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남들 쓰는 거 안 쓰고 안 먹고 절약해서 넘어야 할 산이었다. 혹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만 하면 극복될 시련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한다. 유명 메이커인 값비싼 외투, 공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고가의 각종 전자 기기들을 욕망하는 아이들을 질타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시기의 기준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가늠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인권교육센터 들은 지난 3월부터 ‘아산교육복지네트워크 그물코’,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와 함께 총 8회기의 ‘2011 아산지역 아동, 청소년 인권교육활동가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이하 전지협)의 회원단체이기도 한 아산교육복지네트워크 그물코(이하 그물코)는 아산지역의 아동, 청소년을 지원하는 기관들의 협의체이다. 지역아동센터의 특성 상 이들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지역의 빈곤계층 아이들이다. 빈곤으로 인한 사회적 소외감과 박탈감에 노출된 아이들이기에 더욱 이들을 대하는 지역아동센터 종사자들에게 인권의 언어가 절실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복지는 잔여적 복지다.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향유할 수 있는 생활수준으로의 접근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어떤 사람들만 돌봐주는 복지, 가난한 몇몇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복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결국 취약계층의 아이들에게 낙인으로 남을 뿐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형성하도록 힘을 주지는 못한다.


날개달기: 내 인생의 그래프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은 삶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서 단절을 경험한다. 자기 삶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손상된 레코드판처럼 길을 잃고 튀는 부분은 어디일까? 이 공백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우선 참가자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참가자들에게 8절지를 나눠주고 출생을 기준으로 혹은 본인이 기억하는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좌표를 그리도록 요청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들은 각자의 감정의 크기만큼 위쪽(양의 방향)으로, 비교적 안 좋았거나 슬프고 힘들게 기억되는 순간들은 그 무게만큼 아래쪽(음의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사건들을 중심으로 내 삶을 다시 구성해보는 것이다. 그래프가 그려내는 변주 속에는 나와 연결된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들과 함께 그것들이 나의 삶에 미친 영향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 속에서 내 삶에 영향을 미친 환경과 조건들을 새롭게 보고 그 상황을 구조적이고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경험도 가능하다.

#1.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를 하는데 너무 못 해서 불행했어요. 천안아산이 비평준화지역인데 공부를 못해서 원치 않은 학교를 가서 좌절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첫사랑을 하게 돼서 나름 행복했어요. 그러다 대학교 떨어져서 좌절했는데 이후 재수해서 붙어서 다시 행복해졌어요. 현재는 원하는 일을 하게 돼서 상승 곡선으로 흐르는 중이에요.

#2. 가난한 농부의 열 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로 남아있어요. 쪽지고 월남치마 입고 고무신 신은 엄마, 머리 하얀 아버지. 사랑받으며 잘 지낸 편이지만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셔서 아버지 술 드시고 오시면 힘들었죠. 가난했던 것 때문에 초등학교 때 철도 들고 눈치도 빨라졌던 것 같아요. 약간 중성적인 이미지라서 친구들도 많고 남자 아이들도 날 좋아하고, 인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항상 걸림돌이었던 것은 가난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교복자율화로 아이들은 나**, 프**** 신고 다니는데, 나는 엄마가 고추 팔아서 잠바랑 바지를 시장에서 사줬어요. 그런데 으유~. 친구들 엄마는 젊어서 이쁜 것 입고 다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해서 비교되고 그런 부분에서 눌렸죠. 그것만 아니었으면 잘 나갔을 텐데…. 신학대학을 갔는데 1학년 다니고 2학년 때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하고, 어느 집사님의 집에서 가정교사, 가정 일을 돌보다가 복학해서 결혼하고 학교에 다녔어요. 가난이 너무 싫었어요.

#3. 저는 1남 2녀예요. 아빠가 서울시청 공무원이었는데, 어찌되었는지 아빠랑 안 살고 할머니랑 살고 있었어요. 기억에 우리 집이 주인집이고 옆에 세 주고 살았고, 집 옆에 철도가 있어서 못이랑 병따개 놓고 잘 펴지면 왕 먹는, 그런 놀이해서 대장 먹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달리기를 잘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엄마가 달리기 하면 안 된다고, 한국무용 하면 그것도 안 된다 하면서 거기서 뺐어요. 여자라고 부반장 했는데 이것도 엄마가 좋은 거 아니라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매일 엄마 안 오시느냐고 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가 예산에 사셔서 아마 학교오기 힘드셔서 그런 거 못하게 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렸을 때는 학원 안다니고 차장놀이 같은 거 하고 놀았죠.

학교, 성적, 가족과 친구들, 당시의 나의 상황과 조건들이 상향곡선으로 하향곡선으로, 완만하게 때론 가파르게 변주된다. 그 각각의 요소들이 버무려지면서 그 연장선상에 지금의 ‘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지난 경험들을 재해석하고 이해하게 된다. 참가자들의 인생그래프에는 현재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들과의 인권적 관계맺음의 열쇠가 숨어있다.


더불어 날개짓: 삶의 공백을 채우는 인권의 언어

생애주기 그래프 속에는 각자가 살았던 시대적 환경이 있고 이를 통해 당시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아이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만큼 현재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 시기와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지금의 빈곤을, 빈곤에 놓인 아동, 청소년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참가자들은 현재 빈곤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신문에 보면 워킹푸어라고, 솔직히 지역아동센터서 80만원 가지고 부자될 수 없잖아요. 결코 부자는 될 수 없는 상황이고 점점 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우리 사회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되지 않았나…”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수입이 안 받쳐주잖아요. 일을 해도 살기 힘들죠.”

일을 해도 빈곤한 상황이 계속되고 대물림 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한 때 가난한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통해 가난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이미 가난한 이들은 좋은 대학을 갈 수 없는 교육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빈곤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들이 무슨 돈이 필요하냐, 센터에서 밥 주고 공부시켜주는데, 애들이 유명메이커 너무 좋아하는 거 같다’는 등 화살을 아동, 청소년 개인들에게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나**를 사고 싶어하던 세대와 지금은 다른 사회다. 현대는 완전 소비사회이다. 아이들의 일상은 신상품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명품 소유가 현대인의 자격인 양 광고한다. 때문에 소비에 있어서의 박탈감은 무력감과 사회적 소외로 이어진다. 이제 소비는 필요한 물건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상징 혹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그러한 문화 속에 던져놓고 여전히 ‘절약해서 살아야지’라고 훈계하는 것은 냉소만 자아낼 뿐이다. 지금의 빈곤은 예전과 다르고 소비도 아이들의 삶에서 중요한 영역이 됐음을 이해하는 것이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과의 대화를 여는 열쇠일 수 있다.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는 서사이다. 나를 설명하는 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나의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어느 지점에서 ‘아, 잘 모르겠다’라고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 순간들이 종종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채워나가려고 한다. 설령 근거가 빈약한 짐작이나 추측일지라도. 또 평가와 반성을 통해 이야기를 재구성해 가면서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냐면 이야기를 이어갈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보통 가족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가족 구성원에게 생긴 변화가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부모님들의 변화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크다. 이런 가족 구성원에게 발생하는 변동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설명도 듣지 못한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상황을 풀어낼 어떤 언어도 없는 낯선 풍경일 뿐이다. 이 ‘설명하지 않음’이 하나의 권력이기도 한 것이다. 인권에서 말하는 나이주의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의 부분적 실종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떻게 채워갈 수 있을까? 그건 그 상황에 내가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의 증명이다. 어떤 해명도 없었기에 시간이 지나도 납득하지 못한 채 물음표로 남아있는 순간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며 나의 결정권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백은 인권의 언어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이주의로 합리화하기에 앞서 아이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설명하고 많은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동행할 때 실패하든 성공하든 자기 경험으로 남는다.

머리를 맞대어

현재의 지역아동센터의 모습은 어떤가? 센터 내 프로그램을 결정할 때 아이들과 충분히 논의하는가. 아이들의 이야기에 충분히 주목하고 있나.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머리도 아프고, 애들이 계속 얘기를 하려 하니까…”

일의 효율성이나 복지의 대상으로서의 접근이냐, 아이들의 삶에 대한 주목이냐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복지의 인권적 접근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복지개념은 여전히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라는 분리 속에서 ‘원조’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놓인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개인이 겪는 소외나 억압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다. 여전히 원조가 필요한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복지는 개인을 지원하는 것에서 나아가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당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은 중요하고 지역아동센터는 그런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평범한 삶, 다른 사람과 비슷한 삶은 쉽게 이야기되는 반면 나는 다르게 살고 있을 때 이야기하기 힘들어진다. 다른 삶이 개성이 아닌 부끄러움과 사회적 위축으로 여겨질 때 더욱 그렇다. 당사자들이 이 사회적 차별이나 불평등한 구조를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당사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인권의 언어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현 시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나의 눈으로 나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덧붙임

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교육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호연 님이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