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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같이, 끝까지, 싸워서, 이기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 인정, 그 뒤

2011년 6월 23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과 림프종에 걸린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여 청구한 행정소송에 대한 판결 선고가 있었다. 다섯 명 가운데 황유미, 이숙영 두 분은 산재로 인정하고 황민웅, 김은경, 송창호 세 분은 산재로 보지 않는다는 판결이었다.

빼곡히 들어찬 방청석 뒷줄에 서서 황유미, 이숙영 두 분의 백혈병에 대해 산재보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의 이유를 들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처음으로 직업성 암을 산재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반도체 백혈병 산재 인정 순간

[출처: 엄명환 현장기자]

▲ [출처: 엄명환 현장기자]

“전체 환기시스템이나 국소배기장치가 설치되어 있더라도 유해물질이 모두 정상배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라인 내 공기순환 시스템 상 다른 공정에서 배출된 유해화학물질에도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작업환경 측정시 공기 중 화학물질 농도가 허용기준 이하로 나왔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보다 많은 양의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전리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에 개인차가 있을 수 있고 유해화학물질에 함께 노출되어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의학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하여 백혈병의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라는 판결 요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지난 4년 동안 수없이 되풀이해야 했고 번번이 무시당하고 폄하당해야 했던 말들이 판사의 입을 통해 한마디씩 확인되니 기쁨과 허탈함이 함께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소송을 통해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세 분과 관련한 판결은 아쉬움과 한계가 크게 남았다. 재판부는 이들 세 분에 대해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인정되지만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발암성이 밝혀진 유해화학물질이나 전리방사선 등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해당 질병 사망이나 발생비가 일반 국민과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낮다”, “퇴사 후 몇 년이 지난 뒤 진단을 받았다”, “퇴직 이후에도 유사 업종에 종사했다”라는 이유를 들어 업무관련성을 낮게 평가했다.

황유미, 이숙영님처럼 웨이퍼 가공공장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했던 경우와 달리 산재인정을 받지 못한 남성 엔지니어들이나 조립공장 오퍼레이터 경우에는 업무 양상을 정형화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직무를 맡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근무를 시작하여 이미 이들의 작업장은 사라졌고, 그 작업장에 대한 기억들도 사라진 지 상당히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다고 볼 충분한 근거를 대기란 매우 어렵다. 그나마 삼성전자 같은 큰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이기에 익명으로라도 작업환경에 대한 제보를 받을 수 있었고 작업환경에 대한 증인을 찾아볼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인데, 만일 작은 사업장이나 이미 사라져 버린 사업장의 노동자라면 어땠을까?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여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권리의 구조적 박탈에 주목해야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산재보험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구조적으로 박탈되는 것은 옳지 않다. 차라리 회사나 정부로 하여금 각 질병이 절대로 업무와 관련되지 않았으며 온전히 개인 질환임을 입증하게 하는 게 맞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입증 책임을 이렇게 획기적으로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회사가 노동자의 산재보상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피해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이번 소송에서 삼성은 소송과 전혀 상관없는데도 ‘피고 측 보조참가인’으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산재 불승인을 주장했다. 국내 최대 로펌의 변호사들을 고용하여 ‘정말 깨끗해 보이는’ 작업장의 모습을 화려한 동영상과 수백 쪽의 자료들로 만들어 재판부에 제출했다. 물론 피해 노동자들에게는 작업환경이나 사용물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부기관이 수행한 조사결과조차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못하도록 했다.

삼성에게 그들의 작업장에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내고 해결하려는 자세를 바라는 건 너무 심한 일이었을까. 아니, 최소한 산재인정을 방해는 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였을까. 그래 ‘무리’였다. 이런 짓을 두 번 다시 하지 못하도록 구조적으로 막아주는 규제를 만들어야지, 기업에게 인간다움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헛된 일이다.

이번 판결,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

한편 이번 판결 가운데에는 소위 전문적 지식이나 과학적 사실이 오독된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망비나 발생비가 일반 국민과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낮다”라는 점이 불승인의 근거로 제시되었는데, 이른바 “건강노동자 효과*”를 고려한다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송창호 씨에 대해 “퇴직 후 9년 뒤에 발병했고, 퇴직 이후에도 유사 업종에 종사했다”라는 이유를 들어 업무관련성을 낮게 평가한 점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산재보상 여부는 이 노동자의 병과 “노동”이 연관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이 노동자가 평생 반도체 업종에서 일을 하다가 병에 걸린 것이라면 업무관련성을 의심해봄직한 근거로 제시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이 사실이 불승인의 근거로 쓰였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점들을 바로잡고 피해 노동자들의 명예와 권리를 되찾기 위해 반올림은 이번 행정소송에서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세 분의 사례에 대해 고등법원에 항소를 할 생각이다. 너무 당연한 결정이지만, 한편에서는 고민도 남는다. 생각해보자. 작년 1월 11일 시작된 소송이 일년 반 만에 마무리되었는데, 처음 산재신청을 했던 때로부터 치면 황유미 씨는 만 4년, 다른 피해자들은 만 3년이 걸린 셈이다. 백혈병과 림프종을 진단받은 뒤 항암치료를 받거나 병든 딸과 아내를 간병하며 보내야 했던 시간들까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길고도 긴 시간이다.

고통의 시간, 치유의 투쟁

그들은 이 시간들은 어떻게 살아냈을까. 택시 뒷좌석에서 숨진 갓 스물 두 살 딸내미의 마지막 모습이, 머리가 다 빠져도 잘생기고 멋지기만 하던 남편의 얼굴이, 핏덩이 같은 아이를 남기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젊은 아내의 한스러운 표정이 계속 아른거렸을 게다.

병과 싸워 이긴 분들도 투병 당시의 절망과 고독의 기억이 아물 만하면 덧나고 덧나면서 아팠을 것이다. 이렇게 상처들이 터지고 아물고 또 터지면서 몇 년이 흘렀고, 그 새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박지연 씨는 세상을 떠났고(2010년 3월 31일), 그녀의 유족은 소송을 중도에 포기했다. 산재 신청을 포기한 분들이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분들이건 공통된 사실은, 이 시간들은 분명 고통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투쟁은 끝까지 가야하지만, 치유를 끝까지 미뤄서도 안 된다. 앞으로 반올림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는 피해자 가족들과 어떻게 함께 상처를 치유해가면서 싸울 것인가이다.

그 과제의 해답은 지난 6월 23일 법원의 판결 선고를 듣고 피해 가족들과 반올림 식구들이 술잔을 함께 들면서 외쳤던 건배사에서 시작할 거라 믿는다. “다같이, 끝까지, 싸워서, 이기자”.


* 건강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 : 노동자 집단의 건강 지표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상태가 포함된 일반 인구 집단보다 더 좋은 경향을 띤다. 노동 시장의 진입 과정에서 선별이 되고 건강 지표가 낮아질 때 탈락되기 쉬운 탓이다.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건강 문제가 일반 인구 집단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피하려면 이와 같은 건강 노동자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덧붙임

공유정옥 님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