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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간디에게 들어보는 인간 존엄성의 의미

<간디 자서전> 중에서


“사람이 제 동료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설명이 필요 없는 책, <간디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귀한 얘기들이 아주 많지만, 이 글에서는 앞에 인용한 한 문장에 주목하려 한다.

마하트마 간디

▲ 마하트마 간디


이 문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발라순다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타밀 출신 계약 노동자였다. 그는 유럽인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자기 주인에게 이빨이 두 개 부러질 지경으로 몹시 얻어맞았다. 이에 발라순다람은 간디에게 법적인 도움을 구하게 됐고, 간디 자서전에 나오는 이 부분은 간디와 발라순다람이 만나는 장면에 관한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을 만나는 인도인은 인도 터번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거나 그게 아니면 영국식 옷을 입고 시중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발라순다람은 간디를 만날 때 유럽인 주인에게 하듯이 터번을 벗으려 했고, 이에 화들짝 놀란 간디는 그를 제지했다.

간디는 타밀 사람이 받는 굴욕을 같은 사람으로서 받는 굴욕으로 느꼈고, 즉각 그것을 중단시켰다. 변호사인 간디가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고 발라순다람이 간디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도 간디에게는 굴욕이었다. 이 두 번째 굴욕도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쓴 것이다. 동료 인간을 얕보고 낮추는 것을 요구하는 관행 위에서 누리는 고결함은 가짜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간디의 이런 행동과 깨달음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과 실천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존엄성의 실현을 위한 싸움을 가까운데서 목격하고 있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룬 머리는 지끈, 땀띠와 모기로 이곳저곳 근질거리는 몸은 불쾌 그 자체다. 제 몸 돌보기도 헉헉거리는 이런 때, 물도 없이 밥도 없이 혹은 전기도 없이, 정치와 돈과 언론에 철저히 무시당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몇 사례만 언급하려 해도 숨이 차다.

도시속의 섬이 돼버린 철거반대 농성지인 홍대 앞 ‘두리반’, 칼국수와 보쌈을 팔던 식당이다. 세입자를 보상대책도 없이 내쫓고 개발이익을 보려는 건설사에 맞서 2백일이 넘게 버티고 있다. 20여일 전에 전기마저 끊겼다. 강을 흐르게 놔두라고 이포보와 함안보 크레인 위에 올라간 환경운동가들, 숨을 태우며 4대강 사업에 맞서고 있다. 돌아온 비리재단에 학교를 내주라는 명을 받게 된 상지대의 학생과 교직원들, 주인더러 강도에게 집을 비워주라고 명하는 그런 법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고 있다.

전기가 끊긴 두리반<사진 출처; http://2daplay.net>

▲ 전기가 끊긴 두리반<사진 출처; http://2daplay.net>


나는 이들 싸움의 공통점을 ‘존엄성’의 실현이라 본다. ‘존엄성’은 인권과 늘 같이 다니는 말이지만, 참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헌법과 국제인권문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대한민국 헌법), “모든 사람은 내재된 존엄성을 가지며 그 존엄성을 존중받고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남아공 헌법), “모든 인류 구성원의 내재된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함이…”(세계인권선언 전문) 등과 같이 존엄성을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존엄성’을 인권의 기초로 규정한 것은 과거와 다른 현대 인권의 으뜸가는 점이다. 과거에는 ‘존엄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썼다. 일단 어원으로 따져볼 때 오늘날 쓰는 ‘존엄성’이란 말을 사용한 예가 드물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 유대교 경전과 기독교 성서, 중세 철학 등에서 존엄성과 비슷한 말을 찾아보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고들 말한다. 또한 어쩌다 ‘존엄’이란 말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을 모든 인간의 것으로 여겨서 쓴 것이 아니었다. 사회 속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 또는 직위 때문에 ‘존엄하다’고 여기거나 어떤 사람이 가진 명성 또는 명예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겼다. 또는 어떤 사회가 중요하다고 선택한 속성 때문에 존엄하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이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고 여기는 식이다. 심지어 인간의 가치는 다른 모든 것 중에서 그 사람에게 매겨진 가격이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었다.

오늘날 인권의 기초가 되는 존엄성은 아주 다르다. 사회적 위계나 서열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기에 존엄하다는 생각은 현대의 인간 존엄성 사상에서 제일 먼저 걷어차인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 존엄성은 ‘평등’에 기초해있다. 모든 인간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존엄하다. 사회적 지위, 인종, 성, 국적, 다른 어떤 사회적 지위의 표시에 상관없이 사람은 존엄성을 갖는다.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은 ‘존엄에 대한 감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존엄성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굴욕과 인간성 말살을 참을 수 없기에 거기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반대로 존엄감이 없거나 부족해 동료 인간을 상대로 참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린 분노하고 존엄감의 결여를 탓한다. 하지만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부족함을 탓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권의 장에서는 늘 존엄성을 둘러싼 오해와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계속된다. 내가 높은 사람이니까 존엄하다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복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복종 받지 못하면 질색을 하는 사람, 모욕과 굴욕을 받아도 그게 그런 건지 잘 모르는 사람, 높은 쪽을 떠받들고 복종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권을 주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잘난 쪽은 잘나서 인권을 주창할 필요가 없고, 복종하는 쪽은 복종하기에 인권을 제기할 줄 모른다. 주인과 하인과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하인의 복종 없이 주인의 잘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호의존성은 양쪽의 존엄성 상실을 보여준다.

반면 존엄에 대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동료 인간을 위해 복무한다. 그런 실천은 영웅적 희생이나 용기와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기초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인권의 요구가 정당해진다. 인권의 요구는 그것 없이는 존엄한 삶이 가능할 수 없는 조건을 내민다. 존엄하니까 인간은 착취나 굴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존엄한 인간은 정부나 그 누구의 개입 또는 강제 없이 내 삶을 내가 조각할 수 있어야 한다(자유). 누구에겐 조각칼을 쥐어주고 누구는 맨손으로 하라 할 수 없다. 삶의 자유로운 조각을 위한 기본 조건은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한다(평등). 그런 조건을 만들기 위한 정치․사회․경제적 및 국제질서 구성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연대).

한편 인간 존엄성에 대해 ‘인간은 만물의 영장’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과거의 유물이다. 과거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식물이나 바위보다 더 많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여기고 자연을 점령하고 복종시킬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종보다 특별대우를 받을 까닭이 뭐야?’가 현대 인권에 담긴 질문이다. 인간이 존엄하다 할 때 인간만이 중심이고 자연 속의 다른 종을 배제해도 된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세상 만물은 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존엄성을 자연 만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에 존엄할 수 있다.

존엄성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존엄성 말살에 복종하지도, 굴종으로 협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저들은 내가 높은 사람이니, 내가 결정했으니 복종하라 강요하고, 내게 돈과 힘이 있으니 떠받들라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존엄성에 가격을 매기고 포식성을 드러내고만 있으니 간디 말대로 “사람이 동료 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간디 자서전> 중에서

나는 발라순다람이 손에 터번을 들고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당하는 모욕을 나타내는 특별한 아픈 사실이 있다. 나는 이미 터번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계약 노동자나 낯선 인도인이 유럽 사람을 찾아갈 때는 그 앞에서 머리에 쓴 것, 그것이 캡이거나 터번이거나 간에, 또 그렇지 않고 머리에 두른 스카프거나 간에 그것을 벗어야 한다는 하나의 관례가 강요되고 있었다.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발라순다람은 내 앞에서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런 일은 처음으로 당해 보았다. 나는 창피라도 당하는 것 같아 그더러 터번을 두르라고 했다. 그는 하라는 대로 하면서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나타난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언제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제 동료 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