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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례의 인권이야기] 꽃을 드리다

오랜만에 모교에 갔다. 출옥한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실천연대)의 간부였던 선배는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및 찬양ㆍ고무 등의 혐의로 13개월을 갇혀있었다. 대학 초년 시절 이후 제대로 이야기 한 번 해본 적 없는 선배였지만 사상과 신념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선배에게 축하를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 후 다시는 돌아보지 않던 학교 앞 술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과 선배들이 모인 조촐한 자리를 상상했었는데 그 자리는 민주동우회의 가을정기모임이었고 3년을 갇혀있었다는 두 명의 선배가 더 있었다. 처음 “3년 동안 나랏밥 먹었다”고 웃는 선배를 보며 전직 공무원이었나 하는 추측을 할 만큼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 자리를 지켰던 나는 우연히 듣게 된 단어 하나를 기억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 단어, ‘일심회 사건’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위키백과에는 일심회의 뜻이나 사건 과정 등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몇 년 전 생각 없이 흘려보냈던 뉴스의 이면을 나는 이제야 만난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도 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경쟁자의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해 줄 뿐이라고 말한다.

▲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경쟁자의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해 줄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내가 감옥이나 운동이라는 것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듯 과거의 나는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말과 동떨어진 채 살았다. 정치적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선배들과 나는 다른 자리에 서있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나는 그렇게 무관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인권은 정치적 입장과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를 보는데 몇몇 단어들이 나를 자극한다. 북한 공작원, 수령, 충성서약, 일심단결…….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한 번 입 밖에 내어 말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단어들은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린다. 그런데 뉴스에서 자료 화면들과 함께 아나운서의 입으로 말해졌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더 심하게 흔들렸으리라. 이건 생각 이전, 논리 이전의 본능적 문제다. 똘이장군에게 혼나는 돼지 수령과 늑대 병사로 형상화된 북한에의 기억은 이성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하여 ‘일심회 사건’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보수적 프레임은 견고하게 작동하고 이성은 그 기능을 상실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조지 레이코프는 말한다. “보수주의적 프레임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들려주고, 그런 식으로 쟁점을 정의하는 것은 우익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전략이다. 이러한 반복을 거치면서 그들의 언어는 정상적인 일상 용어가 되며, 그들의 프레임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사고방식이 된다.”

긴 시간이 지난 후 법원은 일심회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다수 국민들의 머리 속에서 그들은 이미 간첩이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이의 머리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구름처럼 떠돌던 수많은 혐의와 함께 재빨리 잊혀졌다.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 도시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 속에서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열흘 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만다. 사진은 <경계도시2> 포스터.

▲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 속에서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열흘 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만다. 사진은 <경계도시2> 포스터.

14회 부산영화제 ‘배급지원펀드’와 제1회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경계도시2> 또한 남한 사회가 보수적 프레임에 갇혀 어떻게 놀아났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남과 북의 중간 지대에서 양쪽을 아우르며 살고자 했던 학자 송두율은 ‘조선 노동당 입당’과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에 초점이 맞춰 전개되는 사건 속에서 존경받던 해외 민주인사에서 ‘시대의 간첩’으로 전락한다.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한 학자의 양심은 이념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죽은 개 취급을 받으며 모욕당한다. 진보를 자처하던 이들이 송 교수를 비판하고 믿었던 지인들이 사과를 강요한다. 변호사마저 송 교수의 말을 끊으며 “그 때 말씀하신 것하고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할 때 송 교수는 한숨을 쉰다. 보수의 프레임으로 무장한 모두 앞에서 송 교수의 발언들은 변명으로 치부되고 늙은 운동가의 명예는 바닥도 없이 추락한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잠깐 뜨거웠다가 곧 잊힌다. 감옥에 갇혀서야 송 교수는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때 관심의 촉수를 곤두세웠던 그 누구도 더 이상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1심 실형, 2심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던 사건은 최종심에서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세계적 석학도 남한 사회의 보수적 프레임 안에서는 끝없는 모욕을 당할 뿐이다. 이 도시는 그토록 견고한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양심수가 없는 나라를. 사진은 민가협 목요집회 모습

▲ 나는 소망한다, 양심수가 없는 나라를. 사진은 민가협 목요집회 모습


선배들에게 꽃을 드리다

저들의 프레임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나는 레이코프의 조언에 따라 나의 가치관, 소망, 사명을 담아 프레임을 구성해본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장애와 가난과 여성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선 자리가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소망은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여성이거나 성적 소수자거나 사상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이다. 나의 사명은 내가 소망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경험한 시간을 영화에 담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내가 지키고 싶은 제1의 가치는 인권이다. 평등이다.

그래서 나는 더 섬세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 이성애자로서, 정규직 남편을 둔 주부로서, 세 아이의 엄마로서, 또…, 그렇게 주류질서에 편입해있는 나의 자리를 나는 안다. 한발 삐끗하면 내가 다른 물살에 휩쓸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 것이다.

나의 프레임 안에서 선배들은, 나의 정치적 입장과는 다른 자리에 서 있더라도, 나의 동지이다. 실천연대 간부였던 선배의 딸은 우리 막내와 동갑이다. 기던 아이가 꼿꼿이 서고 옹알이가 단어가 되는 그 신비롭고 사랑스런 순간들을 선배는 함께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이 용서가 안 된다. 나의 프레임 안에서 죄인은 경찰이고 검사이고 판사이다. 국가다. 나의 프레임 안에서 민족과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은 나의 선배이자 길잡이이다. 나에게 통일이라는 가치는 우선 순위가 아니지만 그들이 정치적 신념을 지킬 권리를 박탈당한다면 나는 그들의 자유를 위해, 나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맞서지 않음으로써 상처받았던 수많은 이들에게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꽃을 드린다. 선배님들, 강건하시라.
덧붙임

류미례 님은 여성과 장애와 가난에 관심을 두고 비디오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