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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직접 민주주의와 인권의 마주침

지난 토요일 열린 73번째 촛불 집회는 태풍 갈매기도 무서워하지 않는 시민들의 뜨거운 저항정신으로 서울 시내를 돌다 아침 여섯시 반이 되서야 경찰의 해산으로, 사실상 두 번의 경찰 진압이 있은 후 마무리됐다. 어마어마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면 버티지 못할 날들이다. 많은 이들이 촛불집회에 주목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끈질김만은 아니다. 집회 곳곳에 나타난,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며 즐겁게 저항하는 ‘시위대들 간의 네트워크’식 거리행진, 그리고 광장과 온라인 공간에서 행해지는 ‘자발적인 직접행동’과 ‘직접 민주주의’가 많은 이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광장에서 토론하는 모습은 촛불집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출처 ; 민중언론참세상]

▲ 광장에서 토론하는 모습은 촛불집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출처 ; 민중언론참세상]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장, 촛불

대의제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권리와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인간광우병을 불러올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게 되면, 가공식품과 음식산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본인이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는 채 병에 걸릴 수 있다. 시민들은 생명권, 식량권을 위협당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이미 선거 때 낮은 투표율로 나타났지만 낮은 투표율로 당선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가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자 불신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시민들이 광장에서 거리로 처음 나서면서 외친 구호는 ‘독재타도’였다. 민주적인 방식과 절차로 선출된 권력이라도 선출시킨 시민들의 의사에 반해 독선적이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독재라는 것이다. ‘선출과정’만이 아니라 ‘권력행사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민들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독재시기를 경과한 민주주의 규정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시민들은 직접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히며 거리로 나서 정부를 압박하는 정치적 효과를 기대했다. 손에 손을 잡고 광장에 모여 자기가 나온 이유를 시민들에게 말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혼자 인터넷을 보다, 텔레비전을 보다 홀로 나와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자유 발언을 하였다. ‘내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권력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자유발언은 시민인 ‘내’가 직접 광장에 나와 ‘정치적 입장과 정책’을 말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합의를 구하는 과정’인 민주주의의 구현이었다.

시민들은 현 정부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확실한 효과’를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초대했다. 하지만 정책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고, 조·중·동 보수언론은 시민들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왜곡하였다. 그래서 촛불시민들은 ‘조·중·동에 대한 불매운동’을 확장시켰다. 또한 조·중·동에 광고하지 말라는 소비자의 목소리를 기업에 전해 ‘재정 압박’의 직접행동을 하였다. 재정에서 신문광고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언론사로서는 큰 압박이 되었다. 언론사 광고주 불매운동이라는 온라인 직접행동마저 정부는 ‘방송통심심의위원회’와 ‘검찰’을 동원하여 막고 있다.

거리행진이 시작된 이후, 그리고 이른바 공안탄압이 시작된 현재까지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시민들의 토론이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이후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토론하고 거리행진 방향을 어디로 하는 게 효과적인지를 토론한다. 토론은 거리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토론’이 갈등을 드러내고 그 갈등은 가끔 물리적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갈등’을 두려워하기보다 갈등이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시민들은 토론을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토론은 더욱 확대되어야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명박산성을 넘어서는 직접행동을 모색하는 광장 토론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명박산성을 넘어서는 직접행동을 모색하는 광장 토론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직접민주주의의 힘, 자력화

두 달이 넘게 수많은 시민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소리 높여 ‘고시철회’를 외치며 잘못된 이명박 정부 정책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책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공안의 광풍이 일고 있다. 그러면 시민들은, 우리는 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겨가고 있다. 당장은 이기지 못했지만 우리 스스로, 시민들 스스로 직접행동과 직접 민주주의 경험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의 저자 카터는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력화(empowerment) 효과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직접행동을 가담하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감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킨다”는 것이다. 시청광장을 빼앗긴 6월 29일 이후 시민들은 절망감에 빠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 행진의 직접행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의 힘을 믿고 다른 이들, 시민들의 힘을 믿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는 촛불의 행렬이다. “5년 내내 촛불을 들겠다”는 어느 여성의 말처럼 촛불이 가진 힘은 당장 ‘정책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지라도 스스로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자신감이며 그게 거리에서 서로에게 확인되며 느끼는 연대의식이다.

기존 질서에 항의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은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를 실험하는 자극이 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촛불 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담은 넓은 자원’이다. 카터는 직접행동이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며 항의 행동이 집단적인 의사결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남아프리카 일부 타운십의 사례, 아르헨티나의 포르투알레그레의 지역사회 협의체의 예를 든다. 직접 행동을 하면서 체화된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직접행동이 의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를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은 광장이 되어버린 도로만이 아니라 생활 정치 곳곳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얼마 전 기자회견을 한 ‘주민소환운동’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최소한 보장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요소인 주민소환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계획이라고 한다. 아직 우리 헌법이 국민소환까지 보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민소환’운동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적 실험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와 인권

직접민주주의가 한국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는 항상 정당한가?”라는 우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형태 때문에 제기된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나의 권리행사가 타인의 인권을 억압하지 않고,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어울려 평화롭게 돕는 공동체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억압권력에 맞서 싸워야 하고 맞서 싸우기 전에, 또 맞서 싸우면서 논의하고 합의해야하는 민주주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직접 민주주의이든, 간접민주주의이든 ‘다수가 사는 공동체 사회’를 염두에 둔다면 민주주의는 ‘인권’ 실현과정에서 건너야 하는 다리이다. 인권은 하늘에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실현해야 하는 ‘현실적이고 역사적, 맥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인권운동은 억압권력에 맞서는 대항권력을 조직하는 운동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래서『인권의 풍경』의 저자 조효제 교수는 “인권은 이제 공평하고 좋은 세상의 상징적 등가물, 즉 ‘은유로서의 인권’이 되어” “민주주의 사상 자체와 비슷한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는 급진적 주장을 펴기도 한다. 조효제 교수도 말했듯이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인권운동이 가지고 있던 청구권적 성격, 의무주체와 권리주체의 이분화 등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 인권이행 의무주체가 국가에서 기업으로, 비국가행위자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는 현실에서 눈여겨볼 주장임에 틀림없다.

다시 원래 물음으로 돌아오자. ‘우리가 지향하는 삶, 인권의 가치가 실현된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민들이 자력화되고 주체화되고 능동화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력화를 낳는 직접 민주주의가 인권의 가치 실현에 한 몫을 하리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인간의 권리를 ‘누군가 주어서’ 보장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력화’에 기반을 둔 사회를 꿈꾸기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촛불의 실험에 더욱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덧붙임>
이 글에서 ‘시민’은 법적인 시민권을 지닌 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민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국민’이라는 말이 담지 못하는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시민’들이 존재하고, 인권의 문제는 국민국가에 한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썼다. 따라서 이 글에서 ‘시민’은 법적 시민권이 없는 ‘비시민’을 포함한다.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선 지금의 촛불집회에서는 ‘시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리라는 생각이다.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