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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_창] 인권 창조의 역사

인권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인권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인권에 대한 인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권을 지키도록 만들었는가? 이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인간 내면의 ‘감성과 공감’을 주요소로 들어 인권의 창조와 발전을 얘기하고 있다. 인권은 인간의 이성만큼이나 감정에 의존한다는 점 때문에 정의하기에 불가능해보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인권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출처: Lynn Hunt, Inventing Human Rights: A History, W.W.Norton, 2007)


책 표지

▲ 책 표지

자명성의 역설

노예제에 기초하고, 인간의 타고난 종속 위에 건설된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권리의 평등이 ‘자명한’ 진실이 될 수 있었을까? 노예소유주였던 사람, 귀족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인권은 자명하다”, “모든 사람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말할 수 있었을까? 권리의 평등이 그렇게 자명하다면, 왜 그런 주장이 있어야 했고, 왜 특정 시기와 장소에서만 이뤄졌는가? 인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보편적일 수 있나? 인권이 ‘자명’하다는 주장은 인권의 역사에 주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18세기에 그렇게 확신적이었는지 설명하려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인권은 세 가지 서로 맞물린 질을 요구한다. 권리는 ‘자연적’이어야 하고(인간에 내재된), ‘평등’(모두에게 똑같고)해야 하고, ‘보편적’(어디에서나 적용가능)이어야 한다. 인권은 정치적 내용을 획득할 때에만 의미 있다. 따라서 인권은 그것을 가진 사람들의 능동적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인권’(human rights)이란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다 그렇게 말할 때는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것과는 달랐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에는 대부분 ‘자연권’을 얘기했고, 간혹 ‘인권’이란 말을 쓸 때는 자연권이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보다 수동적이고 덜 정치적인 뭔가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미국 독립 혁명의 지도자가 인권이란 단어를 쓸 때는 아프리카인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걸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18세기 동안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인권’(human rights, rights of mankind, rights of humanity)은 너무 막연해서 직접적인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고, 한편으론 신과 한편으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을 일컬었다. 즉, 언론의 자유나 정치 참여 같은 정치적으로 관련된 권리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그 의미가 달려있었다.

권리는 어떻게 자명해지나

인권은 이성만큼이나 감정에 의존한다는 바로 그 존재 때문에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인간으로서 “도무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내면의 감정”, “내면의 확신” 등으로 표현된다. 철학자들의 사상, 법률, 혁명 정치는 인권이 진짜 자명해 보이도록 인권에 대한 ‘내적인 정서적 언급’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쓴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가져야 했다.

그런 느낌의 토대로 필자는 ‘개인의 자율성’을 든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자아의 의미가 18세기의 경험 속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타인과 구분된 개인, 스스로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을 행할 수 있는 개인들이 등장하고, 이 개인은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에 기초한 정치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감하고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런 공감은 새로운 사회적 및 정치적 개념(인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필자가 그 예로 든 것이 18세기 유행한 소설 읽기와 고문 폐지 운동이다. 필자는 “감정의 폭포”라는 표현을 쓰며 ‘인권’의 개념 출현 직전에 유행했던 서간체 소설 읽기를 든다. 소설 속의 수난받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모든 사람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과 자율성을 열망한다는 것을 공감하고, 투쟁에 수반된 심리적 노력을 가상으로 경험한다.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을 동격으로 생각하는 걸 배웠을 때, 어떤 근본적인 점에서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걸 배웠을 때 인권은 번성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모든 형태의 사법적 고문을 폐지했는데 범죄자라도 “우리 친구와 친척들과 같은 물질로 구성된 영혼과 육체를 소유한다”라고 했다. 왜 똑같은 고문이 이어져왔는데 그 이전에는 고문받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 측은히 여기지 않았는가? 각 사람은 하나뿐이며 타인과 구별된 개인이고 그의 신체가 또한 그런 것으로 여겨지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 이해 속에서 육체의 고통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통은 종교적 및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범죄인의 신체를 절단하거나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상한 개인주의에서 그 고통과 고통받는 신체는 그 개인에게만 속한 것이었고, 그 개인은 더 이상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나 더 높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희생될 수 없는 존재였다. 고문반대자들은 그 이유로 고문은 개인들의 도덕적 기초가 되는 ‘공감’을 파괴한다고 했다. “공개적 처형은 사회적 감정을 훼손한다. 구경꾼을 점차 냉담하게 만들면서, 구경꾼은 ‘보편적 사상’의 감정을 잃고, 범죄인도 자신들과 같은 신체와 영혼을 가졌다는 의식을 잃는다”라고 했다. 공동체를 위해 더 바람직한 것은 교육과 내적인 좋은 인간자질의 경험을 통한 선의 배양이다. 잔혹한 처벌로부터 동료시민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덕의 근본인 공감만 잃게 된다. 따라서 고문은 없어져야 했다. 개인들은 자신의 신체를 소유했고, 자신의 신체의 분리와 신체적 불가침성에 대한 권리를 가졌고, 이것은 타인에게도 똑같은 수난, 감정, 공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직 모든 사람이 어떤 근본적인 방식에서 똑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어야만 모든 사람은 권리를 가진다. 평등은 단지 추상적 개념이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면화돼야 했다. 인권이 창조된 18세기에나 오늘날에나 모든 사람이 진짜 평등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새로 발견된 힘이 모든 편견에 맞서 작동할 수 있었다. 이런 인권 혁명은 성격상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권리 선언하기

개인의 자율성과 공감, 신체적 보전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관행에서 싹이 튼 인권의 언어는 ‘선언’에 명시됐다. 왜 권리는 ‘선언’돼야 했나?

필자는 ‘선언’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설명하며, 그것을 ‘주권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영어 단어 선언(declaration)은 프랑스어 déclaration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어에서 이 단어는 원래 봉건영주에게 충성선서를 한 대가로 주어진 땅의 목록을 일컬었다. 그 뒤 17세기 동안 그것은 왕의 공적인 명령에 속했다. 즉 선언하는 행위는 주권과 연관됐다. 권위가 봉건영주로부터 왕에게로 옮겨졌듯이 선언하는 권력 또한 그랬다.

구체제를 약간 수선하려는 것이었다면, ‘인권’ 선언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체제를 재건설할 필요성에 동의했고, 인권 사상은 대안적인 정부의 원칙을 제공했다. 여기에 더 높은 권력에 대한 요청이나 호소를 의미하는 ‘헌장, 청원’(charter, bill) 등의 표현은 부적절했다. 선언은 진부하고 복종하는 분위기를 떨쳐버리고 주권을 잡으려는 의도를 표명할 수 있었다. 미국 독립 선언은 자신들의 주권을 가진 독립된 국가를 가질 것을 선언했고, 프랑스 인권선언은 인권이 정부의 기초를 구성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선언의 결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선언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논쟁의 장을 열어젖혔다. 인권이 정부의 정당성의 기초라면 무엇이 연령, 성, 인종, 종교, 부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에게 제한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무산자, 종교적‧인종적 소수자의 권리 등이 꼬리를 물고 문제로 떠올랐다. 누가 그 결과를 통제해야 하고 과연 통제할 수 있었는가?

선언의 추상적 성격은 결국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한 보다 급진적 해석을 배양했다. 한편으론 ‘배제’를 설명하는 근거도 해명돼야 했다. 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기독교인과 유대인 중에서 전자가 우월한가를 설명해야 했다. 권리가 보편적이고 평등하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창조한 개념 바로 그것이 치명적인 형태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의 문도 함께 열었다. 제국주의와 인종과학이 공생관계를 이룬 것이 대표적 예이다.

배제된 이들의 인권투쟁은 선언에 새겨진 추상적 평등을 보다 구체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새로 등장한 권리는 그것이 정치적 권리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기회를 열었고, 그걸 부여잡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권리란 결국 개인들의 감정, 확신, 그리고 무수한 행동으로 가장 잘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인권의 역사는 보여준다. 이 개인들은 내면의 분노에 부응하는 답을 요구한다.

18세기 신교도에 대한 종교적 관용의 부족함을 비난하는 편지를 프랑스 정부 당국에 보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때가 왔다. 전 세계에 너무 잘 알려진 인류의 권리를 공공연하게 전복하려는 법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때가….” 1776년(미국독립선언), 1789년(프랑스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948년(세계인권선언)의 선언은 인류의 권리의 초석을 제공했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인식을 끌어냈고 모든 침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도록 돕고 있다. 당신은 인권의 의미를 안다. 왜냐하면 인권이 침해당할 때 당신이 괴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권의 진실은 모순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명하다.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