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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_창] 유럽인권협약에서의 평등과 비차별 (2)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세계인권선언 제2조)
모든 국제인권법이나 헌법에는 ‘평등과 비차별’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평등이고 차별인지를 친절히 얘기해주지는 않는다. 인권에 관심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별반대와 평등의 진전을 얘기하지만, 그 구체적 범위와 기준과 내용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다.
이에 하나의 사례로서 유럽인권협약에서는 평등과 비차별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려 한다. 1950년 채택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 협약’(아래 유럽인권협약)은 지역인권기준 중에서 일찍이 자리 잡았고 상설유럽인권재판소를 설치하고 있기에 실효성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Oddny Mjoll Arnardottir, Equality and Non-Discrimination under the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03)


먼저 유럽인권협약의 차별금지 조항을 살펴보면, 1950년 제정된 협약 제14조와 2000년 제정, 2005년 4월 발효된 제12의정서 제1조가 있다.

유럽인권협약 제14조(차별의 금지)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소수민족에의 소속,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 등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이 협약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의 향유가 확보되어야 한다.

제12의정서 제1조(차별의 일반적 금지)
1. 법이 규정한 어떠한 권리의 향유도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소수민족에의 소속,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 등에 의한 차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2. 어느 누구도 1항에서 언급된 것 등의 어떠한 이유로도 공공당국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된다.

필자는 차별조항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법을 살펴보고,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전통적 접근법은 상설유럽인권재판소(아래 재판소)의 판례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이지 않을뿐더러 새롭게 떠오르는 차별 유형에 대한 보호를 다루는데도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차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소개하고 있다.

비차별 조항의 ‘구조’

비차별 조항에는 두가지 구별되는 구조가 있다. ‘열린’ 모델(예시열거)과 ‘닫힌’ 모델(제한열거)이다. 열린 모델은 잠재적 차별요인의 범주를 제한하지 않는다. 또한 무엇이 차별을 구성하는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의내리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닫힌 모델은 있을 수 있는 차별의 근거를 제한적으로 예시하며 어떤 상황이 객관적으로 차별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정교하게 정의하려 한다.

협약의 14조는 ‘열린 모델’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고, 제12의정서 1조도 그렇다. 이같은 모델에서 쟁점이 되는 사항은
첫째, 비차별 조항 그 자체에는 불법적 차별과 정당화할 수 있는 구별간에 구분선이 없고,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한하지도 못한다. 목적 정당성과 합리적 정당성이라는 전제하에 갖은 유형의 정당화가 발전될 수 있다.

둘째, 차별의 요인, 다른 말로 하면 구별의 표시가 되는 목록에 대한 것이다. ‘열린 모델’은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을 금지함으로써 차별의 요인을 남김없이 포괄하는 목록을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항에서 언급된 차별 요인들은 예시에 불과하다. 협약 14조와 제12의정서 1조가 열거한 차별의 근거는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소수민족에의 소속,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이다.

‘장애, 성적 지향성, 연령’ 등의 새로운 차별 근거들이 협약 14조가 제정된 후에 더 중요하게 떠올랐지만 최근 만들어진 제12의정서 1조는 “목록에 더 추가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며 이를 추가하지 않았다. 그 근거는 목록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재판소는 이미 목록에 명시적으로 열거되지 않은 차별의 근거에도 14조의 규정을 적용해왔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차별 요인을 추가하는 것은 “조항에 포함되지 않은 요인에 근거한 차별을 부당하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4조에 대한 심사의 강도는 차별의 요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목록에 예시된 경우의 차별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심사가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차별 요인에 따른 보호를 발전시킬 과제는 재판소에 남겨졌다. 재판소는 명시적으로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차별 요인을 강조할 수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재판소의 판단으로 볼 때 ‘성적지향성’은 예시된 목록에 없지만 엄격 심사를 받는 비차별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차별 조항의 적용 분야

차별금지조항은 의미에서는 자율적이지만 적용범위에서는 종속적으로 해석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차별금지조항 그 자체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권리와 자유와 연결되어야만 효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종속성 때문에 14조는 여타 협약의 조항과 결합되어 심사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관계성이 좀더 느슨해졌고, 다른 조항과 결합시키지 않고 독립적으로 14조를 다루는 판단이 최근 잦아졌다. 그렇지만 14조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협약의 실체적 권리와 차별 문제간에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법 분야와 사회적 관계는 차별로부터의 보호와 관계돼 있음에도, 특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향유에 있어서 차별로부터의 보호가 결여돼 있다는 것이 뚜렷하다. 비차별조항의 종속성은 협약의 결점으로 흔히 비판받는다. 14조의 제한적인 종속성은 두 가지 주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국제법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으로 주장되는 평등과 비차별의 일반원칙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데 부족하다. 둘째, 협약에서 열거된 권리에 한정되지 않고 적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평등권’ 또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는데 부족하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평등권을 ‘독립적’인 권리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결실이 제12 의정서 1조이다. 제12의정서를 만든 것은 평등조항을 강화하고, 기존 협약 14조의 적용분야를 보편적으로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제12의정서 1조에 대한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분야로 차별금지의 확대를 의도했다.

i 국내법에서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권리 향유의 차별
ii. 국내법에 따라 공공당국의 분명한 의무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권리 향유의 차별, 즉 공공당국이 국내법의 의무에 따라 특정한 태도로 행동할 의무
iii. 공공당국의 재량권 행사(예를 들어 보조금의 부여)에 의한 차별
iv. 공공당국의 어떠한 작위 또는 부작위(예를 들어, 시위를 통제할 때 법집행공무원의 행동)에 의한 차별

분명히 협약 14조와 마찬가지로 의정서와 그에 대한 주석의 초점은 공적영역에서의 인권문제이지 사적 당사자간의 관계에 대한 것은 아니다. 제12의정서의 적용분야는 “공공당국”의 행위에 한정된다. 주석에 따르면, 공공당국이란 용어는 행정당국, 법원, 입법 기구를 말한다.

그렇지만 제12의정서는 협약 14조를 계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광범위한 차별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려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적극적 의무와 간접차별에 의한 효과도 건드리려 한다. 의정서와 관련된 논쟁이 정점에 달한 2000년에 나온 재판소의 한 결정은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비차별조항을 해석하려는 지향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자와 마찬가지로 공인회계사 임명을 거부한 것에 대한 판단이다. 이 판단이 있기 전까지는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평등 명제에서 뒷부분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이 판단의 의미는 상황이 중대하게 다른 사람을 다르게 취급하지 않은 것도 평등권 침해이고, 그러한 차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이다.

전통적 접근법의 문제

차별받았다는 주장이 있을 때 작동되는 가치 선택에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변수가 있다. 먼저 특정 유형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고, 그런 차별이 특정한 구별의 표식에 근거해야 하고, 특정한 이익에 대한 침해가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요건이 충족된 시점에서 입증책임은 해당국가로 이전된다.

먼저 특정 유형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처우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청구인이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처우가 어떤 ‘차이’에 근거한 것이며 비교대상이 되는 연관된 유사 상황이 있음을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 해당국가는 문제되는 조치가 ‘정당한 목적’을 추구(목적정당성)했고, ‘채택된 수단과 추구한 목적간에 합리적인 균형’(비례성)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청구인은 위 세가지 요소를 충족시키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문제는 차별의 표식이 뚜렷하지 않고 은밀하며, 간접적으로 은밀한 처우가 이뤄진 경우이다. 이 경우에 청구자는 그런 행위가 ‘고의적’이며 ‘차별의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또한 ‘중립적’인 기준인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삼는 처우가 명백한 차별의 표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련 집단에게 불균형한 효과를 끼쳤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입증책임이 해당국가로 이전되지 않고 청구인에게 있다면 차별의 의도성과 간접차별을 증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차별처우가 있었다는 입증과 그러한 처우의 목적 정당성의 입증을 두 개로 구분하는 전통적 접근법이 인위적이라고 비판한다. 목적의 정당성을 추론하는데 취해지는 원칙과 가치는 우선적으로 같은 취급 또는 다른 취급이 있었느냐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둘에 대한 입증책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문제는 누가(청구인이냐 해당국가냐) 그 책임을 지느냐이다. 입증책임을 누구에게 할당하느냐는 차별로부터의 보호의 효과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이에 대한 재판소의 그간 판례는 혼란스럽다. 당사국의 재량의 폭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따라 청구인 또는 해당국가 어느 한편의 입증책임을 강조하느냐가 달랐다. 즉, 국가의 재량의 폭을 넓게 인정하면 입증책임을 청구인쪽에 묻고, 재량의 폭을 좁게 인정하면 해당국가에 입증책임을 묻는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제기된 문제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심사를 하느냐 관대한 심사를 하느냐와 연결된다.

목적 정당성, 즉 문제삼는 조치가 ‘정당한 목적’을 추구했느냐도 쟁점이다. 사실상 어떤 조치에 대해서든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목적을 추구했다고 주장될 수 있다. 정부들은 항상 좋은 의도와 고상한 목적을 주장할 수 있고, 실제로도 지금껏 재판소에서 다뤄진 사건 중에 목적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은 정부의 경우는 단 2개 사건 뿐이었다. 국가들이 거의 언제나 정당한 의도였다고 합리화할 때 청구인이 차별적인 의도를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목적 정당성’만으로는 차별과 싸우는데 무력하다. 그런데 또다른 고민은 각국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결정하고, 재량의 폭을 가진 정책의 정당성을 재판소가 판단하려 들 때 재판소의 역할과 당사국의 자유가 충돌된다는 것이다. 그간 재판소의 판단은 목적 정당성으로부터 문제삼는 조치의 효력과 목적간의 관계를 고려하는 것(비례성)으로 주된 초점이 옮겨져왔다.

다음에는 차별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비차별 조항의 기본가치와 재판소의 적용이 같아질 수 있는 접근법에 대한 고민을 살펴본다.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