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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인권이야기] 국민과 소통하는 판사

언젠가 판사를 만나서 그들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대답은 웬만하면 법정 밖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국민 중에 판사와 함께 앉아서 식사하거나 차를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법정 밖에서 판사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힐끗 쳐다본 사람도 거의 없다. 판사가 명찰을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니 옆으로 지나쳐도 알 길이 없겠지만, 국민 중에 판사를 아는 이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판사 만나기 힘든 사회

우리 주변에서 판사 만나기가 어려운 것은 단지 판사의 수가 적기 때문만은 아니다. 판사의 업무량이 많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요인이다. 혹자는 판사들이 일주일에 하루만 재판하니 좋겠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법정까지 오는 사건이 대체로 복잡할 뿐더러, 그러한 사건 수십, 수백 건의 줄거리를 이해하고 법적 쟁점을 추출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만나본 한 성실한 판사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서류를 읽는다고 하면서, 하루라도 소주잔을 기울일라치면 그날을 전후해 하루 정도 밤을 새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주말에 일하는 판사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실한 판사일수록 사람을 만날 여가조차 없다.

그러나 국민 측에서 판사를 만나기 힘든 더욱 본질적인 이유는 판사 측에서 국민을 만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학연과 지연 등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 판사로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고 빈틈을 보인다 싶으면 청탁을 하기 때문에 많은 판사들은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성실한 판사들 중에는 동창회나 향우회에 가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친척들과도 만나지 않는다. 또 불필요한 오해를 미리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설사 시간이 있더라도, 널리 사람을 만나지 않고 오직 가까운 극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는 것이다.

심지어 판사들 상호간에도 교류가 매우 적다. 판사는 각자가 국가기관이다. 다시 말해 판사는 누구의 결제를 받아서 집행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는데 그의 결정이 곧 국가의 결정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사들은 서로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으려고 하며 판결에 대해 서로 논평하기를 매우 주저한다. 전체적으로 판사의 일상생활을 보면 거의 고립과 단절의 삶이라고 할 만하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어떤 때는 판사들에게 대인 기피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고립을 통해서는 판결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어

그런데 이처럼 거의 고립에 가까운 판사생활은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일까? 판사들은 대체로 이러한 생활스타일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판사들은 판결은 판사가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판사들이야 말로 법적 지혜의 원천이며 판사의 판단은 (적어도 상대적으로 가장)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러한 판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국민은 법의 준수를 요구받는 대상에 불과하다. 국민을 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판사를 법적 지혜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사고는 권위주의적 사고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인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주권시대에 재판권의 주체는 국민이다.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배심제도이다. 배심제도는 관료법관의 법인식이 국민들의 법관념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면서, 양자가 충돌할 경우 일반국민의 판단이 곧 법임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즉, 국민이야 말로 재판권의 진정한 주체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제도이다.

이러한 사정은 관료법관에 의한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료법관제도의 취지는 법관이 국민위에 군림하는 지위에서 재판권을 행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관료법관은 국민의 종복으로서 재판사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국민주권시대에 관료법관의 올바른 상은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보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의 법의식을 발견해가는 모습이다.

2004년 열렸던 전범민중재판의 판결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판사와 배심원들의 의견을 모아 만들어졌다. 재판이 국민의 사법주권이 실현되는 장이 되도록 사법개혁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 2004년 열렸던 전범민중재판의 판결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판사와 배심원들의 의견을 모아 만들어졌다. 재판이 국민의 사법주권이 실현되는 장이 되도록 사법개혁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결국 배심제든 관료법관제이든 상관없이, 재판은 국민의 사법주권이 실현되는 장이다. 여기에서 법과 재판권의 최종적 근거는 국민의 법의식이다. 국민의 법의식으로부터 괴리된 판결은 악법이며 잘못된 판결이 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공정한 판단도 국민의 법의식에 입각한 판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민주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판사의 고립은 명백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의 고립은 판사의 아집만 키울 뿐이며, 이는 결국 강자의 이익에만 봉사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판사는 결국 소수의 기득권층이나 권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과 소통하는 법관과 법원이 되어야

국민주권시대에 훌륭한 판사는 국민의 법감정을 민감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판결로써 잘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려면 판사들은 끊임없이 국민과의 소통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국의 대통령도 국민의 민심을 읽기 위해서 노력하거늘, 판사가 굳이 고립을 자초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판사는 개별 사건에서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충분하고도 충실하게 듣지 않으면 안될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늘 민감하게 귀를 열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개별 판사들의 법관념이 바뀌어야 할 뿐만 아니라, 법원도 그에 걸맞게 개편되어야 한다. 즉 법원 자체가 국민에게 ‘직접’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국민과의 대화, 법원행정에 국민을 널리 참여시키는 개방적 운영 등이 한 방안이 될 것이다. 판사들이 그토록 외치는 사법권의 독립도 국민과의 단절과 고립을 통해서는 확보될 수 없고, 국민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덧붙임

이상수님은 새사회연대 정책위원이자 한남대 법학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