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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되살아난 버마 8888 민중항쟁의 기억

마치 한쪽 발을 들고 춤추는 듯한 자태를 가진 땅, 버마

▲ 마치 한쪽 발을 들고 춤추는 듯한 자태를 가진 땅, 버마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 대륙 사이에는 마치 한쪽 발을 들고 춤추는 듯한 자태를 가진 땅, 버마가 있다. 버마는 한국인에게는 제5공화국 때의 아웅산 묘지 폭발사건으로 알려져 있거나,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군부독재정권의 폭압정치로 민중들이 학살-고문-강제노동-강간 등으로 신음하고 극도로 피폐해진 국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때에는 한국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한국보다 더 오랜 역사와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아름답고 풍요로운 국가였다.

현재 한국에는 버마에서 온 이들이 2,500여 명 정도 있다. 합법 혹은 불법체류상태에서 이주노동자로서 일하고 있는 이들 중 일부는 해마다 8월 8일이 되면 어김없이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버마대사관 앞에서 작은 시위를 벌인다.

8888. 1988년 8월 8일, 버마.

버마인들이 상서롭다고 여기는 8이 무려 4개나 겹쳐 있는 이날은 역설적으로 버마인들에게 이루어지지 못한 희망과 슬픔과 분노의 상징이 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의 감격으로 한국 국민들이 올림픽 개최 D-DAY를 세어나가던 그해에, 버마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시위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962년 군부가 집권한 이래 폭압정치에 시달리던 1988년 3월, 경찰의 과잉 시위진압으로 호송 중이던 41명의 학생이 질식사한 어처구니없는 ‘피의 금요일’ 사건을 계기로 버마 민중들은 반군부를 외치며 점차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했고 곧 전국적으로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해 6월을 거쳐 8월에는 버마의 전 민중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민중들을 탱크와 장갑차로 무자비하게 살육하였고, 이날 최소한 2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시위는 진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들불처럼 번져나가면서 9월 14일에는 수도 양곤에서 100여만 명에 달하는 버마민중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1988년의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최소 2천여 명에서 최대 2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당시 다행히 목숨을 건진 시위참여자들도 대부분 정치범이 되어 오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군부의 폭압정치로 아직까지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정확한 사망자수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버마인들은 이 날을 기려 8888이라고 불러왔다.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8888. 1988년 8월 8일 버마 민주화운동 당시 민중들의 시위 모습<출처; 8888 버마 민중항쟁 18주년 기념 자료집>

▲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8888. 1988년 8월 8일 버마 민주화운동 당시 민중들의 시위 모습<출처; 8888 버마 민중항쟁 18주년 기념 자료집>



이처럼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미완성으로 끝난 8888 버마 민중항쟁이 올해로 18년이 되었다. 18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8888 민중항쟁은 버마의 국경을 넘어서 전세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8888 이후 더욱 가속화한 버마군부의 폭압정치는 끊임없이 국민들의 피를 불러왔다. 오늘날 버마 내에서는 버마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현하거나 반대의견이 기재된 자료를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중형을 면치 못한다. 민주화를 염원하면서 학생운동에 헌신하는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더구나 2005년 11월, 버마정부가 수도를 이전하면서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였고 그 과정에서 살해, 고문, 강간 등을 자행했다.

버마의 근현대사가 한국의 근현대사와 같지는 않지만 식민지시기를 거치고 독재정권의 폭압정치에 시달리고 격렬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는 등의 과정을 보면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는 버마만이 아니라 식민지를 경험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식민지의 경험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동서냉전이라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 또한 독재정권의 폭압정치가 국제적으로 용인 혹은 묵인되었던 배경으로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자본의 전지구화가 있다. 버마의 경우에도 버마군부가 50여 년이 되어가도록 유지될 수 있었던 주요 동인은 중국의 후원과 세계 여러 나라가 버마의 풍부한 자원을 노리고 버마 군사정권과의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이다. 이 과정에서 버마 민중들의 삶은 파괴되고 민주주의는 압살되고 있다.

2006년, ‘버마 민주화를 목표하는 해’ - 8888 18주년 기념행사

8888 민중항쟁 18주년이 되는 2006년 올해에도 이날을 기리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해마다 갖는 행사이지만 버마인들은 2006년의 8888민중항쟁 기념행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05년 11월 버마 군부는 수도를 이전하면서 주변 소수민족들에게 엄청난 살상, 고문, 강제노역이라는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는 버마인들이 예전의 월 15-20여 명이던 것에 비해 월 100여 명으로 훌쩍 뛰었다. 물론 국경을 넘기 힘든 더 많은 버마인들은 정글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버마 군부의 수도 이전에 대해서 버마인들은 버마군부의 위기감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버마인들은 ‘2006년은 버마민주화를 목표하는 해’라며 여러 활동들을 준비했다.

한국에 있는 버마인들 역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에 있는 버마인들에게 8888 민중항쟁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한국인들에게는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하고 함께하기를 요청하는 행사를 준비했다. 특히, 버마의 민주화가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국내 민주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버마의 민주화와 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행사로 ‘버마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 있는 버마 민주화운동 단체 '버마행동'이 8888 버마 민중항쟁을 기해 버마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있다.

▲ 국내에 있는 버마 민주화운동 단체 '버마행동'이 8888 버마 민중항쟁을 기해 버마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있다.



버마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

버마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은 8월 6일 자전거캠페인을 시작으로, 8월 8일 버마대사관 앞에서의 인권주간 선포 기자회견, 8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버마 군부 탄압의 실상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거리사진전과 거리 영상 상영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 버마와 태국의 국경지대에서 생활하면서 민주화투쟁을 하고 있는 버마의 활동가를 초청해 버마의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해외활동가와의 만남’의 자리도 준비했다. 마지막 행사로 국경지대에서 민주화투쟁을 하고 있는 버마 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후원의 밤이 있다. 이 인권주간 동안 버마의 기본적 상황을 알리는 자료집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버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것이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퇴진을 위해 헌신하였던 이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마디의 절규가 있다. 하나는 전태일 열사의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이며, 또 하나는 김상진 열사의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던 촉매가 되었던 두 열사의 절규가 비단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만 남겨진 것이 아님을 오늘의 버마의 상황을 보면서 절감한다. 한국은 특히 버마의 상황에 눈감아서는 안된다. 한국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아픈 경험과 5.18 대학살의 기억과 6.10 민주대항쟁이라는 빛나는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특별히 그러하다.

버마의 민주화투쟁과정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며, 이들의 피거름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을 버마의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덧붙임

석원정 님은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