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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직접민주주의의 엔진을 돌려라 (상) '국민소환제'

소환권 없는 주권자는 없다

이번 대통령 탄핵 정국은 선거가 끝나고 나면 국민을 단지 정치의 '관객'으로만 내모는 대의제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앞에는 대통령의 잘못이 무엇이든 그를 탄핵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국회에 있고, 국회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것은 헌법재판소뿐이라는 어이없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어디에도 고삐 풀린 국회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심판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노예의 자유'에 만족할 것인가

"영국의 인민들은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난 직후에는 다시 노예로 돌아가 버린다" 주권은 결코 대표될 수 없다고 믿었던 장 자크 루소는 18세기 영국 대의제도의 허구성을 '노예의 자유'에 빗대어 이렇게 비판했다. 그러나 루소가 비판했던 '노예의 자유'는 대의제만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이 땅의 우리를 여전히 옥죄고 있는 굴레이다.

대의제는 말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되, 그것은 오직 대표자를 통해서만 행사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권의 행사가 '능력'있는 소수에게만 허용되고 그들이 '자유롭게' 정책을 결정할 때 정치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그러므로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는 다음 선거 때까지 유예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러나 역사는, 아니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일시적인 노예 해방령'을 반복하는 대의제가 다수 민중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제도라는 사실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잊혀진 직접민주주의의 구상들

지금 우리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 특히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가 국민의 의사를 물어 정책을 결정하고 그를 언제라도 소환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는 '명령적 위임 제도'의 구상을 오늘의 제도로 자리잡게 만들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주권이 인민의 것이라면, 인민의 이익을 배반한 수탁자(의원)를 소환하여 책임을 추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로 등극한 부르주아지들이 정치적 권리를 형식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사이, 민중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바를레(J. F. Varlet)는 이렇게 반박했다. 72일간 존속하다 단명했던 1871년의 '빠리꼬뮌' 역시 '권력의 보편화'를 기치로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분야의 공직자를 선출하고 그들을 소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적 권리로 선언했다.

이러한 역사적 실험들은 '주권의 소재와 행사 주체의 분리'를 당연시하고 몇 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때까지 국회와 대통령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를 유예시키는 데 길들여져 온 우리를 '익숙한 굴레'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권리

국민투표권이나 국민발안권 등 직접민주주의의 원리를 좀더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스위스나 미국 등 일부 국가들에서도 국민소환제도는 아예 없거나 매우 부분적으로만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주지사나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소환제도의 경우는 그보다 더 널리 보장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도 주민소환제도가 건국헌법에 포함되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삭제된 경험이 있다. 그만큼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등 고위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국민소환권은 직접민주주의의 장치들 가운데 가장 잊혀진 권리인 셈이다.

물론 국민소환권이 제도화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민중의 인권 수준이 향상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일 수 있다. 지난해 10월 주지사 소환 선거를 통해 아놀드 슈와제네거를 주지사로 변신시킨 캘리포니아주의 사례는 물론이고, 최근 부패한 야당과 우익세력들이 연합, 국민소환운동을 통해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합법적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국민소환권이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주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핵폐기장 부지 신청을 기습적으로 결정한 김종규 군수에 대한 소환운동을 벌이고 주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희망'을 건설하고 있는 부안의 사례는 국민소환권이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권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분노한 시민들의 촛불집회마저도 '불법' 시비로 몸살을 앓아야 하는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에서 국민소환권을 쟁취하기 위해 뚫고 나가야 할 터널은 길고도 험하다. 하지만 그 터널을 지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인권의 열매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