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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고> 유엔인권위 한국 참가단 인권단체·정부대표단 만나며 종횡무진

8일 오전 8시 반부터 한국으로 치자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말레이시아의 사회안전법(Internal Security Act, ISA)의 철폐와 사회안전법에 의해 투옥되어 있는 사람의 석방을 위한 단식농성이 시작됐다. 이 농성에는 버마, 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했고, 한국 참가단에서는 민변의 오재창 변호사가 연대의 의미로 단식농성에 참가했다.


말레이시아 사회안전법 철폐 농성 동참

한편, 참가단의 다른 활동가들은 이번 병역거부와 관련한 결의안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정부 대표단을 만나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의 실태와 이번 결의안에 반영됐으면 하는 한국 민간단체들의 입장을 전달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대표단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으며 이와 관련해 한국 정부를 만나보겠다"고 답변했다.

결의안은 현재 초안이 마련돼 각 국가별로 조율을 거치는 과정에 있으며 인권위원회가 끝날 4월 말에 최종적으로 결정되게 된다.

다음 만난 단체는 국제법률가위원회(ICJ). 국제법률가위원회는 이번 58차 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인권고등판무관실 보고서의 작성 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한 바 있고,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법률가단체다. 국제법률가위원회는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에 대한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저녁 시간에는 한국 법무부 인권과와의 만남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병역거부자들에게 가석방 제도를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가 화제가 됐다. 참고로 가석방 제도는 법무부에서 관할하는 제도인데, 병역거부자들은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해도 가석방제도에 의해 풀려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참가단은 "이같은 가석방제도는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참가단은 "민간법정에서는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맞춤 형량이 선고되고 있는 마당에 법무부도 가석방 제도 운용에 있어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일단 이 문제가 매우 어렵고 국민적 감정 역시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 "비록 법무부 관할 제도이지만 법무부 혼자 기준을 바꿀 수 없는 문제"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참가단은 "법무부의 어려움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특별히 인권과라면 피해자들과 인권단체들의 입장을 충분히 수렴해 법무부에 강력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9일 오전에는 세계고문방지기구(OMCT)와의 만남이 있었다. 세계고문방지기구는 원래 고문에 의한 인권침해를 주 의제로 활동해 오다 최근 그 활동 폭을 넓혀가고 있다. 세계고문방지기구는 한국 인권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고 병역거부 외에도 구속노동자 문제에 대해 여러 질문을 했다.

한편, 이날은 구두발언이 예정돼 있어 주로 인권위에 참석하면서 순서를 기다렸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유엔인권선언 및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인권규약에 의해 보장되는 권리다. 따라서 유엔인권위원회의 결의와 유엔인권이사회의 일반논평은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서는 안되고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참가단은 구두발언문에 이같은 국제인권규범을 인용하며 이러한 국제적 결의에 비해 한국정부는 오히려 병역거부자를 형사범으로 처벌해왔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또한 참가단은 전날 있었던 회원국 발언에서 한국정부가 "어느 나라나 인권문제는 있고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발언한 내용을 인용, "한국정부도 시급히 병역거부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두발언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사람들을 즉시 석방하고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할 것 △감옥과 사회생활에서의 차별 문제를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또 유엔인권위원회에 대해서는 유엔인권고등판무관과 협조해 병역거부자들의 인권문제를 잘 해결한 국가들의 모범사례를 수집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 참가단 등 다수 발언 기회 박탈, 인권위 자의적 결정 탓

그러나 58차 유엔인권위원회 시작부터 강대국들의 분담금 문제를 둘러싼 패권주의와 민간단체에 대한 고의적 배제로 인한 마찰이 일정에까지 차질을 주면서 급기야 9번 의제(국가별인권침해) 이후 모든 회의는 시간의 제한을 두고 진행됐다. 이에 따라 민변 등 대다수의 민간단체들은 발언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도 제한된 시간이 끝나 발언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신 인권위원회는 구두발제문을 서면으로 제출하고 그것을 유엔의 공식문서에 첨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많은 민간단체들이 인권위원회의 이러한 결정에 항의했고 9번의제의 마지막 구두발언을 하게된 팍스로마나의 김철효 씨는 "인권위원회의 자의적 규칙 때문에 발언 기회를 박탈당한 많은 민간단체들 및 피해자들과 연대한다는 의미에서 팍스로마나도 구두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해 참가자들의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사실 3분 30초의 짧은 구두발언을 하냐 못하냐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엔인권위가 이렇게 민간단체들의 발언을 규제한 것은 인권위 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앞으로 인권위에서 민간단체들의 활동과 참여에 미칠 영향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인권위는 민간단체들의 활동이 지금까지 인권위를 이끌어왔다는 것이 과장된 평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최정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