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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야만의 20세기를 반추하는 인권영화제

한국영화 약진…올해의 인권영화상…뉴라운드반대 섹션

쌀쌀한 기운이 싫지 않게 옷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계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예정된 손님처럼 어김없이 ‘인권’과 ‘영화’가 의좋게 만나는 소박한 잔치, 인권영화제의 소식을 전한다. 오는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동국대학교 학술문화회관으로 찾아오면 값없이 그 자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준비한 상영작은 국내영화 14편, 해외영화 32편 등 총 46편.

지난 1년 동안 나라 안의 ‘표현의 자유’는 얼마나 진보했을까? ‘표현의 자유’를 측정하는 ‘바로미터’ 인권영화제의 대답은 진보도 퇴보도 아닌 ‘답보’다. 올 봄 개정된 영화법에서도 완전등급제는 아직 보수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영화제 역시 ‘영화진흥위원회’가 추천하는 영화제에 한해 등급심의가 면제된다. 여기에 ‘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국가보안법, 그 시대착오적 권능이 다음 세기까지 이어진다면 퇴보가 아닐까.

올해 인권영화제의 가장 눈에 띄는 경향은 ‘한국영화의 약진’이다. 국내작이 항상 기근이었던 전례에 비해 올해는 만선의 고깃배. 인권영화제의 문제작인 <레드헌트>의 2탄 <국가범죄-레드헌트2>를 비롯해 <꽃파는 할머니> <끝나지 않은 싸움-에바다> <기차길 옆 공부방>이 국내에서 최초로 상영된다.

<국가범죄-레드헌트2>는 전작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희생자들의 증언에 더욱더 집요한 카메라를 들이댄다. 감독은 정성스레 촬영한 제주도 사계를 증언의 밑그림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흡사 ‘아름다움과 끔찍함이 공존하는 지옥’과 같다. 이 외에도 4․3 다큐멘터리 제작단이 제작한 4․3 피해자 시리즈 <무명천 할머니>와 부산영화제, 다큐영상제에서 수상해 상복을 누리고 있는 <민들레> 등 14편이 관객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이런 풍작은 ‘인권’을 다루는 국내 작가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편 것과 인권영화제 측이 한국영화 선정의 폭을 넓힌 것이 가장 큰 이유. 주최측은 선정 조건이었던 ‘국내 최초 상영’을 완화해 관객에게 국내 영화를 두루 섭렵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인권’영화를 가려내어 ‘올해의 인권영화’를 선정 시상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사형앞둔 무미아, 개막작 주인공

개막작은 미국 민권운동을 주도했던 ‘흑표범당’의 전모를 다룬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 : All Power to the People>로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사상, 양심, 표현의 자유’가 외면당하고 있는 측면을 다각도로 드러내 준다. 미국의 대표적 양심수로 17년 째 복역 중인 ‘무미아 아부자말’ 역시 흑표범당 당원이었다. 얼마전 그의 사형이 확정되어 전세계의 양심적 세력들은 그의 석방을 외치며 연대하고 있다. 무미아의 옥중인터뷰도 수록되어있는 이 작품은 유럽 7개국에서 황금시간대에 방송되었지만 미국에선 방송금지된 영화. 일테면 ‘흑표범당’은 반국가단체(또는 이적단체)이며 이 작품은 ‘고무 찬양’에 해당되는 모양이다. 인권영화제는 영화제 전 기간동안 ‘무미아 석방’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 무미아 석방을 요구하는 엽서를 관객들이 직접 작성하고 영화제가 이를 모아 미대사관으로 보낼 것이다. 이 작품과 함께 <모략당한 나의 이름>과 <얼스턴가의 비밀>은 미국의 인종 차별이 지닌 독성을 폭로하는 영화들이다.

11월 30일은 ‘WTO뉴라운드 협상’이 시애틀에서 개막되며 또한 이에 대항하는 ‘전세계 민중행동’이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날이다. 영화제는 전지구적 민중 행동에 연대하기 위해 ‘투자협정․WTO 뉴라운드 반대 민중행동’부문을 준비했다. 북미자유협정으로 빚어진 멕시코․캐나다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주관적 카메라 시선으로 담아낸 <황제의 새 옷 The emperor's new clothes>등 신자유주의의 횡포에 대항하는 작품 2편과 ‘WTO 뉴라운드 협상’을 관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를 복습하는 퀴즈대회를 마련했다.

또한 인권활동가를 초청해 20세기를 반성하며 21세기의 인권의제를 관객과 함께 전망하는 토크쇼 ‘21세기 인권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준비중이다.

작년 상영작 목록에 올랐으나 운송사고로 누락된 <슬픔과 연민 Sorrow and Pity>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를 휩쓸고 간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그에 복무했던 지식인의 허위를 발거벗겨 놓은 이 작품 역시 ‘표현의 자유 종주국’으로 자부하는 프랑스에서 80년대까지 방송이 금지된 작품이다. 4시간 20분의 상영시간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넉넉히 비워둬야 할 것이다.

영화제가 시작될 즈음 ‘새 천년’이란 단어는 더욱더 극성스럽게 유행으로 번질 것이다. 다가오는 세기에 대한 속 빈 희망보다는, 인권보다 야만이 휩쓸고 지나간 20세기를 진정으로 반성할 수 있는 ‘인권영화제’가 되기 위해 막바지 준비에 사력을 다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