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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초짜 기후운동 액션 활동가, 포스코 주주총회를 다녀오다.

지난달 12일 새벽 5시 반, 나는 신선릉역 3번 출구 앞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다른 두 동지가 나를 반겼다. 조금 있자 검은색 차량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기다리던 그분이다. 눈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일행은 차에 몸을 실었다. 새벽 6시가 가까운 시각에도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차는 예정된 장소로 향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포스코 센터, 그곳에서 53차 포스코 정기 주주총회가 열린다고 했다.

나의 임무는 포스코 건물 외벽에 시원하게 핏빛 액체를 분사하는 일. 연행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초짜 액션 활동가인 내게 그런 중책을 맡긴 것은 오로지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출신성분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동료는 액션 며칠 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크로와상을 구치소에 넣어주겠다며 진한 버터향 같은 애정을 드러냈다.

어스름한 새벽 기운이 젖은 갱지 마르듯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액션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모였다. 일면식이 없던 동지들이었다. 통성명과 함께 각오 한마디씩을 나누며 부직포 천으로 만들었을 법한 화이트 올인원을 착용했다. 등 뒤에는 POSCO OUT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타인의 등을 보고 힘이 솟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다가왔다. 비장해진 액션팀원들이 현장으로 이동했다. 경호원쯤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건물 밖에 나와있었지만, 우려한 것보단 위협적인 숫자는 아니었다. (띠용)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우리가 탄 차량은 마지막으로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차안 공기의 밀도가 급속히 높아지려는데, 팀원들이 저 깊은 천골에서부터 텐션을 끌어올려 왁자하게 소리를 질렀다. 차 안에 짙게 깔린 긴장감이 일순 와해됐다.

이윽고 차가 멈춰다. 물감통을 멘 액션팀 팀장이 먼저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위용이 넘쳐, 바지통이 넓었다면 끝단이 펄럭거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뒤꽁무니를 놓칠세라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팀장은 포스코 건물 정문 앞 펜스 하나를 유유히 열어젖히고 포스코 정문 외벽에 당도해 분사를 시작했다. 나도 질세라 한 손으로는 물감통을 펌프질하며 한 손으로 물감을 뿌렸다. 처음 해보는 액션에 열정이 과한 나머지, 내 얼굴로도 핏빛 물감을 분사해 겉으로 보기에 나는 더없이 비장해졌다. 우리의 등장에 포스코 직원들은 당황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달려들어 우리를 찢어놓았다. 나는 어느샌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동지들이 포스코 직원들과 몸싸움을 하는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다,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싶어 다시 싸움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가자마자 다시 튕겨져 나왔다. 이를 두고 사랑방 동료들은 많이 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한 동료는 나를 ‘기후용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포스코 센터 건물 앞에서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기후악당, 포스코 아웃! 노동악당, 포스코 아웃! 인권악당 포스코 아웃!” 포스코에 붙여진 불명예스러운 닉네임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우리가 외치는 동안 포스코 직원은 우리 면전에 대고 “에잇~ 당신들 때매 우리 환경미화원들만 뺑이 치네” 라고 말했고, 물감을 지우는 바로 그 노동자 한 분은 우리에게 “수고하십니다” 라고 말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불법’과 ‘사유재산’, ‘재물손괴’를 운운했고, 우리는 포스코의 이윤추구로 인해 위협받는 삶을 이야기 했다. 포스코 주식을 가진 주주들은 총회장에 입장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고, 포스코 직원들은 주총장으로 진입하려는 노조 활동가들을 저지했다. 그리고 출근하는 시민들은 바쁜 걸음으로 그 현장을 지나쳐갔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특별한 상황이 연출됐다기 보다, 그저 사회를 압축적으로 드러낼 뿐이었다.

어느새 건물 외벽에 뿌려진 붉은색 물감은 말끔히 지워졌다. 아쉬운대로 바닥에만 희미한 기운이 남았다. 그때 한 액션팀 활동가가 외쳤다. “우리가 오늘 뿌린 것은 붉은 페인트에 불과하지만, 포스코가 흘리게 한 피에 포스코는 반드시 응답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의 ‘불법’ 액션은 바로 뒤에 있을 기후위기비상행동의 기자회견 시간에 맞춰 마무리되었다. 경찰은 우리를 연행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 반대인지 평가하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떠올랐다. 자기 역할에 충실했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이.

우리가 그 자리에 모인 것은 포스코가 특별히 더 나쁜 기업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도, 포스코에 ‘착한 기업’이 되어달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탄소중립을 선언하고도 버젓이 삼척에 국내 최대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미얀마 군부의 자금줄이 되는 일을 선택하고, 노동자들의 산재 사고의 책임을 미루는 것은 이 체제 하에서 기업의 자산 가치를 높이는 일, 즉 이윤을 창출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결국 이 날의 구호 ‘악당기업 포스코 아웃!’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구호에 다름 아니었다.

기후운동으로 체제 변혁이라니. 이 거대한 담론을 현실의 구호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요구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점점 복잡해지는 기후운동의 지형 속에서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운동의 힘을 만들어가야 할 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경찰도, 포스코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포스코 주식을 가진 소액 주주들도, 바삐 걷던 시민도 기후운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일 말이다.


* 인권운동사랑방은 2019년부터 <기후위기비상행동>에 함께 하고 있고, 올해부터 두 명의 상임활동가가 비상행동 집행위에 결합하여 세상을 바꾸는 ‘기후정의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접속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