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후원인 인터뷰

‘국제인권(만)’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오래되고 아름다운 집에 살며 현장을 지키기로 한다

인권단체를 후원하(려)는 많은 분들이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갖지만,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에 관심을 가질 기회는 흔치 않지요. 그래서 인권활동가가 ‘어떤 사람’들인지 만날 수 있는 기회, 사랑방 활동가 인터뷰 <지금 만나러 오세요>를 마련했습니다. ‘빠듯하지만 뿌듯하게’ 인권운동사랑방 후원인 하기(with-sarangbang.or.kr)가 인권운동과 함께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 되기를 바라며!

• 인터뷰어 : 김원영 (변호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 인터뷰이 : 가원 (상임활동가)

제네바와 부동산, 나무가 보이는 집

가원과 나는 10년 만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 인터뷰를 제안 받고 나는 좀 당황했지만, 대학로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자 우리는 집에 관한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나는 꽤 오래 살았던 주거지에서 나가야 할 때가 왔는데, 서울에 새로운 공간을 찾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가원은 창밖에 나무가 보이는 아름다운 연립주택에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처럼”) 끌려서,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책의 저자인) 파트너 김도현과 함께 주택담보대출을 받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면 어떨까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비록 이 전략은 실행되지 않았고 절대반지 같은 집도 구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가원은 비슷한, 나뭇잎이 무성하게 집안으로 반사되는 오래된 집을 구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가 되어 나무가 보이는 집을 서울에서 찾는 가원을 10년 전 나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내 눈에 그는 유창한 영어실력과 풍부한 경험을 갖춘, 국제적인 인권네트워크의 인사이더로 보였기 때문이다. 제네바나 뉴욕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인권활동에 관심을 품은 많은 청년들처럼 나도 유엔에서 인권침해를 폭로하고 국제적인 연대를 단상 위에서 멋지게 (영어로) 호소하는 그런 삶에 동경을 품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동경을 품었을 뿐 아니라 그럴만한 능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국내’ 인권활동의 최일선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법이다. 그 점에서 가원은 이례적인 경우처럼 보였다.

원영 :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10년만 같습니다. 저희 나름 스위스에서 만나 알프스도 같이 간 사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는 데 왜 제가 인터뷰를….

가원 : 원영씨 인지도가 높아져서….

원영 : (…) 제 요즘 관심은 서울 어디에 집을 구할 수 있을까 밖에 없습니다. 가원님을 인터뷰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2010년 ‘국제인권기구’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만났잖아요. 당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셨는지 잠깐 소개해주시겠어요?
가원 : 당시 유엔인권정책센터(KOCUN, 코쿤)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교육훈련 활동에 주력했었어요. 주로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인권이사회, 조약기구 등을 참관하고, 국제기구 등을 방문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죠.

원영 :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고요? 제네바를 무슨 동대문처럼 다니시던데.

가원 : 초보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코쿤을 시작하고 그 일이 크게 도전적이지 않았고, 그런 교육훈련활동이라는 것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못해서 한동안 괴로운 시기가 있었어요.

원영 : 당시 저에게는 국제인권기구들과 소통하고, 그곳 사람들과 교류하고 저를 포함한 학생들을 리드하는 모습이 무척 프로답고, 멋져 보였어요. 저도 그런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요. 정작 가원은 의미를 크게 찾지 못하던 시기였군요.

가원 : 이 연수가 인권활동의 일환인가라는 질문이 늘 뒤따랐던 거 같아요. 자비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인데, 제네바 물가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까지 가는데 드는 비용이며 등등 진입 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프로그램인거지요. 외국어 실력까지 선발기준이다보니 어떤 의미에서 계급적인 특성이 뚜렷한 활동이라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이 활동이 조금 더 대중적이고, 실제 인권옹호 활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열린 기회가 되면 좋겠다 싶었죠. (코쿤에서의) 활동 막바지 두 차례 정도 참가비 부담 없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외국어 구사 능력도 해당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로 두지 않았어요.

‘현장’이란 어디일까

원영 : 당시에 저도 ‘이거 좀 끼리끼리의 판 아닌가?’라는 다소 편협한 생각도 했던 거 같아요(웃음). 분명 국제적인 제도와 연대에 기초한 인권활동이 의미가 있고, 또 멋있잖아요. 원래 가원은 뭘 하고 싶은 사람이었나요?

가원 : 대학시절에는(2000년대 초반) 인권에 관한 이야기는 만난 적이 없고,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 자율성이 좋았어요. 그러다 그냥 뽀대나는 일 하고 싶다, 전 세계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 돕고 싶다, (웃음) 그냥 유엔가서 좋은 일 하고 싶다, 그런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원영 : 그때 한비야 씨의 스토리가 엄청 유행하지 않았나요?) 바로 그 시점이었어요. 국제기구에 진출했다는 한국인 기사들이 많이 나올 때였고, 특히 여성들이 많이 진출한다 이런 이야기들. 그래서 운 좋게 의미 있는 국제기구에서 짧게나마 일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죠. 그런데 막상 그 곳에서의 경험이 상상 속 활동과는 또 좀 다른 느낌이었어요. ‘뭐랄까, 인권 문제를 길어 올리는 구체적인 현장이라는 데가 있다’, ‘여기가 내가 원하는 그 현장은 아니다’ 이런 생각.
원영 : 저라면 ‘뽀대나는’ 그 일에 만족했을 거 같아요. 그런데 가원은 ‘현장’으로 마음이 향했군요.

가원 : 막연히 ‘NGO에서 일하고 싶다’, ‘거기에 내가 원하는 뭔가가 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 시기 한 선배가 코쿤(유엔인권정책센터)에서 일하는 것을 권유했죠. 결혼이주여성들의 본국에서 인권옹호 사업을 하는 ‘현장’을 가진 단체라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두 번 생각 안 하고 일해보기로 했죠. 당장 갈 데도 없었고…. (웃음)

원영 : 유엔기구 정문에서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학생(바로 저) 데리고 다니는 교육훈련 프로그램은 확실히 덜 재미있었겠어요. 하지만 코쿤에서 여러 활동을 하셨잖아요?

가원 : 8년을 일했으니 축적된 시간만큼 다양한 활동을 한 거 같아요. 국제인권 관련 교육훈련부터 정기적인 유엔인권이사회 모니터링, 조약기구 심의 대응 등 국제인권과 관련된 활동이 한축에 있다면 다른 한축으로 입국 전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정보제공 사업에 관한 활동들이 있었어요.


국제인권(만) 하는 사람은 없다

원영 : 그런데 8년이나 일한 코쿤을 그만두셨습니다. 때로 첨예한 ‘국내’ 인권 사안과 분리된다고 느끼셨던 걸까요? 몇 년 전 인권오름에 기고한 글에서 국내의 인권침해문제와 유리되는 “국제인권(만)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가원 : 인권이라는 게 대단히 정치적인 거지만 동시에 허울 좋은,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지 않아도 될 때 들러리처럼 쓰이는 거 같기도 하거든요. 인권을 활동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정치적 사안에는 ‘중립’ 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 같은 걸 자주 목격한 것 같아요. 특히 2016년 정치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입장이 나온 뒤 이를 규탄하는 시민사회 성명서가 나왔는데, 이에 연명하자는 코쿤 사무국 의견이 이사회에서 좌절되었어요. 비슷한 시기에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에 대한 비판 성명서에 대한 연명도 좌절되었어요. 사무국와 이사진, 대표단의 입장차이가 극명했어요.

원영 : 이사회의 태도에 실망이 크셨겠습니다.

가원 : 실망감보다는 위기감, ‘중립’적이었던 이사회가 활동을 막아서는 적극적인 행위자(까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 사건을 통해 단체가 완전 뒤집어졌는데 (웃음) 이른바 국제인권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가면을 벗겨냈다는 통쾌함 같은 것도 느꼈던 거 같아요. 국제인권전문가라는게 국내에 정말 한 줌이고, 그 단체 인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데, 실제 그 분들이 인권전문가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는 설득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당시 코쿤 사무국장이었던 가원은 코쿤 해외사무소 활동가의 언어폭력사건까지 불거지자 이에 문제제기를 했고, 대표단과의 갈등은 더욱 커지며 사퇴압력을 받았다. 결국 2017년 8월 10일 “유엔인권정책센터는 인권단체가 맞습니까”라는 이름의 성명서를 내고 사무국에서 일하던 4명의 활동가가 모두 코쿤에서 퇴사했다. 이에 인권운동사랑방을 포함한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코쿤 활동가들을 지지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가 되다

원영 : 착하고 좋은 일을 ‘뽀대나게’하는 국제인권전문가를 꿈꾸던 가원님이 어느새 정치적이고, 현장 중심적인 인권활동의 세계에 서서, 착하고 뽀대나는 ‘전문가’들을 들이받고 그만두신거네요. 인권운동사랑방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도착한 장소일까요?

가원 : 우선 갈 데가 없었어요. (웃음) 인권운동은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에 중립적이지 않고,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차게 깔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사랑방에 입방했던 거 같아요. 더욱이 친구인 미류(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가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말을 건넸을 때 별로 안 할 이유를 못찾았던 거 같아요. 아주 쉬운 결정이었어요.

원영 : 우리가 부동산(?)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가원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나무가 보이는 집과, ‘사랑방’에 거주하게 된 셈이잖아요. 이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가원 :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랑방 활동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밌게(?) 할 수 있을까 같아요. 과거 타 단체에서의 활동은 다소 구체적인 인권 문제에 깊이 개입해 독자적인 입장이나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그런 활동들을 엮어내거나 만나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터 역할이었지요. 중요한 역할인데, 때론 좀 투명인간 같다는 외로운 느낌도 받았고요. 이는 그 조직의 한계와 별개로, 인권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 역량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랑방 활동은 제게 좀 벅차고 도전적이에요. 어떤 사안에 관점을 벼리는 일, 문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일, 인권으로 세상을 읽는 일이 익숙한 듯 낯선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요. 그래서 사랑방에서 하는 토론 내지는 글쓰기 등이 어렵게 느껴지고요. 인권운동 내지는 인권 문제의 지형을 읽는 일, ‘존엄’, ‘평등’, ‘연대’처럼 익숙하고 중요한 가치들을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새로운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 쉽지 않아요. 계속 묻고 있어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활동이 나에게 즐거움 내지는 동력이 될까. 여전히 나에게 향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중이에요. 이 내부를 향한 질문이 아웃바운드가 되는 날을 꿈꿔요.

원영 : 가원님의 경험과 역량, 고민이 더해지며 확장될 사랑방의 모습이 기대가 되어요. 어떤 활동에 가장 집중하고 싶으신가요. 1년의 목표와 10년의 목표를 말씀해주실 수 있다면?

가원 : 저는 목표가 없이 산지 오래되었어요. 되는대로 사는 거죠. 만2년 활동을 채웠는데요. 사랑방에서 지금 하는 활동은 인권의 시선으로 참사의 구조적 책임을 밝히는 담론을 만들고, 재난 피해자의 권리란 무엇인지 묻는 일이에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라는 연대체에서 낙태죄 폐지와 관련된 활동도 하고 있고요. 어느 정도 지난 시점에 이게 어렵기만 하면 다른 길을 찾아야겠죠. 그땐 아마 인권운동이 아니라 아예 다른 분야로의 전향이 되지 싶습니다. 실내 건축이랄지, 빈티지 가구 유통업계랄지. (하하)


가원은 아주 낡은 집을 구해 자신이 새집처럼 꾸몄다고 말했다. 나무가 무수히 많이 보이는, 자신의 손을 거쳐 새로워진 집. 고백하면 나는 ‘국제인권활동’하는 사람들에 편견이 있었다. 나도 한때 꿈꿨지만, 이른바 ‘흙수저’ 장애인인 내게는 그 길이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물론 그 활동의 중요성은 결코 폄하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차별들, 학대, 재난, 불평등의 문제들은 국가라는 정치제도에 국한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계속하여 더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할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가원 활동가가 할 일이 무척 많다고 느낀다(본인은 계획이 없다고 하지만). 낡은 집을 자신의 감각으로 ‘계획없이’ 꾸미는 가원의 주변에 어떤 장소와, 어떤 사람들이 이어져 있는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제네바, ‘장애학의 도전’을 쓴 노들야학의 활동가, 인권운동사랑방의 미류, 빈티지 가구샵, 결혼이주여성들의 고향, 이 장소와 사람들을 ‘계획 없이’ 가로지르며 연결하는 존재는 우리사회에서 분명 ‘이례적’일 것이다.

이례적인 사람들의 이례적인 활동을 후원하는 일만큼, 드물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드문 일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