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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 덕후 몽의 정치적 선택

활동가 인터뷰 '지금 만나러 오세요'

인권단체를 후원하(려)는 많은 분들이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갖지만,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에 관심을 가질 기회는 흔치 않지요. 그래서 인권활동가가 ‘어떤 사람’들인지 만날 수 있는 기회, 사랑방 활동가 인터뷰 <지금 만나러 오세요>를 마련했습니다. ‘빠듯하지만 뿌듯하게’ 인권운동사랑방 후원인 하기(with-sarangbang.or.kr)가 인권운동과 함께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 되기를 바라며!

• 인터뷰어 : 손희정 (문화평론가)
• 인터뷰이 : 몽 (상임활동가)

 

2020년 12월 초.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 몽을 만났다. 이런 저런 대화 중 그는 덕질과 활동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에게 덕질이란 원작이나 배우, 그 자체보다는 덕후들이 만들어내는 연성*의 영역에 매혹될 때 시작된다. 원작의 어떤 포인트들을 잡아내서 덕후들이 나름대로 해석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너무 좋다. 원작의 매력을 증폭시키는 건 덕후들의 해석과 감정이다. 활동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그 사안을 해석하고 완전히 다른 논의로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덕질에는 ‘연성러’가 있다면, 활동에는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있다. 누군가 하나의 사안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른 언어로 정리하고 그 문제를 또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을 때, 그 작업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문제에 더 깊게 빠져든다.” (*연성이란 팬덤 하위문화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팬덤이 원작의 설정들을 가져와 새롭게 만든 이야기나 그림 등을 의미한다. 이런 연성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연성러’라고 한다.)

두 시간 훌쩍 넘은 대화 속에서 이야말로 그의 활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활동을 사랑하는 사람,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의 탁월함을 발견하는 사람, 무엇보다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추상적인 사유를 벼려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몽이야말로 인권운동의 ‘연성러’였다.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고, 즐기는 사람은 덕후를 따라가지 못한다.” 활동 덕후 몽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언택트 시대의 활동

손희정 : 요즘 어떠신가.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안 좋아지는 걸 보는 것만큼이나, 그런 상황에서도 함께 모이거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이 힘들다는 활동가들이 많다.

: 모이고,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조건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오프라인으로 준비한 행사를 갑자기 온라인으로 돌려야해서 난감했던 적도 있었다. 언택트로 모이는 것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모이지 않으면 의견 교환이 잘 안 되고, 목소리를 모아서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어려워지니까…. 고민이 되기는 한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매년 가을 진행했던 ‘평등행진’도 올해는 취소됐다. 많이 아쉬웠다.

손희정 :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아야 할 텐데. 어떤 상상력이 필요할까. 몽은 2000년대 중반 우리가 온라인의 가능성을 믿던 시기에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이자 온라인 페미니즘의 공간이었던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2020년, 온라인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고민이 많을 것 같은데.

: 내가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시작했던 2000년대 중후반에는 온라인에 여성을 위한 안전한 공간 자체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언니네’라는 여성주의 사이트가 큰 반향을 일으켰던 건 그런 환경 안에서 ‘자기만의 방’이라는, 안전하게 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을 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해방 공간의 역할이 SNS의 자기 전시 공간으로 넘어간 것 같고, 이는 자본의 플랫폼이기도 하다. 언니네 사이트도 유지할 자본이 없어서 겪은 어려움이 컸는데, 온라인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 내게는 좀 어렵다.

손희정 : 참여의 기회를 늘리고, 의제를 확장시키기는 것엔 여전히 효과적이지 않은가.

: 물론 그런 부분도 있다.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드러내는 건 매우 중요하다. 온라인이 그런 활동을 용이하게 해주기는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온라인으로 무언가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액티비즘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온라인에서 SNS 프로필을 바꾸거나 서명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액션이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의 전부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온라인 참여를 현실의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힘으로 만들어내는 과제가 남아 있다.

몽이 걸어온 길

손희정 : 언니네트워크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궁금하다.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 2004년 언니네트워크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언니네 사이트에서 준비한 1회 페미니즘 캠프에 참여했었다. 언니네는 학내 여성주의 운동에 기반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20-30대 여성들에게도 해방구 역할을 해주었다. 1회, 2회에 참여하고, 4회 때도 다시 참여하려 고했는데, 지금까지 남이 깔아준 판에서 잘 놀았으니까 이제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캠프 준비단인 ‘지피기’로 참여했다.

손희정 : 몽은 기본적으로 책임감이 강한 것 같다. 그게 활동가의 성정인 건가 싶기도 하고.

: 그렇지 않다. 그저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은 거다. (웃음) 그렇게 캠프에 참여했는데, 거기 있는 여자들이 다 너무 멋지고, 똑똑하고, 매력적이었다. 그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결국 언니네트워크 활동가가 됐던 것 같다.

손희정 : 뒤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 활동도 그렇게 시작한 것으로 안다. 사람이 좋아서 함께 하다 보니, 그 조직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하게 되는 식으로?

: 나는 어떤 조직에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1인 활동가나 프리랜서 활동가가 등장하고, 조직이 아닌 개인들의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활동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한테는 안 맞는 방식인 것 같다. 나는 조직에 속해 있을 때, 조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때, 그리고 내가 동의하는 조직의 활동에 기여할 수 있을 때, 큰 에너지를 얻는다. 개인의 명분과 조직의 명분이 일치했을 때의 쾌감이 아주 크다. (웃음)

손희정 : 2015년 온라인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페미니즘 대중화의 물결이 거세지던 딱 그 시기에 언니네트워크를 그만뒀다. 그리고 살림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2019년에는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가 되었는데. 이 이동 경로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 2015년 초에 활동이 힘들어서 언니네트워크를 그만뒀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여성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갑자기 장을 이동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큰 전환은 아니었다. 언니네트워크는 ‘여성운동’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여성주의 운동’에 방점을 찍어온 단체고, 성차별 구조뿐만 아니라 그와 연결된 다른 사회구조를 함께 고민하는 곳이었다. ‘반차별공동행동’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성·인종차별반대공동행동’,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가족구성권연구모임’ 등이 언니네트워크가 활동하던 주요 연대체였다. 언니네트워크 부터 이미 여성주의의 확장된 문제의식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손희정 : 언니네트워크와 사랑방 사이에 살림이 있었는데?

: 살림 활동은 지금도 하고 있다. 살림 조합원이 3천 4백 세대 정도 되는데, 내가 5번인가 7번 조합원이다. 살림 창립을 준비했던 여성주의자들이 다 친한 친구들이었다. 초기에 본격적으로 조합원 열 명을 모아서 조합을 띄우려고 한다길래, 당연히 나도 함께 해야지, 싶어서 조합비를 내고 초기 조합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2015년에 언니네트워크 그만 두고 쉬던 참에, 살림에서 치과 개원을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치과 만드는 동안 직원으로 1년 일했다. 지금은 교육나눔이사로 활동 중이다. 살림이 이렇게 내 인생에서 중요해질 줄은 몰랐다.

손희정 : 계속 직원으로 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만 두었는가? 몽의 운동의 중심에는 페미니즘이 놓여있고, 대안적 가족구성권, 반차별, 공동체, 협동 같은 활동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살림은 그런 활동을 두루 펼칠 수 있는 공간 아닌가?

: 직원의 위치에서 일하는 것이 나와는 맞지 않았고, 다른 일을 할까 고민과 시도도 했었는데, 결국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근로자나 조합원이 아닌, 활동가일까 하면… (잠시 생각) 최근에 읽은 글을 하나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겠다. 박래군의 “노동개혁 이전에 ‘전태일 3법’부터”라는 칼럼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에서 썼던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그 해결을 위해 택하려던 방법”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걸 읽으면서 내가 활동해 온 과정, 내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손희정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궁금하다.

: 그 네 가지란. 첫째, 온정주의적 접근이다. 전태일 열사가 자기 버스비 아껴서 함께 일하는 여공들에게 풀빵 사주고 했지만, 당연히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다. 둘째, 세력가에게 어필하는 것. 실태조사를 해서 대통령에게 편지 보내고, 노동부에 찾아가고. 하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노동착취는 이미 위법이었지만,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거니까. 그래서 세 번째로 ‘전태일 피복’이라는 자기 사업장을 만들려고 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모범 사업장을 만들고자 했던 거다. 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의 형태와 흡사하다. 성공했다면 한국사회의 노동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금 3천 만원이 없어서 실패했다. 지금 우리는 조합원 모으고 조합비라는 자본을 직접 모아서 이런 상상력을 현실화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주의 가치에 기반한 의료복지 사업소를 만들고 자치력으로 운영해나가는 일은 중요한 모델을 만드는 실험이고, 그 실험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에 함께 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가슴 뛰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는 적극적인 항의 투쟁을 선택했다. 하지만 평화 시위가 공권력에 의해 무산되고 다른 투쟁의 자원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분신을 선택했다. 자신을 불태우는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네 번째 단계가 나에게는 활동이다. 적극적인 투쟁. 물론, 내가 분신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웃음)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손희정 : 우리 시대의 정치적 분신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 ‘존버’인 것도 같다. (웃음) 그래서 그 정치적 행위의 장이 지금은 사랑방인 건가.

: 그렇다. 상임활동가로 합류하기 전 사랑방 자원활동을 하면서 이곳은 심지가 굳다고 생각했다. 그게 꼭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단단함” 이런 의미라기보다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는 사랑방만의 중심이 있다는 의미다. 한편으로 반차별에 집중하는 단체가 많지 않기도 했는데, 사랑방은 국가폭력이나 인권침해 사안 외에도 반차별에도 집중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다.

차별금지법 제정, 그 너머

손희정 : 몽이 2020년 사랑방에서 주력했던 건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이다. ‘전국순회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평등버스’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팬데믹 상황이라 평등버스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전략조직팀에서 고생 많이 하셨다. 우리끼리는 이 버스가 <설국열차>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정말 방역 수칙 철저히 지키면서 진행했다. 그래도 코로나 확산 중이니까 평등버스에서 사람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지역도 있어서, 10분 정도 멈춰서 짧게 발언을 하고 떠났다. 그건 좀 황당한 일이긴 하다. 그 지역이 무슨 국경 폐쇄처럼 경계를 다 막은 것도 아니고, 다른 물류나 사람들은 막지 않으면서 평등버스가 오는 것에 대해서만 우려를 했다. 방역과는 무관한 정치적인 문제였다는 의미다. 그런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면, 평등버스 활동을 하면서는 전반적으로 코로나가 반차별을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느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전국적으로 이렇게 차별이나 혐오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거다. 지역에서 반차별 운동을 하는 단체들 역시 차별 문제를 논의의 테이블에 올리는 것이 좀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손희정 : 차별금지법을 생각하는 시민들의 온도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낀다는 의미겠다.

: 그렇다. 지금까지는 시민사회 전반적으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잘 공유되지 않았다. 정확한 당사자가 있어서 “내 문제다” 혹은 “내가 앨라이다”라고 할 수 있으면 투쟁을 조직하기 좋았을 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차별금지법은 모두를 위한 법”이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코로나를 계기로 누구나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감각이 생겼다. 덕분에 차별금지법이 “모두를 위한 것”이자,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 역시 공유되기 시작했다.

손희정 : 중요한 변화겠다.

: 그와 더불어서, 사람의 권리가 ‘국민’이라는 자격조건을 뛰어넘어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도 구체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한 것 같다. 법제도 안에서 반차별을 이야기하고 권리를 확인하는 건 중요한 활동이지만, ‘국민’이 아니면 권리를 말할 수 없다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이나 ‘시민’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이게 참 설득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달라질 수 있겠다. 예컨대, 인종문제가 그렇다. 일단 이주노동이나 결혼이주, 비자 문제 등 관련 제도가 너무 복잡해서 그 안에서 권리를 논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에 지자체들에서 ‘긴급아동보육’으로 지원을 한다고 했을 때, 한 학급 45명 중 38명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부모가 이주민이거나 외국인인 경우가 있었던 건데, 이게 부당하다는 걸 사람들이 전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권리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무권리의 사람들이 있고, 그 무권리의 상태야말로 문제라는 걸 코로나를 통해서 좀 더 대중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거다. 자격조건에 따라서가 아니라 “똑같은 사람이니까” 권리가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금이 정말 중요한 순간이다.

손희정 : 그래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수월해질까?

: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평등법안」을 발의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것이 기사화되었는데, “사회 상규에 반하지 않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회, 단체 또는 그 단체에 소속된 기관에서 해당 종교의 교리·신조·신앙에 따른 그 종교의 본질적인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위”는 차별로 보지 않는다는 ‘종교기관 예외’ 조항을 넣었다고 한다. 보수개신교를 비롯해서, 차별금지법에 여전히 저항감을 가진 지역구 유권자들을 고려한 포석일 터다. 하지만 한국에 종교기관 예외 조항이 들어간 법이 없다. 이 조항이 들어가게 된다면, 이후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싸움에서 한 번 물러날 때마다 국가 인권정책이나 지역의 인권조례에 악영향을 미치고, ‘성평등’이 아니라 ‘양성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등 퇴보가 일어났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손희정 : 정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 그렇다. 하지만 결국 한 걸음 나가게 된다면, 그건 중요한 한 발자국이 될 것이다. 장애인권운동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운동의 핵심은 “더 많은 복지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게 우리의 권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지원’이라고 생각할 때에도, 그 운동은 ‘지원’이 아니라 ‘권리’에 대해 주장했다. 차별금지법 역시 선심 쓰듯이 균형을 맞추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권리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도에 새겨놓아야 한다.

손희정 :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 아이러니하게도 역시나 ‘집회결사’다.

손희정 : 요즘 같아서야 아예 모이기도 힘든데?

: ‘집회결사’는 그저 오프라인에서 모일 권리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혼자서는 싸울 수 없다”는 말에 가깝다. 권리가 공동체의 문제라는 걸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권리가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가와 내 개인의 권리가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권리가 개인이 행사하는 것, 일종의 ‘회원권’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손희정 : 몽은 평등버스에 대해 소개하는 글에서 “한국사회에 일상화된 차별을 알아차리고 평등을 실천하는 과정, 서로를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식하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들이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썼다. 사회적 관계가 구성되는 방식과 권리에 대한 사유를 다시 써나가는 과정 중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수 있겠고, 또 그런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또 다른 사회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계속하는 활동가 몽을 기대하며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한 활동가의 메모였다고 말했다. 메모에는 “모든 게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그저 바라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단단하고 또 어려움을 돌파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적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그 메모를 본 것이 2014년이었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 지금이라고 끝났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도 이만큼 궤도에 오르기까지 정말 헌신적으로 움직인 단체와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 동료들이 격려 받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몽은 단단하고, 의지가 강한 활동가다. 10년 후, 20년 후에도 몽을 현장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덕질처럼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장. 사랑방이 몽에게 계속 그런 공간이기를 함께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