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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지금 택배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늦어도 괜찮아'보다 지금 당장 노동기본권 보장

지난 8월 14일은 택배 없는 날이었다. 택배 노동자가 공식적으로 쉬는 최초의 평일이었다. 국내 위탁 택배 서비스사업이 도입된 지 28년만의 일이니 가히 역사적인 날이다. 대통령도 나서 “택배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세상은 그들을 코로나 시대 필수노동을 담당하는, 사회가 멈추지 않게 헌신하는 숨은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늦어도 괜찮아’ 캠페인이 등장하며 택배 노동자의 쉼을 응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런 움직임들에 기꺼이 동참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왜일까.

택배 없는 날의 의미

올해 상반기에만 12명의 택배 노동자가 사망했다. 사망한 7명은 산재보험 적용을 받은 경우이며, 보험조차 적용받지 못한 채 사망한 택배 노동자가 5명이다. 대부분 과로에 따른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목숨을 거뒀다. 쏟아지는 택배 물량과 택배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에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코로나19가 달리 재난이 아니다. 누군가는 생계를 잃고, 누군가는 과도한 노동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택배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은 12.7시간, 월평균 근무일은 25.6일이다. 주말배송, 새벽배송, 당일배송은 더 이상 낯선 서비스가 아니다. 누군가 쉬지 않고, 잠을 못자고 일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택배 없는 날’은 택배 노동자에게 단비 같은 쉼이기 이전에 이렇게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사건이다. 정작 택배 노동자들은 쉬는 동안에도 쌓이고 있을 배송 물량 걱정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택배 노동자들의 쉼을 위해 소비자들이 주문을 잠시 멈추거나,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휴무일 하루를 보장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택배산업 종사자들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를 들춰내고 바꿔야한다. 지금 필요한 사회적 요구는 더 많은 택배 없는 날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택배 없는 날’을 지정해야 하는 황당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택배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일할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택배산업 노동자의 현실

택배산업의 생태계는 변화와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운송, 보관, 분류에서부터 가공, 조립, 포장 등까지 노동의 종류는 세분화되고 그에 따라 필요한 노동자도 다양해졌다. 기업이 물류의 전 과정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인프라를 외주화하면서, 특수고용직·계약직·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배송·입출고 작업·창고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 탓에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의 책임 주체도 명확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로 급증한 택배 물량의 부담을 고스란히 노동자들이 감내하고 있다. 지난 5월 CJ 대한통운에서 7년을 일한 배송 노동자 한 명이 잠자던 중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목숨을 잃었다. 하루 평균 400건 전후의 물량을 배송하고 한 달 25일을 일했던 그가 스스로 장시간 그 노동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배송 건당 수수료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는데 수수료는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은 정해져 있는데 건당 수수료가 너무 적다면 과로하는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배송 노동자들은 현재 개인사업자 지위다. 택배회사는 자신들이 각각의 개인사업자들과 물류 배송 위탁을 맺은 사업자 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를 고용했을 때 따라오는 책임인 안전한 작업환경, 적정한 임금, 노동시간과 같은 여러 사안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원청 업체가 하청 업체 납품단가를 정하는 것처럼 배달 수수료를 정할 뿐이라고 한다. 이들 배송 노동자들이 개인사업자라고 하나,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벌점이나 벌칙 등을 받게 되고 회사는 이를 고객평가 점수로 환산하여 언제든 계약을 해지한다. 거기에 더해 밤사이 터미널에 도착한 짐들을 분류해 차에 싣는 분류 노동은 물류를 관리하는 회사가 책임져야 하는 것임에도 배송기사들이 떠맡는 대표적인 무료 노동이다. 회사는 이처럼 모든 업무 수행을 사실상 관리지휘하고 이들의 노동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거둬들이고 있지만, 그 책임은 아무것도지지 않으려고 한다.

최근 택배 물류센터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잇따르자, 고용노동부는 대형 택배회사 4개사의 물류센터 11곳과 하청업체 17곳을 대상으로 한 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했다. 택배산업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물류센터 노동자들의 경우, 근로시간을 위반하거나 휴게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연장, 야간, 휴일근로수당, 주휴수당, 연차수당 등 각종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불법 파견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도 145건 적발됐다. 지난 5월과 6월 쿠팡 물류센터 비정규직 노동자와 물류센터 외주업체 노동자가 청소도중 돌연사한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특히 쿠팡 물류센터에서는 코로나19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회사의 사업장 폐쇄가 늦어지면서 물류센터 노동자들과 그 가족까지 총 152명의 감염 피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회사는 감염병에 취약한 작업 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피해대책을 요구한 계약직 노동자를 계약 기간 만료를 이유로 해고하고, 감염 불안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병가신청 기준을 강화했다. 중대한 산업재해를 발생시킨 사업장인데도 피해 노동자와 그 가족에 대한 사과는 커녕 해고통지를 했다. 택배 없는 날을 응원한다며 쿠팡 배송기사는 주 5일 근무한다고 자랑했던 그 광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정부와 기업의 책임

코로나19는 성장 가도를 달리던 택배 산업에 더욱 폭발적인 배송 물량의 증가를 불러왔다. 택배 회사는 엄청난 영업이익을 쌓아갔지만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죽어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돈 더 벌려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과로를 하다가 죽은 것이라는 태도다. 이런 기업의 태도에는 정부의 책임이 매우 크다. 고용노동부는 2017년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설립 신청을 다섯 차례나 반려했다. 또한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은 CJ 대한통운이 파업에 동참한 조합원을 형법상 업무방해 혐의로 무더기 고소한 일에 대해서도 정부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노동부장관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사업주가 특정되는 것은 아니라며, 사안의 법률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의 맥을 풀리게 했다. 그의 발언은 기업의 입장에서는 사측이 사용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노조와의 교섭은 거부해도 되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법원에서도 기업의 실질적 사용자성을 중요하게 보며 배송 기사의 노동3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런 법원의 결정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사용자를 엄격하게 규율하여,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 택배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

지난 8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와 민주노총 전국택배연대노조는 택배노동자 과로사 문제를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전국 동시 택배차량 추모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코로나19 재확산과 추석을 앞두고 택배노동자 과로사에 대한 대책마련을 정부와 기업에 요구했다. 분류작업에 필요한 인력 고용, 택배노동자 안전 처우 개선을 위한 정부의 권고안 마련, 정부주도의 민/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논의 기구 구성을 요구했다. 택배 기업들은 연일 최고이익을 경신하고 노동자들의 과로사 소식은 계속 들려오는 상황에서 정부도 무언가 하려고는 한다. 택배회사들과 고용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택배 종사자의 휴식 보장을 위한 공동의 노력사항’도 그 결과 중 하나다. 최근 한 지자체는 코로나19 시대 택배노동자와 같은 ‘필수노동자’에게 경제적 인센티브를 부여하기 위해 조례를 제정했다. 그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이런 식이다. 정부와 택배회사들이 만나서 ‘노력사항’을 합의하거나 힘든 노동자에게 정부가 물질적 지원을 좀 더 보태는 방식 말이다. 택배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논의나 협상의 주체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 ‘노력사항’ 합의조차 정부와 회사가 합의하는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택배 노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단결하고 행동하고 교섭할 권리를 가지는 것, 일터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로 서기 위한 노동기본권의 보장이 ‘#늦어도 괜찮아’보다 지금 당장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