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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언덕 위 하얀집'?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와 진실

누구나 다른 이들과 함께 건강하게 살고 싶다

최근 여당 대표의 발언이 큰 질타를 받았다. “국회에 정신 장애인이 많다” 그의 발언은 비단 한 정치인의 못된 입의 문제이기에 앞서 정신 장애인에 대해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인식을 드러냈다. 언제부터인가 정신질환자, 정신병, 정신장애 등의 용어는 가치중립적 위상을 상실하고 사람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말로, 특히 강력범죄 피의자를 향해 분노를 토해낼 때 사용되어 왔다.

범죄사건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

연이은 강력범죄 사건의 피의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정치권과 의료계는 앞 다투어 정신질환자들을 사회로부터 어떻게 격리 시킬 수 있을지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강제입원의 요건과 절차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이거니와, 공공주택 임대사업자가 정신질환자와의 계약을 거절하거나 강제 퇴거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야당 의원마저 등장했다. 마치 강제입원 절차가 까다로워 정신질환자의 범죄가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강제입원 비율은 이미 타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높다. 독일 17%, 영국 13.5%, 이탈리아가 12%인 것에 비해 한국은 무려 61.6%에 달한다. 인구의 1%를 차지한다는 중증정신질환자 모두를 가두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보도가 넘쳐난다. 이를 접하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실제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비질환자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강력 범죄 중 살인이나 성폭력과 같은 흉악 범죄에 있어서도 비질환자 범죄율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아무리 구체적인 통계를 인용해 정신질환자의 범죄와 폭력 위험성이 낮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다. 정신질환자가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만 인식되는 것은, 그들이 강력범죄의 피의자가 되었을 때만 사회에 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0으로 수렴한다면 함께 살아가고 있는 50만 정신질환자들의 존재를 자각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 존재들

1호 정신병원인 청량리정신병원이 2018년 폐쇄되었다. 정신병원을 지칭하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은어의 유래가 시작된 곳이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흰색 건물이니 정신병원이 하얀 집으로 명명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방점은 ‘언덕 위’에 찍힌다. 대개의 병원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인구 밀집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유독 정신병원은 저 멀리에 외곽, 사람들 눈에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아 왔던 것이다.

정신질환을 겪는 인구는 예상보다 많다. 2017년에 주요 17개 정신질환을 대상으로 조사된 정신질환의 평생 유병률은 25.4%다. 성인 4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다는 뜻이다. 이는 만성질환 중 고혈압 유병률 26.9%와 비교했을 때 결코 낮지 않은 수치다. 정신질환도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예방과 관리가 필요한 병이다.

그 중 조현병은 생애주기 중 다소 이른 시기인 15세에서 30세 사이에 발병한다고 알려져 있다. 적절한 시기에 치료가 시작되면 그 효과가 크다. 그래서 초기의 치료적 개입이 중요하다. 설령 응급 상황을 맞아 입원을 하게 되더라도 증상을 호전 시킬 수 있고, 이후 적절한 관리로 사회 복귀가 가능하다. 하지만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이해는 일천하다. 아픈 사람이기보다는 행동을 종잡을 수 없는 위험한 사람, ‘정상적’ 범주 밖에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전부다. 그런 인식에 기대어 정신질환자는 격리하고 추방해도 된다는 주장이 정당화된다.

적절한 치료를 받을 권리

이런 사회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알리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으니 적극적으로 치료받기도 힘들다. 그 때문에 치료의 적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서는 정신질환을 발견한 뒤 정신보건서비스를 이용하기까지 평균 84주가 걸린다. 미국의 52주, 영국의 30주와 비교하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다.

누구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조기 치료를 강조하지만, 정작 적절한 의료 접근권은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중증정신질환자 우선 조치 방안을 발표하면서, 지역 정신건강서비스를 개선하고 치료의 사각지대를 없애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정부의 선언이 무색하게도 지난 1일 경기도에서 한 정신병원이 문을 열려다가 주민들의 항의로 설립 허가가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병원 주변에는 ‘정신병원이 웬말이냐’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인근에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이 설립 반대의 주요 근거였다. ‘정신병원은 산골짜기에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민의 발언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 인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정신질환자는 내 이웃이 절대 될 수 없다거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 말이다. 이런 인식이 치료는커녕 정신질환자들로 하여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잠재적 범죄자인 정신질환자들 때문에 불안해 못 살겠다며 온 사회가 아우성이다. 그동안 눈에 띄지 말 것을 강요받았던 정신질환자들이 최근 느낄 불안은 상상조차 어렵다.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을 키워야 할 때

며칠 전 정신장애 당사자 자기권리 주장대회가 열렸다. 한 참가자는 “정신 장애인이기 이전에 모두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 어떤 구체적인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기 이전에 ‘나도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이들. 그런 사람들의 말하기가 시작되었다. 어렵게 터져 나온 정신질환자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정신질환 관련 정책에 당사자들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관련한 정책 논의에 당사자의 참여 배제는 사회에서 정신질환자의 격리와 배제를 강화했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일련의 강력범죄 사건이 보도된 이후 정부는 정신건강센터에 등록된 8만 명을 대상으로 일제 점검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정신질환 의심자 발굴에 협조하여 고위험군에 대해서는 사례관리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발굴’이라는 표현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듯, 이미 정신질환자들은 권리의 주체라기보다는 관리의 대상이다. 이런 대책은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거나 편견을 해체할 수 없다. 치료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감시일 뿐이다. 사건이 터지면 다시금 격리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등장할 것이다. 예상이 어렵지 않은 시나리오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정책의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 질환이라는 관점에서 재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질환자가 공동체의 일원일 수 있도록 사회의 역량을 키워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질환자의 존재가 범죄 피의자의 모습만이 아닌, 다양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예컨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직장 동료이자 학급 친구이자 같은 아파트 이웃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구체화할 수 있다.

 정신질환과 관련된 법과 제도는 정신질환자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인간다운 삶과 비질환자의 인간다운 삶이 다르지 않다. 누구나 다른 이들과 함께 건강하게 살고 싶다.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건 그 감각을 발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