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이야기

[인권하루소식] “노예문서” 비정규직 관리세칙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소식 기자들은 노동자들의 이어지는 죽음의 현장을 따라 다니느라 바빴다. 김주익, 곽재규, 이용석, 이해남. 팩스로 ‘긴급속보’가 들어오면 먼저 죽은 자들의 이름과 소속을 확인한다. 어디선가 투쟁사업장 소개에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왜 싸우고 있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한진중공업에서 기계를 만드는지 배를 만드는지 잘 모르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제야 어떤 곳인지 알아보게 되는 식이다. 한진중공업, 근로복지공단, 세원테크. ‘어라? 근로복지공단은 최근에 가본적이 있었지’

몇 달 전 청구성심병원 조합원들이 조합활동에 대한 사측의 탄압이 정신질환까지 불러왔다며 집단 산재신청을 했을 때였다. 그 날 민주노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인근 근로복지공단 민원실로 가서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까지 봤었다. 당시 투쟁계획 중 하나가 만약 공단 측이 심사를 질질 끌면 근로복지공단 노동조합과 연대해서 공단 정문에서 천막농성이라도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에서 이미 정문 앞에 집회신고를 내놔서 거기 부탁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뒤에 알았지만 이건 정규직 노조 얘기였다.

10월 26일 이용석,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전남본부장,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도중 집회대열 안에서 분신. 유서부터 읽어본다. “파업을 준비하며 사측의 많은 부당노동행위들을 보면서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힘들까 가슴이 메어옵니다”,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 깨어나지 않은 조합원에게 몸으로써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 자체가 노동자로서 승리입니다. 직원을 탈피한 진정한 노동자로서 삶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노예문서같은 비정규직 관리세칙을 파기하고 고용안정을 외치는 우리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며 마땅히 쟁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서를 아무리 훝어 봐도 임금인상 요구나 비정규직의 차별대우를 하소연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비정규직 관리세칙”이란 말이 눈에 띈다. ‘저게 뭘까? 노예문서라니? 손배?가압류는 좀 알겠는데…’

“근평이 제일 무서워요"
일단 근로복지공단 앞으로 가보기로 한다. 열심히 투쟁가를 배우고 있는 조합원 옆에 앉아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얼굴 알려지면 안 된다면서 인터뷰를 서로 미루더니 한 사람이 머뭇머뭇 나섰다. 이름은 절대 밝힐 수 없단다. 투쟁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확인한 다음에 정작 궁금했던 ‘관리세칙’에 대해 물어봤다.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이 조합원은 “얼마 전에 같은 부서 언니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귀했어요. 그런데 그동안에 부서장이 새로 들어와 있었지요. 근데 출근 둘째날 갑자기 그 부장이 근평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적이 꼴찌라고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언니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울기만 하고, 우리도 같이 울었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그 언니는 ‘누군가는 나가야 하면 내가 나갈께’ 하고는 나갔어요. 한번도 본적 없는데 어떻게 근무성적을 매길 수 있어요? 며칠 후에 바로 새 사람이 들어왔어요” 그 조합원은 “그때는 부둥켜안고 울기만 하고 헤어졌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생기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95년에 처음 만들어진 ‘비정규직원관리세칙’(아래 관리세칙)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채용, 근무성적 평정, 징계, 보수 등을 규정하고 있다. 관리세칙의 32개 조항을 꼼꼼히 읽다보면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온다.

    제15조(재계약) ①제9조 제2항의 근로계약기간 만료시 필요한 경우에는 사용기간을 정하여 재계약 할 수 있다. 다만,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재계약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3. 근무성적이 극히 불량하여 제23조에 의한 서열명부 작성결과 연속 2회 또는 총 3회 이상 하위 10%(소수점이하 절사)에 해당되는 경우

    제20조(근무성적 평정) ①사용권자는 매 5. 31과 11. 30을 기준으로 근무성적 평정을 실시하여야 하며, 인사관리상 필요한 경우에는 특별근평을 실시할 수 있다.

그럼 성적은 어떻게 매기는지 보자. “평정대상요소별로 5점을 기준으로 하여 50점을 만점으로 하고”, “수(50점이하~45점이상) 20%, 우(45미만~35점이상) 40%, 양(35미만~25점이상) 30% 가(25점미만~20점이상) 10%”로 나뉜다. 성적 평가 기준이 목표 달성도, 창의성, 노력도, 책임성 등 모호하게 되어 있어 부서장 자의가 개입될 여지가 충분했다. 게다가 서열명부를 두고 등수별로 기록해 두고 성적 동순위자는 두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어 해당 부서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잘라버릴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노동자들은 알아서 몸조심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니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같은 부서 사람들끼리 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정규직과 똑같은 일 하는데 왜 차별대우 하나”
한편 관리세칙은 비정규직의 직무로 정규직 업무 대체수행을 명시해두고 있다. 실제로 농성장에서 만난 조합원들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 우리만 왜 차별대우 하냐?”고 입을 모았다. 한 조합원은 “경력 4년인데도 기본급이 70만원 안팎이고 상여금을 받아봐야 100만원이 조금 넘어 정규직의 60%에 불과하다”며 “정규직은 다 받는 식대나 출퇴근 교통비도 받지 못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조합원은 “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부서 회의 때 부르지 않고 손님 오면 커피를 타는 것에서 사무실 걸레질까지 비정규직의 몫”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제5조(비정규직원의 구분) (…) ③계약직원은 기한을 정하여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채용된 자로 한다. (…) 3. 정규직 업무를 대체수행하기 위하여 채용된 자

이 결과 전체 인원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져 있고 한 부서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 병가, 식대 등에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사실상 정규직을 점차 비정규직으로 전환해 비용을 줄이고 해고를 간편하게 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정규직 전환 내부제한경쟁시험
천막농성장에서 만난 한 조합원은 “언제쯤 파업이 끝날 것 같나요?”라면서 “며칠 있으면 시험 있는데…”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내부제한경쟁시험은 한 해에 10명 안팎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는 시험이다. 파업 불참자가 여럿 되는 것도 실은 그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원래 이 시험에는 행정관련 법률 등 시험 성적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올해 노조가 생겨서 그런지 이번 시험에는 시험성적 50%에 앞에서 봤던 근무평가 성적이 50%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 조합원은 “솔직히 파업 빨리 끝나면 시험 준비하려고 했는데 사람이 죽는 바람에 생각이 달라졌다”면서 “파업 들어간 사람들 근무평가는 거의 바닥권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매년 10명 정도를 정규직 전환자로 뽑아왔는데 파업 시작되고 난 후 치러지는 이번 시험에는 40명 가까이 뽑는다는 것이다.

파업에 돌입한 후 조합원들은 이 시험에 응시하지 않겠다는 거부 선언을 하고 공단 측에 시험 중지를 요구했다. 노조 측은 “파업 요구사항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들어가 있는데 교섭은 불성실하게 하면서 시험은 강행한다니 말도 안된다”면서 시험장 봉쇄 투쟁도 각오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중에 들었지만 결국 11월 9일 서울공고에서 시험이 치러졌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 중 몇 명은 정규직으로 전환되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내년 시험을 준비하면서 ‘근평’을 잘 받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게 될 테다. 실은 공단 측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테니까.

비정규직과 같이하면 100% 진다?
연대집회 말미에 근로복지공단 정규직노조 위원장이 발언했다. 발언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등뒤에 앉아 있던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위원장님, 그때 우리 받아주셨으면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하고 소리친다. 힐끗 쳐다보는 위원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해서 근로복지공단 정규직 노조에 전화를 걸어봤다.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알다시피 보통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 투쟁을 지원해 주지 않고 심한 경우 사측과 함께 탄압하는 경우도 있어 왔으니까.

한국노총 소속인 정규직 노조 관계자에 의하면 지난 5월 집행부는 비정규직도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안은 70% 넘는 압도적 반대에 부딪혀 부결됐다. 반대 입장은 주로 “비정규직과 같이하면 100% 진다”는 것이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말이다. “아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목표로 싸우면 되지 않겠냐”고 찔러보니 “그건 아무래도 가능성이 별로 없지 않겠냐?”고 말한다. 정규직 노조 집행부의 고충이 이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연대하는 방법이 고작 성명서 발표와 연대집회 참여, 투쟁조끼 착용이라니 실망스러웠다. 공단건물 담벼락 주변에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우리 직장에서 우리가 파업집회 하겠다는데 왜 막느냐”고 싸우고 있는데 정규직 조합원들은 배치된 전경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 출근하고 밥먹고 퇴근하고 있는 셈이니까.
최근 소식을 보려고 노조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공단 측의 입장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다만 파업투쟁 소식지를 차례차례 읽다가 눈에 띈 글 하나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사건발생일 2003년 11월 9일 4시 4분경 서울공고 앞....
    조합원 동지들 30명이 시험을 치고 나오는 배신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모였다. 조금 늦게 도착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상태였으나, 아직 나오지 못한 배신자들이 한명두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본부에서 거짓말을 하고 대오를 나간뒤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던 배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동지들이 ‘야이 개새끼야’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예비군이라서 간다는 사람, 아버지가 아파서 간다는 사람, 소리없이 사라진 사람 모두 그 시험장에서 나올줄이야. 대충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조합원동지들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았다. ‘개새끼들’, ‘시팔새끼들’ 아무리 많은 욕은 했지만 속은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한 조합원이 공단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 공단새끼들이 문제야 왜 120문제로 사람을 평가해. 그게 말이 되냐고.’ 정말 가슴이 찡해오기 시작했다. 근로착취공단 매년 시험으로 사람을 평가해 정규직을 만들어준 후 큰 선심이나 쓰듯이 큰소리 치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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