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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의 인권이야기]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소리 없는 떼죽음

연대의 발걸음이 절실하다!

누구나 어린 시절 갖고 싶었던 장난감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내겐 ‘레고’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조립식 블록 쌓기 완구가 그랬던 듯하다. 지금도 어린이용 장난감으로는 제법 고가의 상품이지만, 그 때도 레고를 갖고 놀던 친구들은 또래 아이들로부터 부러움을 독차지했었다. 학교 앞 문구점에 진열된 레고 장난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작은 블록들을 겹겹이 둘러치고 쌓아 멋진 우주선이나 성을 완성하는 즐거운 상상에 나는 가끔 빠져들곤 했었다.

그런 시절을 한참이나 잊고 살다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낸 장소는 별스럽게도 조선소였다. 용접봉 한 번 만져본 적도 없던 내가 무작정 울산으로 내려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에 취업한 게 2004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처음 현대중공업 공장 안에 들어갔을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고층 빌딩처럼 아득하게 솟아있는 골리앗 크레인, 야외 작업장에 빼곡히 들어 찬 집채 만한 크기의 철재 블록들, 그리고 곳곳에서 용접 불꽃이 일으키는 수백, 수천 개의 섬광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했고, 정체 모를 기계장비와 각종 치공구들로부터 울려 퍼지는 굉음들에 순간 위축되고 말았다. 이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 싶었다.

배를 짓는 사람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조장 형이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더니 도크장으로 데려갔다. 뜻밖에도 거기에서 레고 블록이 차곡차곡 쌓인 듯한 광경을 처음 목도한 것이다. 배를 ‘짓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그 날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도크장 안에서는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컨테이너선 한 척이 웅크리고 있었다. 웅장한 컨테이너선 한 척이 어떻게 건조되는 지 조장 형은 조선소 ‘초짜’인 내게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우선 집채 만한 블록들을 크레인에 매달린 쇠밧줄로 끌어올려 선저(배의 밑바닥)부터 층층이 탑재한다. 레고 블록은 블록 위에 튀어나온 돌기를 다른 블록의 홈에 끼워 맞추면 간단히 조립할 수 있지만, 선체 블록의 조립과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블록과 블록을 단순히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용접이라는 공법을 통해 단단히 ‘잇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단순화해 보더라도, 철판을 설계도면대로 절단하는 밑작업부터, 평면의 철판을 가공하고 입체화하는 블록 조립단계, 각각의 블록을 선체에 고정시키는 탑재단계까지 무수히 많은 공정과 인력이 소요됐다.

사실 나는 배 한 척을 짓기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공사에 투입되고 있는 줄 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온 세상 만물들이 기계와 컴퓨터가 지닌 놀랍도록 정교한 기술과 민첩한 속도로 대체되는 오늘날이 아니던가.

물론 배를 짓는 과정에도 자동용접을 비롯한 로봇과 컴퓨터 기술이 전통적인 노동력을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기는 하다. 허나, 조선산업은 지금도 여전히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현대중공업뿐만 아니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같은 이른바 ‘빅3’ 조선소들이 최근까지 전 세계 수주량에서 상위권을 독점할 수 있었던 까닭도 실은 숙련된 기술과 경험을 두루 갖춘 조선소 노동자들이 국내에 즐비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산업 한파로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지만, 울산, 거제, 목포, 군산 등 전국적으로 조선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무려 19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정부와 기업들은 조선산업 전반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엄포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몇 년 전까지 호황기를 구가하던 한국 조선산업에 일감이 바닥났다는 소식도 언론보도를 통해 연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수주잔량이 바닥을 치고 있고 신규 수주를 못하는 상황은 과연 누가 야기한 잘못일까? 97년 금융위기 사태부터 2008년 세계경제위기, 그리고 근래의 조선산업 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판에 박힌 공식을 암송하는 정부와 기업들을 또다시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야!

거제, 울산 어디를 가보아도 현장의 하청노동자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통탄한다.
“몇 년 전까지 수백, 수천 억 흑자 내던 회사가 고작 1~2년 어렵다고 기우뚱한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게 다 오늘내일 회사 문 닫을 것처럼 협박해놓고 노동자들만 쥐어짜려는기라.”

아닌 게 아니라, 정부와 기업들이 이처럼 위기를 과장하면서 그 위기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시도들이 결국 전체노동자들을 향한 책임 전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짓누르는 압력으로 가장 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층을 이루는 약자들이었다. 지금 조선소 하청노동자들도 이 피라미드의 최하층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정점에 선 지배자들은 이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할 뿐이다.

지난 10월 7일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현장시찰의 일환으로 거제 대우조선해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직노동조합, 회사 경영진, 협력사협의회와 잇따라 간담회를 가지면서도, 정작 하청노동자들의 실태를 청취하는 자리는 마련하지 않았다. 이에 <거제통영고성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가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환노위 의원단은 부랴부랴 하청노동자들과의 간담회를 잡았다.

구조조정 국면에서 최대 피해자인 동시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청노동자들의 존재는 곧잘 잊히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종전에도 왕왕 벌어지곤 했다. 노동부 장관이 조선산업 위기 지원방안을 검토한다는 명목으로 6월 중순 거제지역을 찾았을 때에도 상황은 엇비슷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현장 방문도 정규직노조, 원하청 기업인들을 만나는 똑같은 수순이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소리 소문 없는 구조조정에 잘려나간 이들이 부지기수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하청노동자들이 짐을 싸야 할까?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가 소리 없이 강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업체 폐업이나 물량팀 해체와 같은 폭력적인 방식이 별다른 저항 없이 현장에 관철되고 있는 까닭이 있다. 이 가혹한 폭력에서 벗어난 ‘운 좋은’ 하청노동자들도 속수무책 당하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위기를 빌미로 임금삭감이나 임금체불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10월29일, 그들의 꿈과 이야기에 주목하자

그러므로 조선산업 대량해고의 재앙은 단순한 예언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전 사회적 문제다. 당사자들인 하청노동자들이 아직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 실상을 제대로 짐작키 어렵다. 이 거대한 폭력에 우리사회가 함께 맞서지 않는다면, 줄잡아 13만 명에 이르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삶은 적자생존의 비정한 세태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하청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갖고 권리 찾기에 나설 수 있도록, 조선소 안팎에서 이들을 응원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도드라져야 한다. 공장 안에서는 정규직노조가, 밖에서는 시민사회가 정부와 기업들의 폭력을 멈추고 희망을 길어 올리는 여정에 다 같이 동행했으면 좋겠다.

오는 10월 29일 거제에서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이 열릴 예정이다. 어릴 적 갖고 놀았던 레고 장난감에도 나만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듯, 망망대해를 누비는 수많은 배에도 그 배를 지은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볼 때가 왔다!


덧붙임

임용현 님은 사회변혁노동자당 조직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