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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단어장] 자기결정권

자의적 기준의 횡포

A: 표정이 왜 그래?
B: 택시에서 한 대화가 우울해서

A: 또 뭔 소리 들었어?
B: 내가 급하다고 해서 자기가 방금 신호위반 했다는 거야?

A: 그래서?
B: 나 운전할 줄 몰라서 신호체계 잘 모른다고 했지. 급하긴 하지만 신호위반 해달라는 말은 아니었다고 했지. 급하단 말 안할 테니 조심해서 가달라고.

A: 그랬더니?
B: 남편이 운전할 때 옆에서 본 건 있을 거 아니냐고 하더라구.

A: 아항, 그래서 남편 없다고 했더니 왜 또 결혼 안했냐 어쩌구 저쩌구 소리를 들었구나?
B: 그래. 또 우울한 건 그 때 라디오에서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자꾸 나오잖아.

A: 그래. 요즘 연일 터져 나오고 있는데 들을 때마다 정말 끔찍하고 슬퍼.
B: 그러니까 택시 기사가 “계모들이 문제”라고 핏대를 올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동학대의 대부분은 사실 친부모가정에서 벌어진다고’ 했더니 되게 기분나빠하더라.

A: 여성이나 학대받는 아동이나 사람대접 받기 참 힘들지.
B: 폭력이나 살해를 당한 여성을 ‘OO녀’로 보도하는 걸 볼 때마다 몸서리가 쳐져.

A: 그러면서 신고강화를 긴급대책이라고 부산을 떨어대지. 여성이나 아동이나 평소 ‘발언’을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부당한 일이나 폭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건데, 평소에는 입을 막아놓다가 ‘특정한 상황에서만 신고하라’고 하면 그게 되겠어?
B: 여성, 아동 말고 청소년, 장애인 등은 어떻고. 평소엔 권리 능력이 없는 사람 취급받다가 폭력과 차별의 피해자가 되면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대상이 되지.

A: 지못미가 못되는 경우엔, 폭력의 피해자라 하더라도 싸가지가 없거나 평소 행실이 불량해서 표적이 됐다는 비난을 들어야 해.
B: 영유아는 ‘지못미’고 청소년 체벌은 훈육이라지. 같은 가해자라도 누구는 ‘괴물’소리를 듣고 누구는 ‘오죽했으면 팼겠느냐’는 이해를 받지.

A: 그런 면에서 안전은 평등하지 않은 것 같아. 자기네가 세상의 기준을 만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자기네는 조심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약자더러 조심하라고 만드는 게 안전의 기준인 거 같아.
B: 그런 기준에 맞춰 살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능력 평가?

A: 자기결정권은 사실 자유의 다른 말이잖아. 자율, 독립, 자기 삶의 주권자 등.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 아냐?
B: 그럼. 그러니까 뿌리도 같은 거지. 인간의 존엄성 말야.

A: 그래. 평등한 존엄성에서 도출한 게 자유란 가치지.
B: 근데. 왜 자꾸 능력에서 그걸 뽑아내려 하지? 자꾸 평가하려 들고 말이야.

A: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진다, 권리행사 능력이 없는 이에게 권리는 위험한 장난감이다 등 등
B: 자기결정권은 누구든 ‘자기’가 있는 ‘사람’으로 존재를 인정받는 것, ‘자기’로서의 결정을 존중받는 건데.

A: 존중에 앞서 평가를 내세우는 이들부터 정말 평가해 보고 싶다.
B: 능력이 있는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할 권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거야?

A: 그게 자기네에게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결정권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시’하기 위해서 쓰일 때가 더 많은 것 같아
B: 사실, 자기결정권은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와 결정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로서 주장돼 온 건데, 평가를 즐기는 세력들에 의해 거꾸로 선 것 같아.

A: 누구나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존중받을 권리인데 ‘보호자의 소유물인 아동’, ‘의존하는 장애인’ 식으로 말이야.
B: 이 사회에선 개인으로 존재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게 권력이야 권력!

A: 자기네는 의존 없이 전적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내는 것처럼 말이야.
B: 사실 의존은 인간의 보편성인데 말이야. 왜 어떤 의존은 괜찮고 어떤 의존은 자기 삶의 통제권을 뺏어도 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 거지?

부당한 질문

A: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일단 질문을 잘못 던지는 것 같아. 뭘 해보기도 전에 ‘니가 그걸 어떻게?’라고 의욕을 먼저 가져가버리고 시도 자체를 가로막지.
B: ‘미래의 꿈나무가 그래도 되겠어?’ ‘아기를 품어야 할 몸을 그렇게 다뤄도 돼?’, 왜 이런 식으로 자기네 기획속의 소품이나 장비로 이용하는 거지?

A: ‘네가 자유를 가지면 일탈밖에 더하겠어?’ 이런 식으로 자유를 남용이나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건 어떻고.
B: ‘자기결정권? 네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거지? 그럼 지원도 필요 없겠네?’ 이런 말도 자주 하잖아.

A: 부당한 간섭과 지배를 거부한다는 거지, 마땅한 관심‧교류‧지원에 대한 거부가 아니잖아. 근데 자기결정권을 요구하면 이걸 죄다 끊을 듯이 말하는 건 사실, 협박 아냐?
B: 사실은 의문문을 가장한 명령문이지. ‘애비, 애비! 자기결정권 저리 치워. 위험해. 멀리해’ 이런 명령문.

A: 누구에게나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 자기를 형성할 권리가 있어. 자기 삶을 이런 저런 것으로 조립할 권리가 있는 거지. 레고를 조립할 권리가 있다는 건데, 넌 조립할 능력이 없으니 만들어준 것만 갖고 놀라고 하는 거지.

배타적 고립이 아닌 관계

B: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건 ‘그래, 네 맘대로 해’란 팔짱낀 자세가 아니야.
뭘 입을까, 뭘 먹을까, 뭘 읽을까, 누굴 사귈까, 어떤 정당을 지지할까? 이런 걸 얼마든지 서로 물어볼 수 있잖아.

A: 근데 그런 걸 물을 때 ‘이게 몸에 좋으니까 이것만 먹어, 이것만 읽어, 그런 관계는 안 돼, 이것만 믿어’ 이런 식의 명령이나 지시를 바라는 게 아니거든.
B: 자신들의 이익과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 삶의 결정권을 도둑질해서 대신 행사하려 들지. 지배의 철회를 바라는 건데 왜 영향과 지원까지 거둬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지 몰라.

A: 그치. 지배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거지, 영향을 일체 받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데.
B: 자기결정권은 구성원 간에, 개인과 집단 간에, 이런저런 서비스의 제공자와 수령자간에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관한 것이지 배타적 고립을 뜻하는 게 아니야.

A: 충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어떤 결론을 내기까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나 자신의 결정이든 공동체의 결정이든 납득이 될 수 있지. 또 그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고.
B: 맞아. 자기결정권은 독단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권리의 지지대 속에서 행사될 수 있는 거지.

A: 서로를 평등하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우린 각자의 자율성이란 걸 가질 수 있어. 또 자율성을 가져야 타인의 존재도 느낄 수 있고 타인과 교류할 수 있어.
B: 자기라는 내부가 있어야 자기 외부를 보고 관여할 수 있지. 안과 밖의 경계는 늘 흔들리고 모호하지만, 자율성을 존중 못 받는 건 벌거벗고 창문에 서 있는 느낌 같을 거야.

A: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건 누굴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아니야. 당장 누군가를 도와야 할 의무를 저버리는 핑계가 될 수는 없어.
가령 턱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휠체어 이용자가 있을 때, 무턱대고 밀어대는 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냐?’ ‘내가 어떻게 하면 되냐?’ 물어봐야 하겠지. 하지만 만취해서 도로에 드러누운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당장 끌어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지. 이런 상황의 차이가 있는데, 모든 상황에서 자기결정권을 명확히 평가하고 판정해 줄 공식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 도매금으로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고 치부될 수 있는 사람이나 상황은 없어.
B: 우리에겐 다만 평등한 존엄성에서 도출한 자유에 대한 존중이란 원칙이 있을 뿐이야. 원칙에 충실하려면 끊임없는 숙고와 소통이 필요해.

A: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맘에서 우러나왔더라도,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자기네가 좋다고 판단한 걸 일방적으로 떠먹여주는 걸 찬성할 수는 없어.

가능성의 확대

B: 왜 자기결정권을 ‘니 맘대로 해’로 받아들이는 걸까? 선택의 자유와 단순하게 같은 걸로 보는 걸까? 선택의 자유란 말이 얼마나 많은 부자유를 감추고 있는데.

A: 누구의 무엇을 자유의 제약과 박탈로 보느냐에 감각의 격차가 있어. 자기에겐 당연한 걸 남에겐 ‘네가 그건 해서 뭐하게?’라고 보는 격차 말이야.
B: 유형‧무형의 자원의 범위 내에서 우리 자기결정권을 제한 당하면서 살잖아. 가령 학령기인데도 교육에 접근할 수 없는 장애인이 있어. 학비가 없을 수도 있고, 편의시설 미비로 이동능력이 제한받아 학교에 못갈 수도 있어. 또 장애인 학교를 짓는 것을 막는 지역여론이나 예산 편성을 안 하는 정책 때문에도 그럴 수 있어. 이럴 때 자기결정권을 ‘자율적이라며? 알아서 스스로 해야지’라고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게 말이 될까? 이런 자원의 결여를 채워서 교육권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만들 공동의 의무가 있잖아.

A: 아까 자기결정권을 누구에게나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 자기를 형성할 권리라고 했잖아. 그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상호 지원하고 지지할 의무가 있는 거고.
B: 근데 그 가능성을 개인의 능력에 떠넘기는 건 자기결정권에 대한 오해고 무시가 아닐까?
자기결정권은 그 누구도, 아무것도 간섭 말라는 배타성이 아니거든.

A: 자기결정권은 네 말처럼, 선택의 자유와 같은 말이 아니야. 수 십 가지 중의 아이스크림 중에 고를 자유가 아니라 ‘너 같은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왜 먹어?’란 부당한 질문을 없애는 것,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돈은 있어?’란 말이 안 나오게 공공의 자원을 확충하는 게 필요해.
B: 근데, 난 결정할 때마다 결과가 무서워. 우리 실수 많이 하잖아?

A: 사실, 늘 하는 게 실수지. 그래도 우린 늘 실수를 무릅쓰고 살잖아. 자기결정권을 행사해 내린 결정이 최선이라서 지지하는 건 아니야.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거야.
B: 그러게. 늘 쿠사리 먹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나이고, 내 모습이지. 변화를 바라긴 하진 말이야.

A: 최선이 아니어도 최선이 못되더라도 우리 삶에는 무릅쓸 수 있는 뭔가가 있어. 그게 아무리 불투명하고 위험해보여도 타의로 봉쇄할 수 없는 무엇 말이야. 아무리 선한 가치와 큰 이익이 옆에 있다 해도 그것과 거래하자고 할 수 없는 것, 그게 우리의 자유고 자기결정권 아닐까?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