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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의 정치학- ‘복면금지법’의 문제점

11월 24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특히 복면시위 못 하도록 해야 합니다. IS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발언하였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나선 시민들을 복면을 쓰고 인질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테러리스트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받아 새누리당은 곧장 복면금지법이라는 전대미문의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집회를 하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기본에서 그릇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 이면에는 아주 사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발화로 일종의 정치적 폭력 내지는 정치테러에 다름 아니다.

복면금지법의 정치학

첫째, 이 말은 13만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외치는 함성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죄악으로 왜곡해 버린다. 민중총궐기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개악, 경제실패 및 민생고 가중, 농업정책 실패 등 현 정권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계급화된 정책을 제어하기 위한 정책비판형의 시위였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처럼 체제방어에 매달려 발본색원식의 진압개념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정부라면 그 비판을 수렴하고 집회참가자들을 설득하는 형태로 집회시위 관리전략을 펼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 정권은 계속하여 강경진압 일변도의 대응으로 시민들의 입과 귀와 눈을 가리려고 한다.
여기서 IS의 비유는 의미를 가진다. 정책비판적 시민들을 불법·폭력으로 내몰기 위해서는 아주 일부가 벌이는 폭력적 충돌양상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부분의 집회참가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권력 편향적인 언론만으로는 가릴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부는 IS의 비유를 통해 이 일부의 폭력성을 보다 부각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집회=복면=IS=테러’라는 충격요법적인 의미연상 기제를 동원하면서 마치 민중총궐기대회의 전 과정이 피 튀기는 폭력으로 점철된 듯한 이미지를 조성하고 또 유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폭력적 대응전략이 향후의 정국운영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을 정부가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민중총궐기대회를 불법·폭력적인 집회로 묘사하고 그것에 대한 오도된 환영을 야기함으로써 정부와 여당은 내년 총선까지의 정국을 공안정국으로 몰아갈 수 있게 된다.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의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는 이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등의 너무도 당연한 주장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둘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국민들에게 막연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 정부의 정책 실패로 야기된 위기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민중총궐기가 공중파나 보수언론에 의해 폭력과 충돌의 장면들만으로 전파되고 이런 거짓 영상을 통해 국민 모두는 우리의 질서가 저렇듯 쉽사리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심을 갖게 된다. 여기에 복면 쓰고 인질을 참수하는 IS의 동영상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국민들은 이 공포를 현실의 구체적 위험으로 인지하게끔 강요당한다.
국제사회를 요동치게 만드는 테러방지법의 담론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냉전체제의 대체물이다. 9·11테러는 동서진영의 충돌을 문명의 충돌로 대체하는, 그래서 냉전체제에 기반한 통치술이 또 다른 숙주를 찾는 과정에서 결정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반테러체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공안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실제 그동안 냉전체제의 약화로 인해 ‘공안’세력들의 존재기반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반테러의 체제는 이러한 체제 공백을 메꾸어내며 ‘신공안’체제를 구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기를 마련한다.
민중총궐기의 소위 ‘폭력성’이 ‘테러’가 되는 억지스러운 당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실제 대통령은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시민들을 IS에다 ‘비유’한 것이 아니라, 그 시민들 자체가 IS라고 ‘간주’하고 있다. 과거의 공안체제에서 북한이 수행하였던 역할을 부여하여 그 시민들에게 이 신공안체제를 지탱하는 ‘필요’악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반공국가체제에 부유하였던 “북한의 위협”이라는 유령은 이 반테러체제에 와서는 바로 이 민중들, 광화문광장의 차벽을 돌파하고자 몸을 던지는 저 시위자들의 ‘테러적 폭력’으로 대체된다. 전 세계의 법체제와는 정반대로 집회시위의 관리를 체제유지를 위한 ‘공안’ 개념으로 포섭하고 있는 우리의 현 상태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집회·시위=테러’의 도식은 너무도 유용하다. 언제든지 이를 통제하고 제거(혹은 예방)하기 위한 강력하고도 전방위적인 국가감시와 국가통제시스템이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면금지법의 헌법학

이 복면금지법이라는 담론은 너무도 단순한 우리의 사고체계를 겨냥한다. ‘그냥 집회만 하면 되지 웬 복면?’, ‘뭔가 감출 것이 있으니 얼굴을 가리는 것이겠지’라는 단순한 인식에 복면 쓴 은행 강도나 복면 쓴 IS의 칼잡이를 연결하고는 바로 그런 위험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복면금지법을 두고 있다는 식의 허위정보들을 흘려댄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이런 단순한 인식을 역행한다.
실제 외국의 복면방지법은 부르카금지법(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이었거나 신나치(독일, 오스트리아) 혹은 KKK단의 횡포(미국)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뉴욕주의 복면방지법은 본래 인디언 복장을 하고 지주들을 습격한 소작농 또는 임차인의 폭력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거기서 말하는 복면은 사회통합을 위한 것이거나 신나치주의 광신자들로부터 평화적 집회를 보호하거나 혹은 인종주의자들의 혐오범죄나 혐오표현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복면금지법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게 통제된다. 복면을 착용하였다는 사실만으로 법집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예만 봐도 그렇다. 범죄를 저지를 의도 하에서 복면을 착용한 경우에, 그리고 복면을 착용한 자가 그 범죄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었을 때만 경찰력을 발동할 수 있다. 역으로 복면을 착용한 자가 범죄를 저지를 의도를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 한 경찰력은 발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합헌판결을 받은 법은 주로 이렇게 엄격히 적용되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규정된(narrowly tailored) 법률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어디를 보아도 이런 외국의 입법례를 참조하였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헌법 제21조 제1항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는 ‘평화적’인 것에 한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물리력도 없는 순진무구의 집회만이 헌법 제21조의 보호대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집회는 다중의 위력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펼치는 집단행위인 만큼 당연히 물리력을 수반한다. 그리고 그 물리력으로 인한 비집회자의 불편은 논리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헌법 제21조를 통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은, 다른 사람들의 집회 과정에서 파생되는 제반의 불편함들-시끄러움, 성가심, 교통체증, 영업방해, 생각의 다름에서 나오는 불쾌함 등은 ‘관용’의 맥락에서 인내하며 수용할 것임을 우리 모두가 더불어 약속한 것이 된다. 그것은 헌법의 이름으로 선포된 우리 모두의 굳은 약속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약속은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정부라든가 혹은 그 일원인 경찰에 대한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이 된다.
하지만 경찰은 이런 명령을 정면에서 위반한다. 우리 모두가 감내하겠다고 다짐한 그 사소한 불편함을 이유로 경찰은 집회를 금지하고 시위를 불법화한다. 그리고 헌법상의 기본권을 행사하고 나선 집회참가자들을 범법자로 몰아 구타하고 감금하며 체포하고 처벌한다. 집회현장에서 남용되고 있는 채증은 그래서 문제적인 것이 된다. 독일에서의 채증은 구체적이고 명백한 범법행위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개시된다. 하지만 우리의 집회현장에서 채증은 상시적이고 무조건적이다. 여기에 그 채증의 결과는 끊임없는 괴롭힘으로 비화된다. 마구잡이식 소환과 소환불응 시 발부되는 체포영장의 횡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폭력이 되어 우리의 생활을 훼손한다. 여기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 제21조는커녕 그나마 존재하는 경찰관직무집행법이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무력하다 못해 그 존재감조차 없어진다.
불법적으로 공권력이 남용되는 현실에서 그나마 집회참가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채증의 피사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일종의 정당방위로서 복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집회-특히 대규모의 집회-가 이루어지면 무조건 불법으로 규정하며 해산을 명하고, 제3경비선이라고 지칭되는 광화문 사거리만큼은 그 어떠한 집회에도 공간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현재의 경찰 행태에서는, 복면착용은 어쩌면 우리의 당연한 헌법적 권리를 찾기 위한 가장 사소한 저항-즉, 시민불복종-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복면의 정치학: Against the Grain!

정부가 복면 쓴 시위참여자들을 IS에 비유하고 국회의원들은 그에 편승하여 복면금지법안을 제출하는 등의 호들갑을 빗대어 2차 민중총궐기에 모두가 복면을 착용하고 참가하자는 제안들이 잇달아 나왔다. 아주 유쾌한 반란의 한 장면이다. 마치 쇼핑몰 게릴라들의 장난이 자본의 스펙터클을 우롱하듯, 집회현장에서의 이런저런 복면과 그 복면들이 내뿜는 다양한 언어들은 강경일변도를 향하는 이 정부의 고집불통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의 장을 이룰 것이다.
정부가 사용하는 통치술은 보수언론과 공중파방송, 종편 등에 의존한 선제공격과 검찰과 경찰을 앞세운 무자비한 물리력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권력을 통해 입 다문 다수의 침묵을 유도하며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우민화시키는 전략이 그 연장선상에서 구성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정국은 권위주의 체제까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기억까지도 말살시키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이 복면의 정치학은 의미를 가진다. - Against the Grain! 결을 거스르기. 그래서 그 권력의 절대성을 무너뜨리기. 우리의 존재를 그들에게 알리기. 우리의 분노에 그들이 겁먹게 만들기. 그리고 주권자 되기. - 우리가 주권자임은 저항을 통해서 실천된다.
덧붙임

한상희 님은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