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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그들만의 운동장’을 바라보는 씁쓸한 시선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내년 4월 총선거를 앞두고 총선후보 국민공천제, 선거구 개편 논의가 뜨겁다. 여러 이슈가 산적해 있는 한국사회에서 무엇보다 정치는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만들기 위한 공통의 기반을 만드는데 그 역할이 있다. 그럼에도 지금 논의의 흐름을 보면 본질은 사라진 채 보수정치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국민의 입장에서 때로는 무관심한 마음으로 때로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지난 9월 28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잠정 합의하였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휴대폰 이용자의 개인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임의로 번호를 부여하여 경선후보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해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제도다. 언론들은 '안심번호 국민공천제'가 총재나 당대표에게 부여되어 생겨난 정당 정치의 문제점-낙하산, 나눠먹기, 전략공천, 하향식-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국민공천제는 당대표나 특정 계파가 공천권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유권자가 직접 공직후보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제도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게다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선거구 구획을 둘러싸고 더 늘려도 모자란 비례대표 수를 오히려 줄이기 위한 공작까지 감행하고 있다.

정당을 비당원들에게 개방해서 공직선거 후보자를 선출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보면 명분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정당 내 현실 정치 속내는 손익계산에 따라 찬성과 반대라는 극명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대체로 정당 안에서 조직력이 열세인 쪽은 찬성 입장을, 조직력이 뒷받침되고 있는 쪽은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가장 기득권을 많이 갖고 있는 청와대가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며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압박하고 나섰다. 합의 이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각각 저마다의 후폭풍을 감당해야 했다. 현재로썬 두 대표의 합의는 ‘잠정’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가운데 우리에겐 다시금 ‘현실 정치’의 문제를 곱씹어봐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정치란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정당이 민주주의에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자유롭게 정당을 만들어 활동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과정, 단체나 정당을 만들 수 있는 물리적인 조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정치적 권리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제대로 누리고 있을까?

진보정당의 한 축이었던 통합진보당의 색깔이 북의 주의·주장이 같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통합진보당을 비롯하여 당원들에게 가해진 유무형의 공격은 진보정당을 사망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은 이제 ‘북의 주의·주장과 같은’ 정치적인 견해를 갖고서는 제도권 정당으로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이것뿐이겠는가?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만 유일하게 사전선거운동이 금지되어 있다. 한국 공직선거법은 선거기간 동안 ‘국민의 입도 묶고, 손발도 묶는’ 기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합법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대통령 선거의 경우 23일, 나머지 선거(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 지방의원 선거)의 경우 14일에 불과하다. 그전에 하는 선거운동은 모두 사전선거운동으로 규정되어 처벌된다. 몇 년에 한 번씩 ‘조용히 선거만 하라’는 박제화된 정치가 현재 한국의 현주소이다. 게다가 선거라는 정치 행위는 만19세 이상 ‘성인’만 할 수 있는, 연령에 따른 제한을 두고 있는 나라이다. 2015년 4월 총선을 향해 초침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지만, 저당 잡힌 정치적 권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 22일 세종시 총리공관에서 열린 황교안 국무총리와 출입기자들의 간담회 자리였다. 한 기자가 “남북관계에서 지뢰 도발 사건 같은 일이 있을 때 꼭 남남갈등이 있었는데, 이번엔 20~30대가 동조해서 남남갈등이 없었다. 이는 총리가 통합진보당을 없애서 그렇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황 총리는 “그런 분석 하시는 분 많다”며 “정당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황당한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 있다. (그런 논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죠”라고 동의하는 뜻을 표시했다.(한겨레신문 2015년 9월 23일자)

황교안 국무총리의 말은, 반대 세력이 없으니 사회적 합의가 빠른 시간 안에 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정당(통합진보당)에서 생산하는 황당한 논리에 동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불필요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우회 섞인 비판도 듬뿍 담겨있다. 다양한 정치세력의 힘겨루기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관한 정치의 과정을 불필요하거나 피로하다고 여긴다면 민주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국민공천제가 마치 공천권을 국민에게 부여하여 민주주의를 앞당길 것 같은 이미지를 주고 있지만, 양당 정치 체제를 견고하게 하는 ‘그들만의 운동장’을 만들려는 속셈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관계를 맺고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과정에 ‘한방’이란 것은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그야말로 정치화하는 과정으로 길고 지난하기 마련이다. 정치의 과정이 두터운 것을 바라지도 않지만 빈약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정당의 한쪽 날개가 꺾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다시 ‘시민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과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기를 고대한다.
덧붙임

최은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