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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거리는 사랑방] 우리의 ‘인권’은 옳은가 - 북이 던져준 고민

<편집인 주> 20주년을 맞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다시 변혁을 꿈꾸는 인권운동의 질문을 담아 책자를 발간했다. <인권오름>은 그 중 '도란거리다' 장에 실린 글의 일부를 몇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일상, 관계, 활동 속에서 어제의 고백이기도 하고 내일의 다짐이기도 한 사랑방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인권오름> 독자들에게도 든든한 기운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인권의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 발전 시기의 여러 인권선언은 신흥세력인 부르주아지들의 재산과 신체를 왕이나 귀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근거로서 ‘인권’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노동자, 농민, 여성들은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현대의 인권규약들이 만들어질 때에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세력 간의 치열한 견제와 타협을 거쳐 그 내용이 선별되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인권’이란, 우리가 얼핏 생각하듯 누구나 평등하게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이라기보다는, 아주 구체적인 역사를 가진 특수한 개념이었던 거죠.

인권운동을 하며 부딪히는 현실

인권운동을 하면서 부딪히는 현실들은, 이런 인권의 역사들이 그저 옛날 얘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2009년 1월의 용산참사 이후, 돌아가신 철거민 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나 경찰에 대한 비판들은 많이 있었지만, 용산 재개발의 문제점이나 농성의 정당성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땅, 내 재산을 침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한편에 남아있기 때문일 텐데, 현대의 ‘인권’ 역시 이런 부분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유재산의 보호 역시 현대 인권 목록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용산 개발 자체가 무산된 지금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인권’에서 생명의 존엄성보다 재산권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닐지요.

그렇다면, ‘자본주의 인권’이라고도 할 만한 지금의 ‘인권’ 개념이 사유재산과 화폐 관계로 사회 구성 원리를 설명할 수 없는 곳- 이를테면 북 -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진 인권목록들, 주로는 세계인권선언과 자유권․사회권 규약에 담겨있는 이 ‘인권’의 항목들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방의 북인권 대응 활동은 저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던 활동이었습니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인권운동사랑방은 북인권 대응 활동을 하였습니다. UN의 대북인권결의안과 북한인권 특별보고관 제도의 신설, 미국의 북한인권법안 등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던 사랑방의 북인권 활동은 한반도인권회의, 북인권모니터팀, 한반도인권뉴스레터 등 여러 축으로 활동이 진행되었죠. 2009년에는 천주교인권위원회, 평화네트워크와 함께 북의 UPR(유엔의 국가별 정기적 인권 상황 검토 제도) 시기에 NGO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북인권 대응 활동을 하며

사실, 북인권 대응 활동은 쉽지 않은 활동이었습니다. 많은 어려움들 중 한 가지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인권 목록을 다른 체제의 사회에 적용하기 힘들었던 점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인권의 한계 지점을 고민해야 했던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권리는 어떻게 북 인민들의 권리로 해석되어야 할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적인 임금노동의 관계 속에서 자본가-고용주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하는 것인데, 사회 원리 상 자본가-고용주가 없는 북의 노동자들은 무엇에 대항하게 되는지, 어떤 형태의 권리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권리 역시 식량 배급제도 아래에서 지역의 식량 사정에 따라 신고/허가 등의 제한이 있을 수 있음을 감안했을 때, 무엇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큰 진전은 없었지만, 사랑방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사회주의 인권론’이라는 주제로 풀어보려고 고민을 하기도 했었죠.

만약 ‘인권’의 구체적인 역사가 도달한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 인권’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북의 입장에서 “우리에겐 인권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화를 내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권이 사회와 시대마다 다르기만 할 뿐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다운 삶의 한계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하는 것이 또 다른 고민입니다. 인권이란 그저 각각의 사회가 정해준 한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애완동물에 불과한 것일까 하는 것인데,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그 한계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이 무시무시하게 살아있는 한국에서는 북에 대해 어디까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지가 사상․표현의 자유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과 남북긴장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본 한 사진전의 제목이 ‘사는 거이 뭐 다 똑같디요’였습니다. 북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들을 전시한 것이었는데, 평범한 일상들과 함께 그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실은 사람 사는 것 다 똑같을 텐데, 그 똑같은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울까요. 부디 언젠가는,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인간은 얼마나 평등하게 행복할 수 있을지, 이런 인권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이 척척 나와서, 북이든 남이든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그전까지는 … 인권운동의 험난한 길이 계속되겠지만요. (웃음)
덧붙임

아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돋움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