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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지선의 인권이야기] 글로만 배운 전문가들의 역할

밀양송전탑 전문가협의체를 보면서

최근 여러 매체에서도 소개가 되었던 밀양송전탑문제. 8년 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온 주민들의 우군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는 듯 보인다. ‘고립감이 제일 무서웠다’는 어느 주민의 말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을까 많은 위안이 된다. 특히 최근 인권단체들이 발표한 주민들의 인권침해실태조사결과는 사회적으로도 큰 울림을 주었다. 그동안 한전과 용역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너무 분하고 답답해서 제대로 말도 못했던 주민들의 경험이 활자가 되어 수많은 언론에 소개되었다. 밀양에 탈핵희망버스를 타고, 농활대로 참여하면서 현장에서 주민들을 만났던 사람들도 놀랄 만큼, 인권침해는 심각했고, 특히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은 참전 미군보다 심한 정도로, 주민들 절반 이상이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각한 상태였다. 현장의 목소리를 담기위해 노력하는 인권전문가들의 태도와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 보고서였다.

반면, 국회중재로 지난 40일 동안 운영되었던 밀양전문가협의체에 참석한 대다수 위원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밀양전문가협의체는 주민대책위 측 추천 3인, 한전추천 3인, 여야 추천 각 1인, 위원장 등 9인으로 구성되었고, 그 동안 대안으로 거론되던 기존노선 용량을 증설하는 것, 우회노선을 검토하는 것, 지중화(地中化)하는 방안 등의 실효성을 따져보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0일간의 전문가협의체는 파행으로 끝이 났다.

7월 9일, 주민대책위 측과 야당추천 협의체위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 국회에 제출된 보고서가 한전과 여당 추천 위원들의 보고서가 대필, 베끼기 의혹이 있을 뿐 아니라 협의체 안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된 사항을 작성했기 때문에 국회가 이 보고서를 가지고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국회의 권한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대필, 베끼기 의혹은 7월 초, 개별 위원들이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면서 불거졌다. 문승일 위원은 새로운 송전탑건설이 아니라 현재 사용하는 노선의 용량 증대만으로 송전이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시뮬레이션 자료를 보고서에 수록했는데, 그동안 한전과 전력거래소가 했던 표, 그림과 똑같이 일치했다. 서울대교수인 문승일위원은 “전력거래소 자료를 신뢰했기 때문”이라며 그대로 베껴온 것을 인정했으나 그것이 뭐냐 문제냐는 태도였다. 밀양전문가협의체에 들어오기 전에는 밀양송전탑 문제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던 장연수위원(동국대교수)의 보고서는 파일정보를 확인한 결과 2012년 10월에 작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전 측 제공파일을 그냥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40일 동안 충분한 대안을 검토하기에 짧은 시간일 수 있지만, 현장조사일정에서 불과 20여 분만 실제공사현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결정할 만큼 ‘성의’가 없었다. 수많은 주민들의 생사가 걸려있는 게 아니라 글로 배운 지식을 그저 다른 보고서에 옮기는 많은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이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무얼 기대할 수 있을지

전문가들의 비양심적이거나,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은 비단 밀양전문가협의체 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 전문가라는 학자들은 본인들의 결정과 행동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 듯하다. 최근 2014년도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과정에서도, 최저임금위원회에 속한 공익위원들의 역할은 너무 소극적이고 미비했다. 공익위원 9명은 모두 유수대학의 교수들이었는데, 과연 이들이 얼마나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고 있는지 그 파급력을 느끼고 있을지 답답할 뿐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때 전문가들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심했다. 핵심 국정과제였던 4대강정비사업 추진사업에 여러 환경학자들이 참여하면서 한 역할은 변신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4대강추진사업본부 환경부본부장이었던 차윤정 씨는 ‘신갈나무투쟁기’ 등 여러 생태관련 서적을 쓴 학자로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무의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평가받으면서 많은 감동과 영감을 주었던 학자였다. 그런데 그가 4대강찬성론자가 되어 오히려 반대론자들을 향해 ‘반대를 향한 반대’라고 왜곡하면서 더 많은 상처를 주었다.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들이 만든 ‘친4대강 인명사전’에 따르면 차 전 부본부장은 2010년 5월부터 2012년 말까지 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4대강 찬동 발언만 41회로, 대표적인 4대강 찬동인사인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37회)과 박석순 전 환경과학원장 (32회) 보다 많았다. 그가 전직 생태학자였던 것을 정부에서 적극 활용한 것이다. 그는 자신 있게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집중호우로 4대강 사업의 실효성이 밝혀졌다”며 “주요 하천에 대한 준설을 통해 홍수예방 효과가 컸으며 내년 봄에는 수질개선 상황이 확인될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에서는 여름마다 ‘녹조 라떼’현상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교육의 전환에 관한 포럼에 참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배우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과연 지식을 글로만 배우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더 무얼 기대할 수 있을까.

덧붙임

고이지선 님은 녹색당 전국사무처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