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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신념의 실천을 이어가는

형수 님을 만났어요

지난 9월 21일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참여하러 갔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자원 활동을 하면서 사랑방과 인연을 맺은 형수 님이 무대에서 사회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지금은 사랑방 후원인이라는 이야기에 비상 행동에 참여한 다른 사랑방 친구들이 형수 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꼭 인터뷰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내친김에 연락해서 형수 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여쭤봤습니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형수입니다. 사랑방에서는 2011년에 자원 활동도 했었어요.

 

◇ 사랑방과 인연이 오래되었네요. 어떤 계기로 사랑방을 알게 되셨나요?

인터넷 검색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집, 학교, 교회만 다니면서 사회활동 같은 데 관심을 두지 못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너무 갇혀 지내는 것 같기도 하고 좀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예전부터 인권에 관심이 조금 있기도 했고요. 중학생 때 TV를 보는데 ‘아시아아시아’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그 프로그램에서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나오는데 한국어 교본에 ‘때리지 마세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이런 말이 쓰여 있다는 거예요. 그 때 충격을 받으면서 막연히 인권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남았거든요. 그래서 인권단체 이렇게 막연히 검색하다가 사랑방 문을 두드리게 되었죠. 만약에 그때 다른 단체가 나왔다면 다른 단체를 갔을지도 몰라요. (웃음)

 

◇ 귀한 인연이었네요. 자원 활동가로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사회권팀에서 청소노동자 권리 찾기 캠페인을 같이 했어요. 근데 그 때 사실 몇 번 못 나갔어요. 캠페인 기획 회의 몇 번 가고, 대학로 인권영화제 할 때 선전전 같이하고, 이대 청소노동자분들 만나서 인터뷰도 같이하다가 2011년 하반기부터 바빠지면서 많이 못 나갔거든요. 그리고 사랑방을 미리 알고 자원 활동을 한 게 아니라 들어가고 나서 나중에 사랑방을 더 알게 되기도 했죠. 어떤 활동가분이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박래군 활동가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이 용산참사 이후 출소해서 술 마시는 자리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저는 박래군 활동가를 몰랐었거든요. 그래서 뒤늦게 찾아보게 되기도 하고. 그것 말고도 사랑방의 창립 배경이나 이런 것들도 후에 찾아보면서 인상에 남았어요.

 

◇ 지금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활동하시잖아요. 인권운동부터 시작한 사회 운동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지금의 활동으로 이어지셨나요?

학교도 마치면서 사회 운동에 관심이 환경이나 생태 쪽으로 분명해진 거 같아요. 귀농이나 귀촌도 염두에 두게 되고요. 대학교 다닐 때 생태인류학이라는 수업을 들었거든요. 그때 생태적 한계라는 개념을 배우면서 인간이 그 한계를 파괴하며 자신의 존재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제 신앙과도 연결이 되더라고요. 성경에서 신과 인간의 단절, 인간과 인간의 단절, 인간과 자연의 단절을 죄라고 말하거든요. 그리고 그 단절을 회복하는 것이 평화고요. 그러면서 진로를 고민하다가 녹색당에서도 활동했고 예비군 병역거부도 하게 되었어요.

 

◇ 녹색당 활동은 얼마나 하셨어요?

3년 정도 활동했어요. 그 기간 조직 활동, 회계, 정책 이런저런 활동을 전부 했어요. 신생 정당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은 재미있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한계가 오더라고요.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제가 언론 대응을 담당했거든요. 그 일도 당에 사람이 없으니까 맡게 된 일이었어요. 그런데 선거 시작과 동시에 후보 벽보가 찢겨나간 거예요. 언론 대응으로 일이 쏟아졌죠. 제가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고, 기자들 상대로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역할이 무겁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떻게든 선거는 정신없이 마쳤는데, 선거 이후에도 후보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았어요. 정말 선거 직후에 후보 인터뷰만 100번은 했을걸요. 언론 담당이 이런 부분을 중심을 잡고 조율을 잡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이제 3년을 활동했는데 3년 후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중심을 잡고 가고 싶은데 이런 활동은 누군가에게 배우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래서 일단 녹색당 활동을 정리하고 잠시 쉬다가 지금의 에너지기후정책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했죠.

 

◇ 형수 님도 참 다양한 역사를 거치셨네요. 아까 예비군 병역거부도 했다고 이야기해 주셨는데 어떻게 고민을 하시게 된 거에요?

시작은 교회 다니다가 성경 공부를 하면서였어요. 제가 선교단체 생활도 했었거든요. 그때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하셨던 선교사님이 예수쟁이들은 다 병역거부 해야 된다고 하시는 이야길 듣고 병역거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이후에 강정도 왔다 갔다 하고, 밀양 송전탑 문제도 보면서 국가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2014년에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을 지키는 교회에 다니는 어떤 분이 병역거부 선언을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왔어요. 그러고 나니까 강정, 밀양 등의 제 경험들이 재구성되기 시작했죠. 처음에 현역으로 군대에 갈 때 병역거부를 할까 고민도 했지만, 감옥에 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입대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겠다, 이렇게 도망치면 나는 거짓 인생을 산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예비군 병역거부를 해야겠다고 하고 안 간 거죠.

 

◇ 일단 예비군 훈련을 안 간 거예요?

네. 사실은 그냥 거부 선언을 하고 처벌받을 생각으로 있었거든요. 그러다 문득 처벌받을 때 받더라도 운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 생각하면서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의 문을 두드렸어요. 그랬더니 전쟁없는세상에서 그냥 처벌받지 말고 평화주의 신념을 어필하고, 항소도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셔서 2016년부터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에서 활동을 시작한 거죠.

 

◇ 그렇게 실행으로 옮기고 나니까 어때요? 걱정도 많았을 것 같은데.

저에게는 병역거부가 신앙과 평화주의 신념의 실천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기도 해요. 제가 군대를 안 갔던 게 아니잖아요. 거짓된 삶을 살았다는 불안감이 있어요. 더 부담이 있죠.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게 자기 증명의 과정이기도 해요.

물론 걱정도 있죠. 그런데 초반에는 힘들다는 감각도 덜했어요. 병역거부 선언을 하면 상황이 금방 정리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당시 재판에 들어갔더니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로 미루겠다고 했어요. 오히려 최근에 헌재 판결이 나오고 재판이 다시 시작되면서 힘들어졌죠. 지금 1심이 끝났는데 우호적이지 않은 판결을 보면서 아무래도 감옥에 가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기록을 남기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가려고요. 그래야 다음에 재판하시는 분들이 참고할 수 있고, 재판 과정에서 이야기들이 평화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니까요. 결론보다도 어떤 기록을 남기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솔직히 무섭긴 무서워요. 그래도 이게 더 나으니까.

 

◇ 근황에 관해서도 좀 여쭤볼게요. 활동가에서 연구원으로, 비슷하면서도 초점이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 새롭게 관심이 생기고 고민되는 것들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기술이 정치와 권력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공부해보고 싶어요. 에너지 전환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은 필요하기도 한데 쉽게 선(善)으로 이야기되거든요. 그런데 과연 그 기술이 인간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잖아요. 요즘 제일 듣기 싫은 게 ‘스마트 미터링’이라고 전력량을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기술 이름이에요. 서울시 같은 곳과 회의를 하다 보면 이 측정값을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로도 활용해서 독거노인들이 밥을 제대로 먹는지 확인할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에너지 복지라는 이름으로요. 그런데 이게 감시 아닌가 싶은 거죠. 기술이 실제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금은 시혜적으로, 기술 중심적으로 정책이 나오는 거죠. 이런 이야기 들으면 복잡한 마음이 들면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 지난 9월 21일 기후위기 비상행동 집회에서 사회도 보셨잖아요. 사회자로서 그날 집회는 어떠셨나요?

생각보다 많이 오셔서 놀랐어요. 기후위기 비상행동도 답답한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 위기에 대응하라고 외치는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잖아요. 또, 작년에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서 ‘지구온난화 1.5°C’ 보고서가 나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확실히 달라졌거든요. 그런데 한국 정부는 반응이 없어요. 물론 다른 나라도 답답한 면은 있지만, 한국 정부는 기후 위기라는 문제에 반응하는 시늉조차 안 하고 관심도 안 보이고 있거든요. 기후 위기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체감하게 되잖아요. 야외 노동자나 농민이나 이런 분들은 너무나도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있는데 한국사회의 전환은 요원한 상황에서 세계적인 추세에 올라타서라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보자는 마음으로 기획, 참여하게 된 거죠.

 

◇ 마지막으로 사랑방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랑방은 저에게 활동의 진입구 같은 곳이었거든요. 사랑방을 통해서 시야를 넓히고 많이 배웠죠. 사랑방 활동가들은 제가 사회활동에서 처음 만난 분들이라 고향 분들 같은 느낌도 들고 애정도 많이 갑니다. 저도 나름 비슷한 언저리에서 일하기에 때로는 힘들고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죠. 그래도 언제나 몸과 마음을 지키면서 활동을 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연대의 마음으로 열심히 후원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사랑방에 많이들 후원해주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