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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벅차게 들이대고 싶은 성소수자들의 요구

매 선거철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는 활동가가 많을 것이다. 성소수자 단체 연대체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서도 2007년 대선부터 선거에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좀 더 드러내기 위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진보정당에서 동성결혼이 ‘이색공약’으로 등장한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진보정당 내에서 활동하는 성소수자 그룹의 활동이 이어지고, 성소수자 단체들의 연대활동 속에서 적어도 진보정당의 성소수자 정책은 독자적인 정책의 꼴을 갖추어왔다. 성소수자 운동진영의 정책 요구안 또한 활동을 통해서 요구의 시급성과 정당성이 확인된 것을 중심으로 계속 업데이트 되었고 체계를 갖춰왔다.

그러나 선거 때 이것을 어떻게 후보에게 전달하고, 확인하고, 요구할지는 매번 고민이다. 선거 때의 공약이나 입장 표명으로는 진심을 확인하거나 실제로 추진할 의사가 있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는 크게 두 가지 활동을 기획했다. 첫 번째는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정책에 대한 필요성과 체감도 등을 간략하게나마 조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대선 후보들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입장과 정책을 묻는 것이었다.

아래는 지난달 29일에 위의 두 가지 활동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의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뽑은 요구안

커뮤니티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는 11월 6일부터 20일 동안 진행되었고 총 103명의 응답이 모였다. 일단, 10개 요구안 모두가 85%에서 93% 사이의 인지도를 보여 높은 관심의 대상임을 드러냈다. 가장 필요한 것으로 느끼는 요구안을 꼽는 질문에서는 차별금지법과 동성간 파트너십을 인정하는 법률 두 가지가 다른 요구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선택률을 보였다. 응답자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낀 정책으로 뽑은 순서에 따라 각 요구안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체적 차별 사유들이 적혀있는’ 국가인권기본법인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은 노무현 정권 때 추진됐으나 2007년 당시 재계와 보수 기독교 측의 간섭 하에 법무부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포함한 7개의 차별 사유를 제정안에서 삭제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했고, 결국 제정이 무산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제정하는 인권기본법으로서의 차별금지법이 없다는 지적이 UN 등으로부터 계속되고 있으나 여전히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특히 필요한 정책을 직접 쓸 수 있게 한 설문의 마지막 항목에 대한 답으로, 차별금지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혐오범죄나 차별적 언행에 대해 적극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2. 동성간 파트너십 법률 제정 또는 이와 관련된 민법 수정: ‘동성 결혼’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해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 간 결합을 사회적으로 인정할 필요성이 확인되고 있다.

3. 1인 가구나 동성 커플 등을 포함, 비혈연가구를 지원하는 주택 정책: 주택 마련 시 각종 혜택이 ‘자녀가 있는, 이성(異性) 결혼 가족’에게만 몰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1인 가구나 비혈연관계로 구성된 가구에 속하는 인구가 이미 상당 비율에 달하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므로 점점 필요성이 높아지는 정책이다.

4. 성소수자를 위한 고용관련법 수정 또는 제정: 동성 커플인 경우 가족수당을 포함한 여러 급여혜택을 받을 수 없다. 또한 업무와 상관없이 ‘남자다움’, ‘여성스러움’을 강요하고 혼인 여부가 평가기준이 되는 성차별적인 직장문화는 성소수자 노동자에게 평등한 기회와 대우가 보장되는 것을 방해한다. 직장 내에서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언행이 발생할 때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다.

5. 언론·방송을 위한 성소수자 인권 보도 가이드라인 마련: 몇 달 전 트랜스젠더 토크쇼 ‘XY그녀’는 혐오세력들의 공세로 1회만에 방송이 중단되고 말았다. 사회적 소수의 목소리를 전달해야할 의무가 있는 언론의 기본 기능조차 포기되며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시키는 혐오발언들이 하나의 ‘의견’으로서 받아들여지기까지 하는 현상은 심각한 문제다.


6. 의료서비스의 동등한 보장: 트랜스젠더와 HIV/AIDS 감염인은 병원에서 차별적으로 대우받는 일이 매우 많다. 동성 파트너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권한도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환자의 인권 존중을 위한 의료현장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또한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과정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어야 한다.

7. 행정·사법·입법기관, 교육기관, 군, 기업 등 사회 각 영역에서 성소수자 관련 교육 시행: 성소수자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여 기존의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고 성소수자 인권을 존중하도록 사회 제반 영역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설문 마지막 항목 주관식 응답에서도 현 제도권 성교육과정에 성소수자 관련 내용을 의무적으로 포함시켜야한다는 의견이 반복해서 나왔다.

8.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상담·신고·지원 체계 마련: 청소년 성소수자는 가정과 학교에서 부모나 교사들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며 또래집단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쉽다. 그러나 학교나 가정의 바깥에서 청소년 성소수자가 기초적인 도움을 얻거나 의지할만한 시설이나 체제는 전혀 없다. 주관식으로도 학교 안팎에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 핫라인, 쉼터 등의 설치가 제안됐다.

9.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별법 제정: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이 17대 국회에 제출됐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위험한 수술을 마쳐야만 하는 등의 지나치게 엄격한 성별변경 기준은 완화돼야 한다. 응답자가 직접 제안한 관련 정책으로는 트랜스젠더가 이용하기 편한 젠더 중립적인 화장실 설치, 주민등록번호제의 성별에 따른 번호 부여 방식 폐지가 요구됐다.

10. 병역법과 군형법에서 성소수자 차별 조항 폐지: 군형법 92조의 5, 계간 금지 조항에서 “계간”이란 단어는 비하적 표현이다. 군은 이 조항으로 합의한 성관계도 무조건 처벌할뿐 아니라 다른 시행규칙이나 지침들에서도 동성애를 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실로 많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군생활을 하고 있으나 특별관리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해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다.

이밖에도 비교적 많이 제안된 주관식 응답에는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인권센터가 필요하며, 특히 비수도권 거주자들을 위한 성소수자 문화 행사나 시설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상의 요구안들은 길게는 5년이 넘도록 성소수자 진영에서 주장해온 것들로서, 이미 이 요구들 모두가 앞서 말했듯 90%를 넘나드는 높은 비율로 인지되고 있다. 즉 성소수자들 사이에서 충분히 회자되고 기대되어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긴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오래 미뤄져온 요구들이 지금부터는 이뤄졌으면 한다.

정책적 검토없이 통념에 기댄 공허한 성소수자 인권정책

이제부터 각 후보에게 보낸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간략하게 분석하겠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을 제외하면 상당히 유사한 답변을 보이고 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여러 정당은 그간의 연대활동과 정당 내 활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 구축된 정책을 갖고 답변하고 있다. 그에 비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답변은 제1야당과 여당의 규모와 책임성에 비춰보았을 때 전반적으로 정책의 구체성이 없고, 질문의 취지조차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정책질의서에 대한 답변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즉 ‘정책’질의서에 대한 답변으로 보기에는 별 고민 없이 여론과 통념에 기댄 답변이 많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차별금지법과 군형법 92조 5, 동성결혼/파트너십에 대한 입장에서 드러난다.

차별금지법의 경우, 박근혜 후보는 이 법에 대한 요구가 ‘사회 일각’의 것이라고 했으나,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차별을 시정하는 국가인권기본법으로서의 차별금지법을 왜곡된 시각으로 대하는 ‘사회 일각’의 편에 선 답변이다. 한편 최근 박근혜 후보는 “동성애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동성애 합법화 법률은 반대한다”고 해서 실제로 보수기독교계에서 차별금지법을 동성애차별금지법으로 왜곡하고 공격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차별사유로 포함된 차별금지법을 추진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문재인 후보는 다양한 차별사유에 대한 금지를 최대한 담아내겠다고 답변했으나 노무현 정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며 보인 한계(차별사유를 임의로 삭제하는 등)에 대한 평가나 반성이 없었고 지난 5년간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책임감이 떨어지는 답변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군형법 제 92조 5항에 대한 의견 질의에, 박 후보는 동성애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에 근거 ‘위계 등에 의한 성폭력’과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며 여전히 동성애자를 동성간 성폭력의 가해자로서만 판단하고 있고 따라서 해당 조항의 존속의 논리 또한 합리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문 후보는 군 내 인권차별을 개선하고 ‘계간’이라는 표현을 바꾸겠다고 하였으나 “합의한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한 형사적 처벌”이라는 핵심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했다.

동성결혼/파트너십에 대한 질문에서는, 박 후보는 반대를 전제한 태도로 ‘사회적 합의 필요’를 주장했고, 문 후보는 현재 드러난 가족형태로 인지는 하고 있으나 ‘사회적 여론을 수렴하여’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는 가족형태의 변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자율적 선택,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 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사회적 여론 수렴을 논하는 것은 책임회피의 빌미가 될 뿐이다.

다음으로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별법에 관한 질의에서, 박 후보는 이 법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이러한 답변은 현재 성전환자가 성별변경을 위해 개별적으로 법원에 신청하는 과정이나, 법원에서 판단하는 기준의 문제점에 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별 변경 기준과 과정에 최대한 성전환자의 의사를 반영하고 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정부의 책임이 요구된다는 측면도 간과하고 있다. 그런데 박 후보는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 보장에 관해 묻는 다른 항목에서, 법제도 미비의 일례로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별법 부재를 언급해 답변의 기초적인 신뢰성을 의심하게 하기도 했다. 문 후보의 경우, 제정되지도 않은 차별금지법의 차별시정기능을 국가인권위가 담당하도록 해서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뜬금없는 답변을 했고 정작 법제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다만 현재의 법적 성별변경의 기준을 완화하겠다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 증진에 대해서는 두 후보 모두 원론적인 입장에서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또다시 ‘국민적인 공감대’를 들어 방송 미디어의 차별 시정은 이미 방통위의 역할로 충분하다고 답변해 최근 일련의 사태(〈인생은 아름다워〉반대 혐오광고, 〈빌리티스의 딸들〉반대운동, 〈XY그녀〉폐지운동 등)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했다.

참고로 안철수 후보에게도 정책질의를 하였으나 후보를 사퇴하는 시점까지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대선을 통해서 정치인으로 부각되었고, 향후에도 정치를 계속 해나갈 것을 시사한 만큼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답변서를 보면서 그나마 정책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이 답변서들은 대선의 결과에 따라 이후에 성소수자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성소수자 정책 논의의 근거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정책질의에 엄밀하게 답변하고, 그 정책을 받아 안게 하며, 정말로 그 정책을 추진하도록 하는 그 투쟁은 성소수자와 관련된 의제가 좀더 ‘사회적인’ 의제로 부각되고, 성소수자라는 사회 구성원이 타인에게 의미 있고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며, 어떤 부분은 사회구성원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홈페이지 어디에도 성소수자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 없는 후보들에게 묻고 싶다.
“답변을 했다면 최소한 후보 홈페이지에 질의서 답변 내용을 게시하고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덧붙임

오리 님, 타리 님, 토란 님은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