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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성함도 모르지만, 강정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할아버지께서 제게 당부하신 글을 쓰려 합니다. 구럼비 앞에서 경찰과의 대치가 소강상태일 때 이런저런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지요. 그때 저는 ‘평화 없이 인권은 없다’와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평화의 섬이란 제주의 별칭은 의미를 잃는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게 다가오신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는 해군기지와 평화가 같이 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저쪽에서는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학자에게 물어봐도 이 부분에 대해 시원하게 답을 안해 줍디다. 해군기지와 평화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 말도 안된다는 걸 설명해 달라 해도 말을 안해 줍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내용의 글을 좀 써주면 안됩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오죽 답답하시면 초면의 나이 어린 저에게 그런 부탁을 하실까 싶어 저는 ‘못한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가 적어 충분치 못하겠지만 할아버지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뚫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드립니다.

평화 없이 인권은 없다

‘평화 없이 인권은 없다’는 말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하여 인권과 평화를 부르짖는 인류의 약속에 반드시 등장하는 말입니다. ‘평화적 생존은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라고도 합니다.

저희 부모님이나 많은 어르신들이 ‘우리 어렸을 때는 전쟁땜시 암것도 없었어. 정말 암것도 없었어’라는 말을 자주 하십니다. 암것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끌려가고 학살당하고 강제로 당한 수치와 고통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직접 겪지 않았어도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의 참화가 많은 생명과 소중한 가치들을 파괴했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폐허 위에서 인류가 한 약속을 기억하고 배우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 약속이란 ‘다시는 결코 다시는’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엔은 “인류의 삶에서 전쟁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기본적 인권을 위한 제1의 필수조건”이라고 확인했습니다. 또한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는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다”며 “인류의 평화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각 국가의 기본적이고 신성한 의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으로 ‘전쟁위협의 종식’,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을 내걸었습니다.(유엔, ‘인류의 평화에 대한 선언’)

물론 평화를 대놓고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뭘로 지킬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속내가 다르게 드러납니다. 더 많은 무기와 군사기지, 군사비 지출로 방벽을 쌓고 힘을 과시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그런 방식의 군사력 대결은 대결을 부를 뿐이며 인권보장을 위해 쓰여야할 소중한 자원을 낭비할 뿐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전자의 생각을 폐기 처분하겠다는 약속에서 오늘날의 인권이 출발했습니다. 60여 년 전 유명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모든 것이 변했다”며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 요구된다”는 말로 요약을 했습니다. 제1대 유엔인권최고대표를 지낸 메리 로빈슨도 같은 말을 합니다. “진정으로 안전한 세상을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해야 한다”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로의 변경”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경로의 변경’이란 군사기지와 전투력의 추가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노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영토의 안보가 구식의 안보라면 새로운 안보는 질병, 굶주림, 실업, 정치적 억압, 환경파괴의 위협으로부터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 것입니다.(유엔 인간발전보고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안보’)

이런 식으로 안보의 방향 바꾸기는 평화의 의미도 확대시켰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 뿐만 아니라 ‘가난, 실업, 굶주림 등의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평화는 인간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며, ‘평화는 먼 훗날의 이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한 방식으로 창조되고 확대되는 행동양식’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인류 간 연대의 원칙에 대한 뿌리 깊은 헌신’을 보이는 행위입니다. 제주도민이 아니면서, 강정마을 사람이 아니면서, 소위 ‘외지인’ 또는 ‘외부세력’이 강정을 주목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진: 캐콘(영상활동가)]

▲ [사진: 캐콘(영상활동가)]


강정마을 근처에는 국제컨벤션 센터가 있습니다. 평화의 섬이란 상징 때문에 유엔이 개최한 군축회의 등이 자주 열렸습니다. 그런 국제회의가 대규모 군사기지가 들어서는 상황에서도 제주도에서 계속 열릴 수 있을까요? 올해에는 2012 세계자연보전총회가 제주도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자연유산과 생물권보전지역이 재평가를 받는 해라는데 구럼비를 파괴하는 행위를 세계인들이 과연 모른 척 할까요? 모른 척 하는 것이 인류에 대한 헌신의 의무를 지키는 것일까요?

저에게 제주도란 어렸을 때는 감히 가볼 꿈을 꿀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가게 되면 모를까, 제주도행을 생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감히 가볼 수 없던 곳을 자주 찾게 됐습니다. 이런저런 생활에 지칠 때 한라산에 오르거나 올레길을 걷는 것이 최고의 휴식과 충전이 됐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여행도 왔고, 제주지역 장애인단체나 사회복지사들에게 인권교육을 하러 오게도 됐습니다. 그때 착륙 때마다 듣게 되는 ‘평화의 섬 제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란 말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평화의 섬’이란 말이 주는 울림은 단순히 말치레가 아니라 아프고 고단한 역사와 희생자들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 또한 강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또한 강정에 건설되는 해군기지가 미군을 위한 것이란 증거와 주장이 파다합니다. 지금처럼 지구화된 세상에서 그런 사실을 숨길 방법은 없습니다. 가깝게는 중국이 자극받고, 동북아 전체의 긴장이 높아질 겁니다. 그런 화약고를 품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기지가 들어서면 더 나은 삶이 보장될 거란 주장을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평화단체들은 <미국의 외국 군사기지를 철수해야 하는 열 가지 이유>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만 살펴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첫째, 군사기지는 전쟁 가능성을 높인답니다. 둘째, 군사기지는 국가들의 주권을 해친다고 합니다. 기지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해당 국가들은 미국의 강요를 받을 테니까요. 셋째, 많은 기지는 시민의 재산을 강탈하여 그 위에 세워집니다. 넷째, 기지는 엄청난 환경오염을 야기합니다. 어떤 공장보다도 더 많은 치명적인 독성물질을 다루는 것이 군사기지입니다. 이 부분에선 유감스럽게도 미군이 한강에 치명적인 포름알데히드를 직접 방류한 사례가 제시돼 있습니다. 다섯째, 기지는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의 위험을 가져옵니다. 마지막으로 군사비는 인간의 필요와 기회를 위해 쓸 자원을 빼다 쓰는 것이기에 인권을 위태롭게 합니다.

국가안보와 인간안보

평화는 더 많은 무기와 군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종전에 지배적이던 ‘국가안보’를 대신하여 만들어진 말이 ‘인간안보’입니다.

인간안보의 두 개의 핵심 개념은 ‘보호’와 ‘자력화’입니다. 보호란 국가의 책임으로서 인권을 증진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집단이 골고루 대표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력화’란 자신과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의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안보를 지키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폭정이 있으면 저항이 요구됩니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그런 저항의 의무를 ‘공동체에 대한 의무’란 말로 보충합니다. 여기서 공동체에 대한 의무란 ‘평화를 존중할 의무, 전쟁을 선동하지 않을 의무, 국제인권법을 지킬 의무,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 등입니다.

‘그냥 나 혼자 잘살다 갈 건데 뭐’, ‘나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뭐’ 이런 식의 말을 하며 주변의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강정에서 정부와 해군에 맞서시는 분들 중에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어린 경찰에게 손찌검을 당하면서 절규하시는 분들을 보며 숙연함을 느꼈습니다. 왜, 무슨 덕을 오래 볼려고 그러실까요? 저는 “미래 세대의 운명은 오늘 우리가 취하는 결정과 행동에 달려있다”(유네스코, ‘미래 세대에 대한 현 세대의 책임에 관한 선언’)는 어르신들의 신념을 봅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현 세대의 책임에 관한 선언>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환경보호’에 관해서는 “현 세대는 환경의 질과 원상태를 보전해야 한다. ... 미래 세대를 위해 인간 생활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데에 꼭 필요한 천연 자원을 보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평화’와 관련해서는 “현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전쟁의 폐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 현 세대는 미래 세대가 휴머니즘 원칙에 반하는 모든 형태의 공격과 무기 사용뿐만 아니라 무력 분쟁의 해로운 결과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강정마을 분들의 책임감은 이 선언의 문제의식을 넘어서는 더 성숙한 것이라고 봅니다. 강정에서 구럼비는 그냥 자연자원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구럼비는 강정마을 분들의 생명과 같은 생명이며, 같은 역사와 삶을 나눈 피붙이와 한가지입니다. 생명을 팔아 이익을 구하라는 명령은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정의롭지 못하기에 평화롭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경찰과 용역의 폭력이 그치지 않습니다. 정의롭지도 평화롭지도 못하기에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정확한 정보와 사실 확인은 없고, 이념 대결 조장과 선동만이 난무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정당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거짓말쟁이 소년’의 우화가 있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심심해서 반복한 소년의 말을 마을 사람들은 믿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얘기를 아이에게 들려주는 어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두 번이나 속은 마을 사람들은 늑대에 대한 경보를 신뢰할 수 있는 장치를 왜 마련하지 않았을까요? 양떼와 소년의 목숨을 잃은 것은 거짓말쟁이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의 피해이지 않습니까? 귀중한 생명과 재산, 그리고 신뢰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었으니 말입니다. 더 많은 무기와 더 많은 군사기지 건설이 평화를 지켜준다는 주장은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과 비슷하지 않은지, 우리가 진짜로 챙겨야 할 평화를 오히려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할아버지, 이제 이 부족한 글을 맺을까 합니다. 며칠밖에 안 있었는데, 바닷바람에 제 얼굴이 화상환자처럼 불거지고 갈라졌습니다.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보기 흉측합니다. 갈라진 피부야 며칠 고생하면 새 살이 돋겠지요. 하지만 지금 파괴되고 있는 구럼비와 강정마을의 삶은 한번 파괴되면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평화의 섬과 해군기지 건설은 양립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할아버지와 마을 모든 분들의 강건함을 기원합니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