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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취직’이 아닌 ‘노동’을 고민한다!

20대 학생/노동자와 함께 노동인권감수성 틔우기

나도 아직까지는 20대다. 멀지 않은 기억 속에 한창 취직을 고민했던 내 모습이 있다. 졸업을 앞두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울했다. 아슬아슬한 통장 잔고만이 나의 고민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친구들과 이틀이 멀다 하고 술을 마셨지만, 뾰족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교직 이수 ‘자격증’ 덕택에 집 근처 중학교 교사로 석 달 간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출근하는 나를 보며 “평생 이렇게 일하고 살면 얼마나 좋아.”라고 했지만, 개뿔. 일하는 나의 우울 모드는 전환될 기미가 없었다. 되레 직장에 있는 순간엔 언제나 초긴장 상태였기 때문에 내 마음을 돌볼 여유조차 얻지 못했다. ‘평생직장을 얻는다 해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이대로 그냥 익숙해져버린다면?’ 우울과 긴장이 증폭되었던 그 어느 시점부터 나는 ‘노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병상련의 연대가 이런 것일까? 교육을 준비하는 내내 '2년 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를 떠올렸다.

“넌 아직 세상을 몰라. 엄살 부리지마. 다 그렇게 살아.” 라는 인생 선배들의 핀잔에 '젊은 것들'은 어떤 똥침을 날릴 수 있을까?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엄살’을 부리고, ‘생떼’를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는 당찬 울림을 어디서부터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지난 3월 27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진보적 삶과 가치를 꿈꾸는 20대 40여명이 모였다. 여성영상집단 <반이다>가 제작한 20대 다큐멘터리 ‘개(開)청춘’ 상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동인권교육의 문을 열었다.

날개달기- 노동의 권리, 현장 속으로

“2020년 노동인권 박물관이 개장 되었습니다. 박물관에 이제는 사라진, 노동인권이 침해되었던 장면들이 조각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모둠별로 전시물을 하나씩 만들어 주세요.”

진행자의 말에 각 모둠들은 의논을 거쳐 본인들이 겪었던 또는 봐왔던 노동 현장의 불편한 장면들을 구성했다. 의자 4개를 활용하라는 미션을 반영해 각 모둠들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비좁은 의자 하나에 4명이 올라서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휴게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표현한 장면//마트에서 일하는 ‘알바생’이 손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직원 상사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는 장면//배달이 늦어져 발생한 손해를 택배 기사가 보상하게끔 하는 장면//정해진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고 초과 노동을 강제하는 장면//노동자에게 월급봉투를 주며 온갖 생색을 부리는 사장의 모습 등을 보며 참여자들은 공감어린 탄식을 자아냈다.

휴게 공간이 부족해도 요구할 수 없는 이유, 부당한 처우를 당해도 거부할 수 없는 이유, 손님이라면 무조건 미소로 응수해야하는 이유는 더럽고 치사해도 이 현장에서 아등바등 버텨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정직원’이 아닌 비정규직이라면 이런 식의 순응을 더욱 철저히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고용상태에서 벗어나면, 누구도 사람을 돌봐주지 않는다. 서구에서 걱정하는 ‘복지병’을 한국 사회에서 논할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은 한 번도 맘 편히 복지를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용상태를 유지한다 해도,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는 배부른 소리라며 일축된다. ‘다들 어렵게 살고 있다, 좀 더 참고 일하라.’는 주문 속에 노동자들은 서로를 위계화하고, 누가 더 불안한 존재인지 경쟁한다.

자신의 현재 혹은 미래의 모습을 보며 참여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한 편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으리라. 얄밉게, 또는 능숙하게 사용자들의 말투와 행동을 연기하는 참여자 몇몇에게 상황극을 지켜보던 참여자들 몇몇이 야유를 보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 상황이었다면? 사용자에게 대거리 질을 하며 싸울 수 있을까? 자신과 동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행동을 용기 있게 벌일 수 있을까? 최종 판단은 본인의 몫이리라. 통쾌할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해 참여자들과 함께 ‘내공’을 기르기 위한 날갯짓을 시작했다.

더불어 날갯짓1- 노동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본격적인 후반부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 연습문제를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장면들을 '노동의 눈'으로 재구성해본다면? 그 장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다음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말씀해 주세요."

위의 광고문을 보며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은 날선 분석을 내놓았다.


"가족처럼 일하라는 건 제대로 된 급료 지급 없이 맘 편히 부린다는 거군요."
"용모단정이라는 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리고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 요구되는 용모 조건 역시 달라질 것 같습니다."
"만약 청소년이 지원했을 때, 급료를 면접 후 결정한다면, 최저임금 미만을 받게 될 것 같아요."
"숙련시 직원으로 채용한다는 건 '알바생'은 직원이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아르바이트라는 표현 자체에도 문제가 있어요."
"사용자가 고용기간을 미리 정해둘 수 없습니다. 그건 강제노동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도 '파스타'도 노동의 눈으로 본다면 단순한 사랑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저임금의 가사사용인으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세경(신세경)이 있고, 여성을 차별적으로 집단 해고하는 독선적 주방장 현욱(이선균)이 있다. 지하철에 붙어있는 서울 메트로의 광고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최고의 상은 고객님의 미소입니다."라는 문구는 고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감정조차 부정해야하는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 장의 식권이 두 장으로 분리된 사연 속에는 '정직원'이 아니기에 겪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설움이 묻어난다. '노동자 풍'을 명시한 범죄인 수배 전단을 보면 한국 사회가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노동자에 대한 비하는 어떤 사회적 문제를 낳는지를 살필 수 있다.

권력에 의해 감춰진 삶의 진실을 읽어내는 것이 인권감수성이라고 한다면, 노동인권감수성도 마찬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이 사회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들에 빚진 채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 노동을 일구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일해야만 사는 세상이 아닌, 일하고 싶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날갯짓2- 노동현장에서의 차별은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맥락들을 짚는 과정은 비정규노동인권을 고민하는데 필수적이다. 비정규직은 최근 들어 생겨난 고용형태일까? 비정규직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여성과 청소년은 노동시장에 뛰어든 이래 언제나 고용불안에 시달려 왔다. 장애인은 아예 고용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존재를 건 투쟁이다. 소수성과 차별은 권력이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고 잠식하는 구체적 전략이며, 이 전략은 노동자들의 내부를 겨냥한다. 고용 악화가 여성노동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여성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스스로 깨나가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어떤' 노동자를 타자화하는 시선이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닌 '권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이를 위해 인권오름 178호('문제적 인간'이 찾아왔다)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는 "가해자를 소환하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자진 퇴사 압박을 받은 성소수자(인사노무과장 소환)//학내 청소 용역 노동자(대학본부 관계자 소환)//편의점에서 일하는 청소년(편의점 사장 소환)//고객 성희롱 사건을 겪은 후 스스로 일을 그만 둔 대학생 여성(호프집 사장 소환)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례들을 준비했다.

모둠별로 한 가지 사례씩을 맡아 10여분 동안 가해자의 논리를 구성했다. 구성이 끝난 후, 모둠에서 1인~2인이 대표로 나와 가해자를 연기하고, 나머지 전체 참여자들은 인권침해 진상조사단이 되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지기로 했다.




- 자진 퇴사가 뭐가 문제가 됩니까? 저희가 해고한 게 아닙니다.(인사노무과장)
= 자진 퇴사를 결심하게 되기까지 경수 씨가 느낀 압박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압박감을 못 견디고 퇴사한 거라면, 회사와 분명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진상조사단)

= 여고를 졸업했느냐 아니냐가 업무와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 입사지원서는 공문서이고 사실만을 기록해야 합니다. 이건 위조죄에요! 위법 행위를 한 사람을 계속 채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한 번 거짓말한 사람을 회사가 어떻게 신뢰합니까?
= 입사지원서에 사실을 기록했다면 채용하셨을 겁니까?
- 뭐,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진짜 남성'을 뽑길 원하는 겁니다.

- 인간적으로 저도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제 사적인 감정과 회사일은 명백히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사일은 공적인 일이니까요.
= 경수 씨를 불쌍하다고 느끼는 당신의 그 감정자체가 성소수자가 이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는 더더욱 공정한 입사 절차와 차별 시정 대책들을 ‘공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치열한 공박이 오가는 사이 어느새 차별이 이루어지는 맥락이 뼈대를 드러냈다.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나 차별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입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더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더라.’는 식으로 부당한 해고나 처우를 소수자 개인의 품성 문제로 돌려 본질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 눈을 부릅뜨고 잘 보지 않으면 언제든 차별의 그물망에 휙! 걸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머리를 맞대어- 무기력과 냉소를 넘어서기 위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노동의 위계, 노동자의 위계는 더욱 강화되고, 현장 속 노동 인권은 더욱 열악해진다. 이 지긋지긋한 사다리를 걷어차고 나면, 우리에게 무엇이 보일 것인가? 사람이 보이고, 연대가 보인다. “사다리 앞에서 멈춰 섰더니, 뭉침을 생각하게 되더라.”는 참여자 분의 말씀이 마음에 꽂혔다.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한국 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나 상처 받았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면, 결국 나를 죽이게 된다. 골병만 든다.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아프다고, 우리 좀 바꿔보자고 이야기하자. 그러면서 동시에 묵묵히 대안을 마련하자. 자본의 담합에 맞서는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실험하고, 상품 소비에만 익숙해진 ‘나’와 결별할 준비를 시작하자. 이것이 노동인권교육의 잠정적 결론이 아닐까 싶다.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