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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책의 유혹

[책의 유혹]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 가부장제와 근대가 공모한 방식은 무엇이었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캐롤 페이트만, 이후

“인권이라는 가치이자 제도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원리이자 제도로서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시민혁명 이후의 일이다.” 인권교육센터 <들>의 한 교육 자료에 나와 있는 말이다. 뭐, 굳이 이 자료를 인용치 않더라도 인권운동 한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식적으로 이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봉건적 신분제를 무너트린 근대시민혁명, 대표적으로 프랑스혁명은 모든 이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이 세상에 선물하였다. 역사적 혁명의 자리에 여성들은 무엇을 했을까? 당시를 묘사한 그림들은 아래의 예처럼 여성이 혁명의 진두지휘를 하는 모습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이미지를 구할 수 없어서 못 올리지만, 프랑스혁명을 묘사한 그림 중에는 아래 그림보다 더 강한 모습의 여성들이 창과 칼로 무장하고 왕의 군대와 싸우는 장면이 왕왕 등장한다. (이 그림을 보고 싶다면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라는 책을 보시길!!강추, 강추!)

들라쿠르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br />

▲ 들라쿠르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남녀를 불문한 시민들의 격렬한 투쟁과 전투로 왕권이 무너지고, 드디어 평등의 세상이 열렸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근대사회가 몇 백 년이 흘러왔지만 여성에 대한 예속은 질과 결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온존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혁명에 수동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왜 여성들은 근대사회에서 ‘시민성’을 부정당한 것이지?” 루소가 그랬던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게 한 것이 근대의 불평등의 시작이라고. 이것이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충분하다.

학생운동 시절부터 오늘까지 민주주의, 해방, 인권, 평등... 이런 말들과 친하게(?) 지내온 지 2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던 80년대 후반에는 여성해방이론이라는 것이 대체로 맑스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탁이 근대적 여성 억압의 배경이라고 진단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이 여전히 유의미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는 자본의 음모일 텐데, 문제는 자본가든 노동자계급이든 모두가 공모하여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것을 해석해내기에는 미흡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명료한 분석 없이, 어쨌거나 가부장제 자체가 남성의 여성지배이고 보면 이유의 한 축으로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그리고 ‘이론적 분석보다 실천이 우선이 아니겠어’ 라며 억압에 맞서는 행동을 중심으로 의문은 살포시 내려놓고 지내왔다.



그러다 2000년 초반에 만난 이 책이 내게 무언가 찜찜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답을 주듯이 다가왔다.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 책을 읽고 난 후, 맑스주의적 해석의 부족함, 모호함. 그리고 인권의 개념을 탄생시킨 근대 시민사회에서 여전히 여성의 예속이 왜 일어났는지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페이트만은 1970년대 초부터 재조명되고 있는 사회계약론에 '성적 계약'의 문제를 포함시켜, 근대적인 가부장제가 어떻게 확립되는가를 새롭게 밝혀주었다. 사회계약론이라 하면 두말할 것 없이 근대 서구 사회의 사상적 토대로서, 핵심은 정치사회 내지 시민사회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간의 원초적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개인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절대 개인이다.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여성은 분명 계약의 한 당사자여야 하지만 자유로운 계약을 하는 '개인들'이란 실제로는 '남성들'일 뿐이며, 정치사회·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여성은 계약에 참여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민혁명의 주체로 참여했고, 시민혁명의 가치가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은 사회계약에서 교묘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일까? 페이트만은 그것이 사회계약론에서 원초적 계약인 ‘성적인 사회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빼놓았다고 말한다.

페이트만은 정치이론가들이 성적 계약에 관해 침묵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이들은 가부장제를 '아버지의 지배'로만 이해했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전근대적인 아버지(왕)의 지배는 소멸했기 때문에 새로운 시민질서는 반가부장제적이거나 탈 가부장적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페이트만은 가부장제는 아버지의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근대 사회는 아버지를 '살해'했지만 형제적 가부장제를 만들어냈고, 따라서 남성들의 권력은 여전히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시민적 자유는 보편적이지 않다. 시민적 자유는 남성만의 것이고 가부장적 권리에 의존한다. 아들들이 아버지의 지배를 무너뜨린 것은 아버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중략)............... 원초적 계약은 리치가 ‘남성의 성 권리의 법’이라고 명명한 것을 만들어낸다. 계약은 가부장제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근대적 가부장제를 만드는 수단이었다.”(18쪽)

둘째, 정치이론가들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고 공적 영역만을 정치적인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에 따라 성적 계약은 사적 영역만의 문제라고, 공적 영역은 가부장제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제시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남성이 여성을 예속하는 성적 계약은 결혼계약, 고용계약, 매춘계약, 대리모계약 등의 형태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가로질러 맺어지고 있다는 것이 페이트만의 주장이다.

아버지는 죽었으나 형제들은 살아남았다. 프랑스 혁명의 표어 중 하나가 (통상 '박애'로 번역되는)'우애’fraternity가 '형제애'를 의미하는 것에서 보여지 듯, 근대 사회는 아버지의 지배를 소멸시키는 대신 형제적 가부장제를 만들어냈다. 우애는 시민사회에 남성적인 질서와 남성적인 연대를 구성하는 원리이며,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를 의미한다.

"사회계약은 자유에 관한 이이디어다. 하지만 성적 계약은 예속의 이야기이다"(17쪽)

사회 계약은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실상 성적 계약은 예속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페이트만은 수년간 이런 고전적 계약론을 연구하면서 사회계약은 성적 계약을 전제하고, 시민적 자유는 가부장적 권리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그녀는 가부장제가 사회계약론을 통해 근대적인 형태로서 생명력을 유지한 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해왔으며,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복종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게 했다고 밝힌다.

페미니즘의 주장처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법적·계약적 권리를 성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으며, 그 동안 많은 권리를 획득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적 계약에 따른 남성에 의한 여성의 정치적 지배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성이 남성과 계약상의 동등한 당사자가 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법률적 개혁이 일어난 지 한 세기 이상 지난 지금, 여성들은 거의 남성과 법률적으로 동등해졌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남편의 보호 아래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들은 여전히 광범위한 권력을 누리며 아버지의 신분에서 나오는 이익까지 얻는다'(314쪽).

따라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예속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페이트만은 이를 위해 가부장제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실로 많은 이론가들이 가부장제를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억압이라고 암시하거나, 숙명적인 예속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페이트만은 단호히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재해석, 재 개념화하여 이해할 때, 비로소 "명실상부한 자유로운 사회"(321쪽), 즉 진정한 인권의 가치가 실현되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의 출발선에 설 수 있을 것을 것이라고 말한다.

며칠 후면 ‘3․8세계여성의 날’이다. 이 글도 세계 여성의 날을 고려하며 써달라고 부탁이 왔다. 참, 지루하고 지겨운 청탁이다. 누군가 이 대목에서 화닥 놀라거나 당황하겠군. 하지만 청탁자한테 하는 말은 아니다. 근대사회가 시작된 이래, 그리고 인권의 가치를 외쳐온 오랜 시간동안 여전히 우리 여성들은 ‘3․8세계여성의 날’을 흥겨운 기념의 날로 여길 수 없고, 다시금 운동화 끈을 불끈 매고 결연한 가부장제와의 투쟁을 선포하는 날로 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지겨운 반복인가.

이러한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매년 다짐한다, 선언한다, 투쟁한다. 그러나 행동도 단단한 무기가 없다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나아갈 무기를 얻기 위해, 이 3월에 전의를 담아 페이트만의 이 책을 읽어보시라. 이론서이므로 딱딱하고, 번역이 완존!!히 후져서 힘들지만, 사회계약론의 허구성과 기만성을 파헤쳐보는 데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시간이 남는 분은(아니, 꼭 시간을 내시어!!) 이 책도 권하고 싶다. 린 헌트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새 물결). 페이트만의 내용이 어렵다면 이 책은 그것을 훨씬 쉽게 문화사적으로 이해시켜 줄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어떻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사회계약론 안에 되살아나게 되며, 그 과정에 문화적 장르(소설, 그림 등등)들의 영향을 잘 볼 수 있다. 간간히 <19금>(우리에겐 없는 기준, 문광부에는 있을 기준)의 삽화도 있으니 지하철에서 보실 땐 주의를 잠시 살펴봐도 좋을 듯. ^^


덧붙임

정주연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