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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2] 수렁에 빠진 인권위, 시민사회와 소통하라!

인권위가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보수정부가 집권하면서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일이 전개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인수위시절부터 대통령 직속기구화라는 칼날이 들어왔지만, 그 때는 다행히 인권단체들의 노력과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21% 조직축소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통령 직속기구화 시도를 정부가 “인권위를 더 잘 챙겨주려는 의지”라고 해석하던 넉넉한 마음씨의 인권위원장조차,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국제사회에서 변론할 자신과 면목이 없다,” ”정권을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기고 인권위를 떠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정작 충격에 빠진 곳은 한국 인권위를 모범으로 생각하던 국제사회인 것 같고, 일반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인권사회단체들의 움직임도 미온적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이 어떤 곳인가? 그 추운 겨울 노숙단식농성을 벌이면서까지 인권위를 탄생시킨 주역들이 아닌가? 물론 인권단체들이 모여 ‘인권위 제자리찾기’에 나서고 있긴 하지만, 인권위를 탄생시킬 때 그 뜨거운 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활동가들 사이에서조차 ‘우리가 왜 인권위 구하기에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흘러나온다. 어쩌다가 일국의 인권을 상징하는 국가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런 ‘국민 왕따’의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단 말인가?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 조직축소를 반대하는 집회 사진

▲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 조직축소를 반대하는 집회 사진


외면 받는 인권위

물론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국가기구는 인권위 말고도 허다하다. 문제는 그 국가기구가 다름 아닌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데에 있다. 인권위는 다른 국가기구와는 달리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검찰처럼 강제수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행정부의 명령이나 법원의 결정과 같은 강제력도 없다. 그저 인권이 침해되었다고 ‘선언’하고 그 구제를 ‘권고’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권고기관이 인권위의 결정을 존중하는 이유는 인권위가 가지고 있는 사실상의 권위와 힘 덕분이다. 인권위 권고에 대한 수용률이 70%가 넘는다는 사실은 인권위가 법적 권위가 아닌 일종의 사회적,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법적 강제력’이 아닌 ‘사회적 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는 인권위라면 정부가 함부로 그 독립성을 훼손할 수도 없고, 피권고기관이 그 결정을 무시할 수 없다.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국제적 문서들이 한결같이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도 인권위가 시민사회의 탄탄한 지지를 받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두 정권은 인권위에 호의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권위를 만든 장본인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위와 정부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쿨’한 대통령이었다. 그런 정권 하에서 인권위는 시민사회의 강력한 지지 없이도 사회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10년은 오히려 인권위에게 독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인권위에게는 시민사회와 지지가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 인권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재정과 조직을 제공받았고, 피권고기관도 인권위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인권위가 ‘시민사회의 소통’이라는 문제에 ‘방심’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인권위의 대통령직속기구화에는 실패했지만, 결국 인권위 조직축소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는 시민사회의 충분한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했고, 결국 현 정부의 인권위 무력화 기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를 자꾸 ‘나쁜 정권’의 문제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인권위가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인권위는 애초부터 국가와 갈등하라고 만든 기구이고, 인권위에게 모든 정권은 ‘나쁜 정권’일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의 밀월 기간은 예외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법은 간단하다. 인권위는 나쁜 정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의 접촉면을 확대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시민사회의 비판과 감시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동안 인권사회단체들이 왜 그토록 줄기차게 인권위와 시민사회의 소통 부족을 질타해 왔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봐야 한다.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 조직축소를 반대하는 집회 사진

▲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 조직축소를 반대하는 집회 사진


시민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소통하라’는 명제가 인권사회‘단체’와의 교류·협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접촉면의 확대이다. 인권위가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던 것도 바로 시민들과의 소통 부족이다.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길이 열려있지 못했고, 그 결정이 사회 곳곳으로 전파되는 과정도 설득적이지 못했다. 인권위는 인권을 강변하려고 들면 안 된다. 법원 판결문의 판박이처럼 쓰여진 결정문 하나로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인권위는 국제인권의 기준을 우리 사회에 ‘강요’하는 기구가 아니라,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기구이다. 그런데 행정기구들은 국민 참여의 확대를 부르짖고, 입법부는 국민직접참여제도를 고민하고, 사법부는 배심제까지 도입하는 동안, 정작 인권위는 시민참여의 확대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실제로 인권위가 사형제 폐지, 동성애 차별 금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 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단지 그 결정을 강요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공론을 형성해 나가고, 시민들이 활발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충분했는지 다시 한번 반성해 봐야 한다.

대안은 다양하다. 인권위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입법예고를 하듯이) 결정이 내려진다는 사실이 미리 공지되어야 하고, 이해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공청회 등의 절차를 필수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공론조사와 같은 기법을 활용해보는 것도 좋고, 주요결정에 대해서는 아예 시민배심제를 채택해 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이다. 이런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민사회의 공론을 조직해 나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권위의 결정도 자연스럽게 도출되어야 한다. 결정은 인권위원들이 내리지만, 그 결정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시민사회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위원 선임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인권사회단체가 꾸준히 주장해 왔듯이, 위원 선임과정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는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선임위의 구성과정, 공개추천과정, 청문회 등 심사과정 등에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인권위의 사회적 힘은 바로 이러한 시민참여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임 인권위원장은 대통령과 소통할 수 없었다고 한탄하며 자리를 물러나야 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시민들과의 소통이었다. 인권위가 시민사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시 당초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를 이렇게 타박할 엄두조차 못 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번 사태를 통해 인권위가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은 위안거리다. 결국 인권위가 믿고 의지할 곳은 시민사회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덧붙임

홍성수 님은 숙명여대 법과대학 조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