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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의 증언들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름은 알아도 흑인 민권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흑인 민권운동을 알아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명연설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킹 목사의 명연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무수한 이름 없는 시민들의 고민과 결단, 행동과 희생이 있었다. 오늘 만나볼 목소리는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의 중요한 국면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의 것이다. 인용할만한 명문장도 아니고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왜 인간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는지를 담담하게 읽을 수 있다.

1955년 12월 1일, 왜 로자 파크가 버스에서 자리를 내주기를 거절했는지는 그녀의 담담한 회상에 드러나 있다. 로자 파크에게 그날 벌어진 일은 우연이 아니었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돼온 차별 관행이었다. 로자 파크가 그날 자리를 내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누가 그러라고 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시민권 투쟁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의 회원이었고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로자 파크 이전에도 같은 사건으로 여성들이 체포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로자 파크의 체포가 버스 보이콧의 기폭제가 된 데는 그녀의 석방을 헌신적으로 도운 지역 활동가들이 있었고, 그녀에게 그 사건을 흑백분리에 대한 도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 배경이 있다. 로자 파크는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 디 닉슨이 그런 활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글은 로자 파크의 체포 후에 닉슨이 그녀를 처음 만난 후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로자 파크 사건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당시 26살의 무명의 인물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이콧 조직을 맡을 것을 요청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성정치위원회의 조안 깁슨 로빈슨은 1949년에 몽고메리에 일자리를 얻어 이주했다. 그녀 또한 몽고메리로 와서 얼마 후 버스에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받았다. 분노한 로빈슨은 흑백분리법을 깨기 위해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버스 회사와 시 위원들이 흑백분리를 불법화하거나 적어도 당시의 버스 규율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버스 보이콧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고된 일이 요구됐는데 로빈슨과 여성정치위원회가 상당 몫의 일을 감당했다. 세 번째 글은 로빈슨의 버스 보이콧 첫날의 기억이다.

춥고 비도 올 것 같은데 버스를 안타는 투쟁이라니, 단 하루를 약속한 것이었지만 얼마나 떨리는 약속이었을까. 하지만 버스 보이콧은 하루가 아니라 381일 동안 이어지게 된다. 하루 보이콧은 어느 누구의 예상보다도 성공적이어서 계속해야겠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사람들은 존엄함으로 사회가 자신들을 대해줄 것을 요구할 기회라는 걸 직접적으로 느꼈다.

며칠, 몇 주, 몇 달을 넘어 버스를 거부한 그들은 아침마다 일터나 학교로 가야할 사람들이었다. 에피소드 하나, 출근해야 할 사람들 중엔 수많은 흑인 가정부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버스 보이콧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백인 여성들이 차로 데려다 주는 일을 했다. 몽고메리 시장은 흑인 가정부를 태우는 일을 중단하라는 포고를 냈다. 백인 여성들이 차 태워주는 일을 중단하거나 흑인 가정부를 해고한다면 보이콧을 깰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은 흑인을 태운 백인 여성 운전자를 보면 신호위반을 빌미로 단속했다. 백인 여성들은 내 가정부가 버스를 타면 불량배가 있을까봐 안탈 뿐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흑인 가정부는 자신은 보이콧과 관계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로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보이콧 기간 동안 거짓말은 계속됐다. 보이콧을 모른다고 잡아뗀 흑인 가정부들은 버스를 안탈 뿐 아니라 자신들이 받는 보잘것없는 임금으로 보이콧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카풀조직, 택시 요금 인하, 그도 아니면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불편함 속에 협력과 연대의 싹을 키운 그들은 일 년이 지나 차별 없는 버스에 자유로운 시민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다.

촛불 1주년이던 날,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로 열린 도로에 시민들이 이명박정부를 비판하는 손피켓을 들고 참가하고 있다.(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촛불 1주년이던 날, 하이서울 페스티벌 행사로 열린 도로에 시민들이 이명박정부를 비판하는 손피켓을 들고 참가하고 있다.(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2008년 촛불시위를 기억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된 서리를 맞았다. 시민을 위해 어디든지 빠르게 달려오겠다는 경찰은 정말 모든 거리며 지하도에서 시민들을 빠르게 막고 쏜살같이 몰아서 경찰버스로 또 경찰서 유치장으로 날랐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천막도 부서졌다. 살아서도 철거당하고 죽어서 또 철거당했다. 시민 노릇하기 정말 힘드네, 우리에게 인권은 도대체 뭔가라는 탄식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정치도 경제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그것의 기본이나 근본과는 거리가 먼 요즘, 우리는 열이 나있고 부루퉁하고 말해서 뭐해 하며 침묵과 무기력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을 깨고 누군가 노래 부르고, 누군가 촛불을 켜고, 누군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 누군가가 손을 잡고 모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 소개한 문헌집의 다른 장에 등장하는 노랫말이 있다.

“자유는 영원한 투쟁, 자유는 영원한 투쟁, 자유는 영원한 투쟁이라 말하죠. 오! 주여, 우린 너무 오래 투쟁했어요. 우리는 자유여야만 해요. 우리는 자유여야만 해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의 증언들

로자 파크의 “회상; 내 영혼은 평안하다”

… 버스를 타서 단 한자리가 빈 걸 보고 걸어 들어갔죠. 그 자리는 백인 전용좌석 바로 뒤였어요. 내가 앉은 자리는 바로 통로 옆이었고 내 옆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맞은 편 통로 옆에는 두 여자가 앉아있었죠. 백인 전용석이라 불리는 버스 앞부분에는 이때까진 자리가 몇 개 남아 있었어요. …세 정거장 가서 사람들이 더 탔고, 앞좌석 전부가 찼어요. … 한 남자가 서 있었고, 운전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사람이 서있는 걸 보고 우리들(로자 파크스와 주위에 앉아있던) 네 사람에게 자리를 그 사람에게 내주라고 했어요.

처음 요구에 우리들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죠. 그러자 그가 여러 번 말했어요, “너네들 자신을 알고 좌석을 내놓는 게 좋을껄”. 이럴 때 자리에 앉았던 승객이라면 당연히 말문이 막힐 겁니다. 사실, 그의 말은 납득이 되지 않았죠. 내 옆자리의 남자와 건너편 좌석의 두 여자가 일어나 통로로 움직였을 때, 나는 내 자리에 그냥 있었어요. 운전사가 내가 여전히 앉아있는 걸 보더니 일어설 거냐고 묻더군요. 나는 말했죠. 아니라고, 안 일어설 거라고. 운전사가 말했어요. “음, 일어서지 않겠다면 체포하도록 해야겠군”. 나는 그렇게 하라고 체포하라고 했어요.

운전사는 버스에서 내리더니 금방 돌아왔어요. 몇 분 후 두 명의 경찰이 버스에 타서 내게 다가오더니 운전사에게 일어서라는 요구를 받았는지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죠. 경찰들은 내가 왜 일어서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 하더군요. 나는 말했죠. 내가 일어서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요금을 내고 자리에 앉았으니 자리를 내놔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경찰은 날 체포해서 경찰차에 태우고 감옥으로 데려갔어요. 용의자 명단에도 올렸겠죠. 심문을 했어요. 수인이나 체포된 사람들에게 묻는 의례적인 질문이었죠. 경찰은 운전사가 기소 또는 구속영장 발부를 원하는지를 결정해야 했고, 운전사는 그러기를 바랬죠. 그리고 나서 감방에 데려가 나를 가두었죠. 잠시 후에 감방에서 나와 내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했어요.…

이 디 닉슨 “모든 게 어떻게 시작됐나”

1955년 12월 1일 밤, 난 침대가에 오래 앉아있었죠. 한참 후 아내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죠. “여보, 로자 파크 부인의 체포에 항의해 시내에 있는 모든 흑인이 하루 동안 버스를 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아내가 날 정신이 나갔다는 듯이 쳐다봤죠. 그때 난 아내에게 물었죠. “당신 생각은 어때?” “난 당신이 잠꼬대 집어치우고 불 끄고 자야 한다고 생각해”

버스에서 짐 크로우 법(미국 남부의 흑인분리법)을 위반한 혐의로 10개월 동안 구속됐던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30년 전으로 돌아갔어요. 내가 차량 짐꾼으로 처음으로 남부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벗어나 여행했던 나날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죠. 북부의 흑인들이 전차와 기차에서 맘대로 어디에나 앉는 걸 봤어요. 흑인이 공직을 갖고 있다니, 남부 앨라배마 주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부인당한 자유를 그들은 어떻게 가졌을까. 얼마나 더 오래 우리는 당하는 걸 견뎌야만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물었던 게 기억났어요. “앨라배마 주의 흑인에게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한 사람만으로는 깊게 뿌리박힌 전통을 바꿀 수 없을 거야. 하지만 한 사람이 불꽃을 일으킬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빛을 보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침대가에 앉아있던 내게 갑자기 생각이 몰려왔어요. 몽고메리의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강력하게 싸울 걸 요구하면 왜 안 되는데? 로자 파크스 부인을 위한 항의에 나서면 안 되나? 버스를 안타면 어때서? 몽고메리 개선 조직을 시작하면 안 되나? 아내의 시큰둥함에도 불구하고 대중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나는 결심했어요. 몽고메리의 흑인들이 드디어 행동하길 갈망하고 희생할 준비가 돼있고 무슨 일이 생기건 견뎌낼 준비가 돼 있다고 느꼈어요. …난 뒤척이다가 잠 들었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와 그것을 시작한 여성들: 조 안 깁슨 로빈슨의 기억

1955년 12월 5일, 월요일이었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살던 12만 명의 흑인과 백인들에게 똑같이 휴일 뒤의 일하는 날은 이른 아침의 부산함으로 시작됐죠. 날씨로 말하자면, 그 날은 남부의 다른 겨울날과 다르지 않았어요. 춥고 비가 내리려 했죠. 이 날은 보통의 날과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무관심한 구경꾼들, 다소 무관심하거나 일부 재밌어하는 구경꾼이었던 백인들 대부분에겐 평범한 날이었죠. 아마 몽고메리 버스 회사 사람은 다소 걱정했겠죠. 하루만이라도 버스 요금 수입에 심각한 손해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몽고메리의 5만여 흑인 시민에겐 춥고 흐린 12월의 그 날이 달랐어요. 전날 밤 그들 중 아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하루 버스 보이콧”에 사람들이 정말로 협력할지를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춥고 비까지 오려하니 어느 것도 그들에게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두려웠죠. 졸립고, 대단한 기대로 긴장되고, 희망을 품고, 그들 모두가 하루를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한 그들이었어요. 그들이 두려웠던 건 잘 계획한 몽고메리 시내버스에 대한 하루 투쟁이 실패하면, 다수의 흑인들이 버스를 탄다면, 보이콧 운동의 자랑스런 흑인 지도자들이 시의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거였죠. …시는 흑인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흑인들은 조명을 받고 있었어요.

아침 5시 30분, 몽고메리 시에 동이 텄어요. 노동자들이 거리 모퉁이에 모여 있었죠. 계획에 따르면, 그들을 태울 것은 버스가 아니라 흑인 운전사가 모는 택시(1인당 10센티씩 요금을 내려서) 또는 이날 월요일만 공짜로 제공하기로 돼있던 200여대의 자가용이었어요.
의심이 장난이 아니었죠. 택시 운전사들이 약속을 지킬까, 자가용 소유자들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태우려 할까, 흑인 버스 이용자들이 버스를 타지나 않을까, 게다가 춥고 비까지 오려하는데!

흑인여성정치위원회(WPC)는 수개월동안 버스 보이콧을 계획해왔지만, 계획이 홍보된 것은 불과 3일이었어요. 보이콧에 대한 생각은 여러 해 동안 했죠. 거의 날마다 흑인 남성, 여성, 아이들이 버스에서 불쾌한 경험을 하고 저녁 먹으면서 식구들에게 그런 얘길 해왔던 거죠. 이런 얘기들은 이웃들에게 반복됐고, 클럽 모임이나 큰 교회 모임의 목사들에게도 전해졌죠.…

로자 파크의 체포 소식이 모든 흑인 가정에 들불처럼 퍼졌어요. 전화통에 불이 났죠. 거리모퉁이와 집에 모인 사람들은 얘기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죠. 멍한 무기력이 모두를 마비시킨 것 같았어요. 아주 소수만이 그날(로자 파크가 체포된 날) 또는 다음날 버스를 타지 않았죠. 공포와 불만과 의심이 있었어요. 모든 사람이 누군가 뭔가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죠. 그날과 반나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예전처럼 흑인 미국인들은 버스를 탔어요. 그들은 부루퉁하고 말을 하지 않으려 했죠. 긴장으로 팽팽한 침묵의 기다림이 있었죠. 흑인들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말하지 않았어요. 조용하고 부루퉁하고 기다리고 있었죠. 그냥 기다림!

…로자 파크의 체포 소식에 프레드 그레이(몽고메리 시의 흑인 검사)는 충격을 받았어요. 난 이미 내가 생각한 바를 그에게 알렸죠. 흑인여성정치위원회(WPC)가 로자 파크스의 재판이 있는 날인 월요일에 버스를 타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전단을 수천 장 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준비 됐나요?” 그가 물었죠. 주저함 없이 우린 준비됐다고 확신했어요. 전화를 끊고 나는 행동을 시작했어요.

흑인여성정치위원회, ‘전단’

또 흑인 여성이 체포돼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백인이 앉도록 버스 좌석을 내주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로 흑인이 체포됐던 클로데트 콜빈 사건 이후 두 번째입니다. 이런 일이 중단돼야 합니다. 흑인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는다면 버스는 운영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승객의 사분의 삼이 흑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체포당하거나 빈 좌석을 두고도 서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체포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뭔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계속될 겁니다. 다음 차례는 당신일 수도 당신 딸일 수도 당신 어머니 일수도 있습니다. 이 여성의 재판이 월요일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흑인에게 체포와 재판에 대한 항의로 월요일에 버스를 타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직장이나 시내에나 학교에나 어디에 가든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마십시오. 버스 말고는 다른 방도가 전혀 없다면 하루는 학교를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루는 시내에 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하러 가야 한다면 택시를 타거나 걸으세요. 하지만 부디 아이나 어른이나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마세요. 월요일에는 모든 버스를 멀리 하세요.
덧붙임

류은숙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