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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걸어온 레즈비언 권리 운동, 이제는?

[이반의 세상, 세상의 이반]

이 나라에서 레즈비언 권리 운동이 시작된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수백 명의 레즈비언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운동해 왔다.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이 겪어 왔고, 겪고 있고, 겪을 일들을 걱정해 온 이들은 레즈비언이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조금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는 작고 큰 변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문제들을 붙들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이렇게, 15년이 흐르고 있다. 15년.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인 이, 15년이라는 시간동안 우리는 레즈비언의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10대 레즈비언의 문제·레즈비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과 제도 등을 사회 문제화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이들의 마음 건강을 살피는 일에 집중해왔다.

혹자는 ‘이제, 더 이상 레즈비언 관련 이슈는 새롭지 않다’며 ‘레즈비언을 넘어 선 새로운 이슈를 통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라 평하기도 하지만, 많은 국내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변화를 위한 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고, 운동의 내용과 형식은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조직되기 시작했던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질적·양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운동 조직들에서 설정하는 레즈비언 관련 의제들의 성격과 범위는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의 분화와 의제의 다양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일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도 안 될 ‘레즈비언’ 안 ‘또 다른 레즈비언’들의 문제를 발굴하고, 드러내야 한다. 다양한 층위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레즈비언들의 삶에 관한 실태를 파악하고, 교제 혹은 동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레즈비언 관련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제주도나 전라남도 나주에 거주하는 레즈비언, 독거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레즈비언, 장애를 가지고 있는 레즈비언, 경제적인 빈곤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레즈비언, 제도 결혼에 편입한 레즈비언에 관한 문제에 기초적인 관심조차 갖지 못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레즈비언인 딸을, 동생을, 언니를, 누나를 둔 사람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레즈비언 권리운동의 새로운 과제들

그저, ‘레즈비언 관련 이슈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혹은 ‘레즈비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막연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 정체성 형성 과정, 레즈비언과 공간, 레즈비언 관련 성매매·성폭력, 레즈보포비아, 레즈비언과 폭력, 레즈비언과 성, 레즈비언과 트랜스 젠더, 레즈비언 관련 기록, 레즈비언 이론, 레즈비언 역사, 레즈비언 권리 운동사, 세대별 레즈비언, 레즈비언과 계급·빈곤, 레즈비언 커뮤니티·문화, 레즈비언과 건강, 레즈비언과 조직, 레즈비언과 혈연가족, 레즈비언과 전쟁, 레즈비언과 문화, 레즈비언과 종교, 레즈비언과 법·제도, 레즈비언과 과학, 레즈비언과 노동, 레즈비언과 의학, 레즈비언과 교육, 레즈비언과 이데올로기, 레즈비언과 여성주의, 아시아 레즈비언 등 다양한 레즈비언 관련 이슈들을 운동 의제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단 시간 안에 이 문제들을 균형 있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15년 아니, 앞으로 150년을 내다보며 현실에 기반한 운동 의제들을 발굴하고, 문제의식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레즈비언 개인 혹은 레즈비언 활동가들만의 몫이 아니다. 레즈비언에 관한 문제들은 ‘나는 누구(들)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한데, ‘나는 누구(들)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획득의 문제는 레즈비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임

* 박김수진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