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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이반의 세상, 세상의 이반

궤도를 이탈한 삶

[이반의 세상 세상의 이반]

내 얘기를 하려면, 별 수 없이 떠오르게 되는 단어가 ‘단절’, ‘비밀’과 같은 것들이다. 초등학교 때였다. 한 여자 친구와 친구라고 하기에 조금은 끈끈한 우정을 나눈 기억이 떠오른다. 같이 있으면 좋고, 얼굴을 보게 되길 고대하고, 손을 잡으면 떨렸던 것 같다. 자전거를 한쪽에 끈 그 아이가 어스름한 저녁에 집을 향해 나와 함께 걷던 길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때도 같은 반이 되었던 그 아이와 더 깊은 우정(사랑이었다고 지금은 이름붙일 수 있을 것 같다)을 나눌 수도 있었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그 아이를 부담스러워하고, 내쳤던 과정부터 그런 비밀스러운 감정들은 단절되어 버렸다.

나는 내가 언젠가는 남들이 하는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니 그러기를 꿈꾸었다. 그 길은 당연히 거쳐야 하는 인생의 과업과 같은 것이라고 배웠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예상과는 달리 어린 시절 기억에서 삭제되었던 감정들이 내 삶의 한가운데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동성과의 교제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관계가 깊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내가 무언가 다른 길을 걷게 되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게 되었다. 나에 대해 깨달아가고, 내가 원하는 관계를 추구할수록 삶은 비밀로 덕지덕지 덮여져갔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얘기들은 줄어만 갔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실연이라는 경험이 찾아왔다. 나는 내 경험에 대해,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행여나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이 나의 괴로움을 알아채고 관심을 가질까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독한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기억들은 나의 비밀 일기장에나 적혀있을 것들이었다.

이후 관계는 단절에 단절을 거듭했다.
“동성애자는 인정하겠는데, 양성애자는 어딘가 더럽지 않느냐.”
“동성애는 인정해주겠는데, 그네들의 섹스가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불편하다.”
“너는 왜 바보처럼 남자와 연애 한번 못해보느냐.”
“너도 어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서 우리 함께 어디 다니자.”
남자 친구 이야기, 남편 이야기, 결혼 이야기, 결혼식 초대, 새로 꾸린 가족 이야기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내 삶의 중요한 일부, 나의 사랑에 대한 얘기들이 낄 구석은 없어 보였다.

꽁꽁 싸맨 비밀, 단절
나는 조금씩 그런 이야기들을 연기하며 멍하니 듣고 앉아있는 데 지쳤다. 하나 둘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었던 관계들은 차차 멀어지고 정리되어 갔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많은 기억들, 많은 관계들이 뚝뚝 끊어져 나가 있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은데, 다 어떻게 된 것일까…아찔했다.

그렇게 삼십대가 된 지금, 나는 여전히 단절을, 더 많은 비밀을, 더 깊은 슬픔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 큰 아이가 결혼하지 않고, 외롭게 늙어죽을 것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려 노력하며 산다. 나를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그 간절한 바램을 들어드릴 수 없는 슬픔을 예전보다 조금은 익숙하게 여기며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면, 결혼하고 임신하여 남편을 옆에 끼고, 배가 남산 만해져서 나타나는 동생들 곁에서 나는 괜찮다며 끊임없이 주문을 걸어주며 산다. 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친구를 만날 때면, 되도록이면 연애사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둘 사이에 깊이 흐르는 거리감을 인정하고야 만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할 때 비밀은 언제나 죽지 않고 새로이 시작된다.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의 기로에서 누군가 나의 비밀을 알아채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서성인다.

여자와 남자와의 결합이 당연시되는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는 외계인이다. 그런 이질감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매번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이러한 단절과 비밀 속에 허덕이며 살아야 한단 말일까. 나의 가족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 죽을 것인가. 간절히 그렇지 않고 싶다.

나와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나에 대해 온전하게 말할 수 있는 더 많은 외계인들과 만나고, 관계 맺고, 서로 버텨주며 살고 싶다. 꽁꽁 싸맨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서로의 삶을 지켜봐주고, 기억해주며 살고 싶다.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힘든 일은 함께 나누며 살 것이다. 꼭 혈연가족이 아니더라도 자기만의 가족을 꾸리고, 죽는 것까지도 거두어주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린 시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다른 삶을 열심히 꿈꾸고, 펼치고, 현실화하며 살고 싶다. 단절되고, 비밀이 되었던 내 삶의 기억들과 앞으로의 행보들을 차근차근 풀어놓고, 보다 편안히 말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의심 없이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당연시 여기며 사는 사람들과의 교신을 시도해보고 싶다. 아주 조금씩 벽은 허물어질 수 있지 않을까.

덧붙임

* 모글리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