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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히는 것도 부끄러워했는데"

[기획] 인권운동, 임파워먼트를 만나다 (2) 대구 인권운동연대를 만나다

<편집자 주>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인권운동. 그러나 현안 대응이나 정책 생산에 매몰되다 보면 정작 인권의 주체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많이, 자주 만나서 허허로움이 달래지지도 않는다. 인권운동사랑방 건강권 팀은 ‘임파워먼트(empowerment)’ 워크숍을 열어 어떻게 ‘사람’을 만나면 좋을 지에 대해 하나의 실마리를 내어놓았다. <인권오름>은 ‘임파워먼트 워크숍’과 그 준비 과정에서의 인터뷰를 소개해, 정답이 아닌 ‘질문’을 독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아래부터 인권운동연대)‘는 2005년 4월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인권운동연대는 당사자가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임파워먼트를 중심에 두고 활동을 만들어가는 단체다. 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상임활동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권운동연대는 한국사회에서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단체로 보입니다. 금융피해자 인권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면서 특히 사회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처음엔 인권운동이 어떻게 당사자의 삶에 다가갈 수 있고 당사자가 권리 주체로 설 수 있을 지를 논의했어요. 그때 ‘공감 대구 인권 모임’을 결성한 게 인권운동연대의 시작이지요. 거기서 세미나와 토론을 하며 활동을 준비하다가 구체적인 사안과 관련된 활동을 찾았어요.

2002, 2003년 신용대란 후, ‘신용불량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잖아요. 이런 상황은 개개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IMF 이후 노동의 불안정화, 실업, 금융자본의 고금리 등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했어요. 채권자들이 불법추심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마저 박탈당하는 상황에서 심각성을 느꼈고요. 사회권뿐 아니라 자유권도 침해당하는 금융피해자 문제를 보면서 ‘신용불량자가 아닌 금융피해자’의 인권 문제를 고민하게 됐어요.

금융피해자는 수많은 인권침해에 노출되어 있지만 '개인의 잘못'이라는 낙인 때문에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금융피해자들의 한걸음은 그만큼 소중하다. (사진제공 : 인권운동연대)

▲ 금융피해자는 수많은 인권침해에 노출되어 있지만 '개인의 잘못'이라는 낙인 때문에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금융피해자들의 한걸음은 그만큼 소중하다. (사진제공 : 인권운동연대)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을 고민하면서 금융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만나는 활동들을 벌여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책생산이나 이슈파이팅과 같은 일반적인 인권운동의 방식과 달리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나요?

기본권운동이 인권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을 때 금융피해자운동에 있어 주체들의 운동은 한국사회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IMF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속에서 예전부터 존재했던 ‘빈곤의 주체(노점상, 철거민 등)’들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빈곤의 결과로 드러나는 금융피해자들의 위치를 어떻게 재정립하고 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지요.

가까운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금융피해자운동이 일반화되어, 2006년 일본의 대부업 금리를 29.2%에서 20%로 제한하는 데 당사자의 요구와 투쟁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도덕적 해이’라는 논리가 당사자의 주체적 노력과 집단화를 더 막고 있어요. 단 한 번도 금융피해자가 사회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도 금융자본과 정권이 먼저 금융피해자를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이며 금융채무의 책임을 철저히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어요.

금융피해는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을 넓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피해자의 기본권’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사회권이 보편적인 권리로 자리매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은 단순히 정책생산이나 이슈파이팅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매우 구조적이고 중층적인 문제라 당사자의 직접적 요구와 행동이 굉장히 필요하고요.

금융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2005년 8월부터 매주 ‘파산학교’를 시작해서 현재 110차까지 진행됐습니다. 또 파산학교를 하는 과정에서 금융피해당사자 조직인 ‘좋은모임회’를 2006년 3월 결성할 수 있었고요. 현재 40~50명 되는 회원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의 모임인 ‘좋은모임회’까지 만들어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네요. 당사자들을 만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금융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정부는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면서 금융피해자들의 개인적 책임을 말하고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500만 원 이하 생계형 채무자 감면을 말하다가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취소한 것처럼 말이죠.

또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권리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고 무기력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금융채무는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것이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계속 이야기해줍니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라는 불법추심에 직접 저항하고 법적 대응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인권운동연대가 파산학교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좋은모임회'를 만들어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제공 : 인권운동연대)

▲ 인권운동연대가 파산학교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좋은모임회'를 만들어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제공 : 인권운동연대)


당사자들이 권리 주체로 설 수 있도록 개인적 수준에서 임파워먼트하기 위해서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변해야 하는데, 또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 인식이 중요하네요.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수준의 임파워먼트는 분명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서로 맞물려있는 듯합니다. 이런 임파워먼트 과정에서 파산학교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세요.

파산학교는 네 시간 동안 진행됩니다. 그 중 두 시간을 투자해 ‘왜 금융피해자인가’라는 인권교육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채무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사자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걸 말하고, 면책 뒤에서 사회적 차별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요. 또 두세 달에 한 번씩 ‘좋은모임회’가 모임을 시작하기 전 30분 정도를 내어 사전 강연을 합니다. 이때는 기초생활보장, 건강보험 같은 권리와 사회 문제들에 대해 학습하고 있어요.

하지만 7~8개월 걸려 파산 면책을 받고 나면 당사자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빠져서 활동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보면 권리에 대한 인식도 줄어들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면책 이후에도 신용등급이 10등급이고 취업보증도 못 받는 등 사회적 차별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활동하다보면 그 점이 제일 안타까워요. 정작 사회 인식이나 제도가 바뀌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니 또 개인의 임파워먼트에도 한계가 생기기 마련이고요.

파산학교나 ‘좋은모임회’만으로 당사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만들어지거나 모두 권리 주체로 임파워먼트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다른 활동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실제로 당사자 모임을 당위적으로 강요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구체적 사업을 벌이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현재 당사자들 15명 정도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있어요. 거기서 정기모임에서 다룰 안건들에 대한 고민을 하고 회원들을 챙기려 하고 있습니다. 운영위원들을 구 별로 나눠서 각 구에 있는 회원을 각자 책임지게 한다든지, 돌아가면서 회원들을 만나는 자리를 가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해서 당사자들이 임원을 맡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좋은모임회’ 산하에 ‘주말농장’ 모임을 꾸려서 회원들 간의 일상적 친목과 소통을 담보하는 공간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좋은모임회’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과 조건이 매우 불안정한 조건에 있어 주말 농장 모임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구체적 사업으론 생활안정자금의 현실화를 요구하기 위한 ‘생활안정자금대책위원회’를 준비 중입니다. 생활안정자금은 지자체별로 책정되어 있는데 대구에서는 예산 110억 원 중에 1억 8천만 원을 썼어요. 금리는 2~3%지만, 보증인이 필요하고 ‘2년 거치 2년 상환’이라 빌리기 까다로운 조건이에요. 제주도는 보증인이 없어도 되고 ‘5년 거치 5년 상환’인데요. 대구에서도 지자체 별로 생활안정자금을 현실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요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이 바쁘시겠네요. 그래도 활동을 하면서 흐뭇한 기억들이 있을 듯한데, 금융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서로 임파워먼트되는 경험으로 고무됐던 경험이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지난 해 11월 21일에 16명이 금융감독원에 가서 집회를 했어요. ‘차압증’ 딱지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할 때 많이들 좋아하셨습니다. 무기력해 하는 당사자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집회였어요. 그 전까진 사진 찍히는 것도 겁내고 부끄러워했는데 오히려 직접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권리의식을 가지게 되는 걸 느꼈습니다.

흔히들 투쟁이나 직접행동에 당사자가 나서는 것은 임파워먼트의 최종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권운동연대의 경험을 보면 직접행동이 임파워먼트의 과정이 되기도 하는 등 임파워먼트를 단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짧은 생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인권운동연대와 좋은모임회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나가려고 하는가요.

금융피해자운동이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운동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좋은모임회’는 당사자의 자치모임으로, 의사결정과 집행을 함께 하는 역할로 자리매김해야 할 거예요. 그러한 과정에서 인권운동연대는 파산학교를 집행하며 ‘좋은모임회’의 인적·물적 토대를 엮어내는 단위로서 역할 해야 하고요. 이런 기대도 쉽진 않죠. 지난한 경험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