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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불확실한 가운데 희망은 있다(The Optimism of Uncertainty) - 하워드 진(Howard Zinn), 2004.9.30 Znet 논평

2007년의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새해가 ‘밝았다’고들 얘기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새해’라는 이름을 붙인 만큼, 좋게 달라져야 할 세상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가는 날들이었으면 한다.

오늘은 새해인 만큼, 담담하지만 강력하게 ‘희망’을 드러낸 글을 골라보았다. 인권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널리 알려졌고 국내에도 많은 책이 소개된 하워드 진의 글이다.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새해에도 서울역사 앞에서 유인물을 돌리고 있는 KTX 승무원들을 떠올리며 마음 속 기차놀이를 해본다.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들을 이어붙이고 붙여 꼬리가 아무리 길더라도 끝까지 같이 안고 가는 그런 기차놀이를 생각해본다.

2007년의 ‘인권문헌읽기’는 ‘경제 사회적 권리’를 주제로 한 문헌들을 중심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불확실한 가운데 희망은 있다(The Optimism of Uncertainty) - 하워드 진(Howard Zinn)
- 2004.9.30 Znet 논평


사람들을 돌보는 노력을 권력자들이 행한 일과 견주어 보기가 무색해지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어떻게 나는 사회에 계속 관여하고 겉보기로나마 행복하기를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까?

내가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게 아니라, 모든 패를 돌리기 전에는 게임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도박’이라는 은유는 숙고할만하다.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은 이길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것이다. 게임을 하고 행동에 나설 때에야 적어도 세상을 바꿀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현재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들의 갑작스런 붕괴, 사람들 사고의 엄청난 변화, 압제에 저항하는 예기치 않았던 봉기,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권력체제의 급속한 붕괴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놀랐던가를 우리는 잊고 있다.

과거 수백 년의 역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역사의 철저한 불예측성이다. 반봉건제라는 가장 지체된 상태에 있던 러시아에서 짜르(전제군주)를 타도한 혁명은 선진 제국주의 세력을 경악시켰을 뿐 아니라 레닌 자신조차 놀라서 급히 페트로그라드행 기차를 타게 했다.

누가 2차 세계대전의 기괴한 변화를 예상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전후 세계의 형상을 어느 누가 사전에 그릴 수 있었는가.

미국도 마찬가지의 현실에 직면했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격을 퍼부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전면전을 벌였지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일 머리기사들 속에서 강력한 권력이 힘없는 이들에게 실패하는 다른 예들을 본다.


이렇게 엄청나게 놀라운 목록들을 볼 때, 무기와 돈을 갖고 있고 그것에 완강하게 집착하는 자들의 명백히 압도적인 권력 때문에 정의를 향한 투쟁이 결코 포기돼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그 명백한 권력이 폭탄과 달러보다 덜 중요시된 인간적 자질-도덕적 열정, 단호함, 단결, 조직, 희생, 지혜, 독창력, 용기, 인내 등-앞에서 그 취약성을 되풀이해서 드러냈다. (미국) 앨라배마와 남아공의 흑인들이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베트남의 농부들이건,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소비에트의 노동자와 지식인들에 의해서건, 힘의 우세에 대한 그 어떤 냉정한 계산도 자신들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확신한 민중을 제지할 수는 없다.

나는 세상에 대한 친구들의 비관(그게 어디 내 친구들 뿐이겠는가)에 맞춰보려 했지만, 도처에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일에도 불구하고 내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특히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는 젊은이들이 그렇다.

나는 가는 곳마다 희망을 주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한 줌밖에 안되는 소수의 활동가들 뒤에는 비정통적인 사상에 개방적인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십상이고, 그래서 그들은 버티는 동안 산 위로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로 언덕 정상에 이르자마자 굴러 떨어지는 무거운 돌을 다시 정상까지 거듭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음)같은 절망적인 인내심을 갖고 버틴다.

하워드 진<출처; www.why-war.com>

▲ 하워드 진<출처; www.why-war.com>



나는 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전국적인 운동이 없어서 낙담한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운동의 잠재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혁명적인 변화는 한 번의 격변하는 순간(그런 순간을 조심하라!)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놀람의 연속, 보다 괜찮은 세상을 향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위대한 영웅적 행동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들이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 곱으로 늘어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때조차도, 우리 자신이 다른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뭔가 가치 있는 일에 깊이 관련됐다는 사실에는 즐거움과 성취가 있다.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낙관주의가 반드시 태평스럽고 어딘가 극단적으로 감상적인 휘파람 소리인 것은 아니다.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가 잔인성의 역사일 뿐 아니라 연민과 희생과 용기와 친절의 역사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기초한 낙관이다. 이 복잡한 역사 속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최악의 것만을 본다면, 그것은 뭔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사람들이 당당하게 행동했던 시대와 장소들-그런 예는 아주 많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행동할 힘을 얻을 것이고, 적어도 팽이같은 이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방법으로라도 우리가 행동한다면 우리는 위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는 현재의 무궁한 연속이며, 우리 주변의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인간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현재를 사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운 승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