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기후정의행진은 ‘광장을 잇자’는 기조로 제안되었다. 매년 9월이면 열리는 기후정의행진이지만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파면 및 조기대선으로 새로운 정부가 집권한 이후 열리는 기후정의행진이라면 어때야 할까? 누구나 말하듯 대통령만 바꾸자고 광장에 나왔던 게 아니라면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져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며 <평등으로 가는 공공성 행진단>이 만들어졌다.

평등으로, 공공성으로
이름이 길어 비공식적으로는 ‘공진단’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름이 길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기후정의로 광장을 잇는 것의 의미가 여전히 거리의 집회와 시위가 중요하다는 정도로 이해될 수는 없었다. 또한 이재명 정부는(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촛불 정부라 했던 것처럼) 스스로 광장의 계보를 잇는 정부로 자처하기도 한다. 어떤 기후정의인가, 어떤 민주주의인가 질문을 우회할 수가 없다.
비상계엄 이후 극우의 세력화를 지켜보며 파면 이후의 민주주의는 평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목소리들을 되새기기로 했다. 기후정의도 그 핵심에 평등이 있다. 기후위기를 낳은 데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하고 산업구조에서부터 우리의 일상까지 전환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권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광장을 잇는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시 ‘가자! 평등으로’ 외쳐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그런데 평등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고 강조하거나 차별 행위들을 없애다보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누리기 위해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가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되고 순환될 때, 그래서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억압과 예속을 받아들여야 하는 위치가 사라질 때, 평등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가 해체해 온, 특히나 신자유주의와 함께 더욱 격렬하게 파괴된 공공성의 영역을 다시 탈환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평등의 관건이 된다. 평등으로 가기 위해 공공성을 강조해야 했다.
함께 외치는 기후정의
공공성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의료나 주거와 같은 영역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식량과 농업, 이동과 교통, 돌봄과 산업 등 기후위기 시대 우리가 도전해야 할 전환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더 많은 이윤이 보장되는가 하는 질문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잠식해온 결과가 기후위기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전환의 과정은 더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전환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이나 기술을 넘어 모두가 참여하는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한다.
각자 고유한 의제와 요구를 가진 단체들이 공진단으로 모인 것 자체가 그런 정치의 시작이었다. 차별금지법, 성소수자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이주노동자의 권리, 청소년의 권리 등을 요구하는 단체들과 재생산정의, 공공의료, 주거공공성, 젠더폭력 철폐, 공공재생에너지 등을 위해 싸우는 단체들, 팔레스타인 해방과 새만금신공항 반대, 반도체특별법 폐기 등 여러 현안에서 분주한 단체들이 공진단으로 함께 움직였다.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는 광장에서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정치로 포획되지 않을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던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도 함께 했다.
공진단으로 모인 단체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온갖 숫자들로 설명되는 ‘성장’의 약속보다 우리가 마주하는 얼굴들에서 존엄의 가능성을 찾는 돌봄과 연대가 소중하다는 걸 깊이 아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본주의가 설파해온 성장의 약속이 우리의 돌봄과 연대를 무너뜨려왔다는 인식을 깊이 나누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를 강조한들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기후와 에너지도 AI와 미래를 위한 자원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이 기후정의를 향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이다.
함께 걷는 기후정의
공진단은 기후정의행진에 앞서 새만금신공항 백지화를 요구하는 ‘새, 사람 행진’에 참여하고,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했다. 기후정의행진 당일 더욱 많은 사람들과 우리의 고민을 나누기 위해 신문을 제작해 배포했다. ‘공공성으로 평등-하자’ 구호를 외치며 함께 행진하고 마무리집회도 함께 했다. 평등으로 가는 또 다른 자리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로 계속 만나자고 약속했다.


하루의 행진이 평등을 약속하거나 공공성을 보장할 리는 없다. 공진단으로 모여 함께 만들고 나눈 이야기들이 구체적인 투쟁들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특히나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일정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으며 재생에너지는 점점 더 산업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포획되고 있다. 지역을 부추기는 개발 공약은 전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재난과 재해를 줄이자는 말들은 떠들썩한데 취약한 이들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생명들이 무너지는 전선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에 맞서 싸울 것인가. 공진단이 서로에게 체제전환을 위한 질문이자 실마리가 된다면 공진단으로 함께 걸은 하루가 하루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기후정의가 민주주의다
윤석열은 파면되었으나 극우는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여기저기 포진한 엘리트집단의 일부를 개혁과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일에 열심이다. 어쩌면 정부여당은 극우의 온상이 거기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엘리트집단은 극우의 증폭기일 뿐이다. 극우는 일상에서 자라나고 있다. 불가능한 성장의 약속을 퍼뜨리며 모두를 투자자로 만드는 사회가 극우의 온상이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헐뜯고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을 찾기 어려운 사회.
민주주의는 사회의 방향을 돌릴 때에만 살아날 수 있다. 기후정의로 광장을 잇자는 올해 기후정의행진의 기조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게 있음을, 그것이 민주주의임을 말하고 있다. 자본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배열되는 사회와 단절하고, 서로 돌보고 살리는 노동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일. 그것이 기후정의고 민주주의일 것이다. 평등으로, 공공성으로, 투쟁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