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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고] 민중들의 참여하고 통제할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WTO 홍콩각료회담 저지투쟁이 던지는 지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

드디어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담이 홍콩에서 막을 올렸다. 이에 맞추어 11일부터 몸을 풀기 시작한 반세계화시위대의 직접행동도 13일 시위와 함께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위의 선봉에는 역시 한국투쟁단이 있었다. 홍콩 현지의 분위기를 감안해 강력한 시위 방법을 찾기가 몹시 어려웠던 상황에서 묘안이 나왔다. 부두에서 겨울 바다에 몸을 내던져 각료회담이 열리는 국제회의장까지 헤엄쳐서 가는 것. 전농이 앞장을 섰다. 60여명의 농민들이 15도의 쌀쌀한 날씨에 대부분 속옷차림으로 차례차례 "Down Down WTO"를 외치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시위대는 전농의 비폭력적이면서도 강력한 그리고 창조적인 방식의 시위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바다에 뛰어든 한국투쟁단. 멀리 각료회담장인 컨벤션센터가 보인다.

▲ 바다에 뛰어든 한국투쟁단. 멀리 각료회담장인 컨벤션센터가 보인다.



한편 각료회담장에서는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소속 농민운동가를 비롯한 수십명이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의 개막연설이 시작되자마자 일제히 비정부기구(NGO) 지정석에서 일어나 구호를 외쳤다. 'Down Down WTO'. 'WTO가 농민들을 죽인다', 'WTO가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 프랑스 사회당 출신답게 파스칼 라미는 이 '소란'을 제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막연설을 강행했다.

11일 홍콩민중연대가 개최한 집회에는 홍콩현지 이주노동자들을 중심으로 5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홍콩정부청사까지 행진을 하며 6차 WTO 각료회담을 개최한 홍콩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역시 홍콩민중연대가 개최한 13일 행진에는 4000여명의 반세계화 시위대가 참석했다. 이중에서 1500명이 한국에서 온 참가단이며 그중 1200여명이 농민들이다. 이들은 국제회의장 옆 부두 하역장까지 행진을 하며 현지 대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광둥어로 '왜 한국의 농민들이 WTO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선무방송을 하며 유인물을 돌렸다. 하역장에 도착해 집회가 '평화적으로' 해산될 무렵,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아래 한농연) 소속 농민들이 상여를 메고 경찰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들은 길을 막고 있는 경찰에 강력히 항의하며 상여를 불태웠고, 경찰들은 최루액과 곤봉으로 강경하게 진압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나온 한 투쟁단원

▲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나온 한 투쟁단원



이 과정에서 자칫 한국투쟁단만의 고립된 싸움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싸움을 '지구적 수준'으로 용감히 끌어올린 사람은 홍콩의 베테랑 노동운동가이자 민주주의 투사인 롱헤어(Long Hair)라는 별명의 홍콩입법의원(한국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한농연과 민주노총 참가자들과 함께 대오의 맨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최루액을 온몸으로 맞았다. 진정한 연대가 무엇인지 백마디 말을 뛰어넘은 모범이었다. 그의 용감한 연대로 인해 시위 다음날인 14일 홍콩의 언론들은 '한국농민폭발', '폭력제1성' 등 선정적인 제목들을 뽑기는 했지만,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가 한국참가단과 함께 최루액을 맞는 장면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료회담장으로 행진하는 한국투쟁단

▲ 각료회담장으로 행진하는 한국투쟁단



몇몇 활동가들은 "우리가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가 폭력을 당한 것이다!"(We are not violent, but our rights are violated!)라고 경찰들과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폭력이 발행하는가 안하는가에 대해서만 온통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언론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들은 "식량에 대한 권리, 생계수단에 대한 권리, 직업에 대한 권리, 나아가 생명에 대한 권리가 저들에 의해 말살되었다. 우리는 당연히 저 회의장에 들어가 우리의 생명에 대한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외쳤다. 왜 우리의 몸싸움에 대해서는 '폭력'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저들이 우리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냐는 항의였다.

이 모든 사건들은 지구화 시대에 WTO를 비롯한 가장 강력한 지구적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구화 시대에 지구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민중들의 정책결정 참여권 혹은 시민권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다. WTO 회의장 안에 조그맣게 허락된 NGO들의 공간을 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디어를 통한 감시와 압력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일례로 뉴질랜드의 저명한 반세계화운동가이자 이곳저곳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이기도한 오클랜드 대학 법학부 교수 제인은 저널리스트 자격을 WTO에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전문저널리스트가 아니며 미디어 자격부여가 '남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주류 언론이 아닌 독립 미디어와 저널리즘이 WTO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냉전이 해체되기 전까지 대다수 나라에서, 특히 한국을 비롯한 저개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보편적인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즉 일국적 수준에서 민중들의 참여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사회주의적이었건, 자본주의적이었건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어찌되었건 독재를 몰아내고 민중들의 참정권을 쟁취하는 이런 절차적 민주주의 '혁명' 혹은 '개혁'이 완수되자마자 민중들은 새로운 '참여와 민주주의 공간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 지구적 정책 결정과정에서 도대체 민중들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더구나 국가 정부간의 합법적 연합체인 유엔의 관할 안에 있지도 않은 WTO와 같은 기구에서 민중들은 어떻게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홍콩현지에서 바다에 뛰어들고 상여를 불태우고 최루가스와 곤봉 세례를 받는 이 모든 풍경들이 우리에게 그 답을 아주 간단하게 알려준다. 지구적 정책결정과정에서 민중들이 참여하고 통제할 유일한 공간은 단 하나. 국적과 인종과 직업을 넘어 전세계에서 온 시위대가 "꽁 이 사이 마오"(抗議世貿, WTO를 반대한다)를 외치는 이 곳. 길거리이다.
덧붙임

엄기호 님은 '팍스로마나'(PAX ROMANA)의 동북아시아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