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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교제폭력 대응 넘어 성평등한 사회로

여성살해라는 재난을 멈춰 세우려면

여성살해라는 재난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보고서 '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해 분석'에 따르면 2024년 남편이나 애인 등으로부터 최소 181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살인미수 등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74명, 자녀나 부모, 친구 등 주변의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최소 650명이다. 최소 13.5시간마다 한 명의 여성 또는 주변인이 죽거나 죽을 위험에 처했다. 최근 동거인, 배우자, 직장동료 등 남성 파트너에 의해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잇따르며, 교제폭력의 심각성이 다시금 대두됐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관계기관은 대책을 내놓고 있다. 매일 여성이 살해되는 재난은 멈출 수 있을까.

교제폭력 대책 넘어, 여성이 안전한 사회인가

2000년대 이후 친밀성을 추구하며 이루어지는 연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데이트폭력 문제가 등장했다. 불운한 피해자-일탈적인 가해자라는 개인 간 문제로 여기는 사회를 향해 여성폭력의 현실을 드러내며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는 차별적인 구조의 문제로 다룰 것을 촉구해왔다. 2017년 3만6267건이었던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2024년 8만8394건으로 증가했다. 이런 증가세에는 더 이상 ‘사랑싸움’이 아닌 폭력의 문제라는 인식이 쌓여온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사이 여성혐오가 가시화되고 성차별을 부정하는 흐름과 함께 폭력의 양상은 다양하고 극심해지기도 했다.

“휴대폰을 뒤져보다가”, “원피스를 입고 나가서”,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했기에”…. 통제는 교제폭력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성이자 중요한 징후다. 친밀한 관계에서 통제는 관심이나 애정으로 여겨지기도 해서 폭력으로 인지하기 쉽지 않다. 여기에는 직접적이고 신체적, 물리적인 폭력만 ‘진정한’ 피해로 보는 사회적 인식도 영향을 미친다. 통제의 기저에는 동등하지 않고 위계적인 관계가 있다. ‘사랑’으로 포장해 주변 관계와 자원을 차단하고 종속성을 강화하며 피해자가 고립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조건과 함께 집, 학교나 직장, 가족과 친구 등 신상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며 대응을 주저하는 이유가 된다.

경찰에 신고해도 가해자와의 분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조건이 이어진다. 보호조치의 절반 이상이 스마트워치 지급에 그치고, 가해자가 언제든 찾아와 보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일상을 포기해야 했다. 수차례 신고했고 보호조치를 받던 중에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반복되면서 최근 경찰은 교제폭력에 적극 개입하겠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스토킹처벌법을 확대 적용하여 피해자-가해자가 즉각 분리되도록 하고,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격리를 강화한다고 한다. 뒤늦었지만 그간 제대로 되지 않았던 피해자 지원, 가해자 처벌을 바로 세워가는 행보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경찰의 보호를 바라는 것만으로 여성은 안전할 수 없다. 교제폭력 대책을 넘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왜 계속 실패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관계와 경험을 드러내고 말할 수 없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경험을 여성은 온전하게 드러내고 말하기 어렵다. 교제관계의 경험은 여성과 남성에게 전혀 다르게 위치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중적인 성규범 속에서 성관계가 여성에게는 드러내서 좋을 게 없는 것이지만, 남성에게는 남성성을 드러내는 자원이 된다. 여전히 ‘순결’이 강요되는 여성에게 성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문란한’ 것으로 낙인되는 반면, 남성에게는 적극적인 욕구로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성차별적 인식 속에서 가까운 주변에조차 교제관계에서의 경험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관계와 경험을 드러내거나 말하기 어렵게 하는 사회에서 어떤 피해는 주목되지만 어떤 피해는 누락된다. 여성을 말할 수 없게 하며 취약한 자리에 붙박아두려는 사회에서 폭력은 자라난다. 그리고 폭력은 차별의 구조를 따라 이동한다. 교제폭력을 주로 20·30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처럼 여기는 경향 속에 부정되는 경험과 관계가 있다. 성을 금기시하며 연애가 ‘허용’되지 않는 청소년에게 교제관계는 숨겨야 하는 것이 된다.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성커플의 경험은 비가시화된다. 드러내고 말할 수 없는 조건은 폭력에 대응하는데 더 취약하게 만든다.

친밀한 관계는 누구나 삶을 꾸려가는데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친밀성은 동등하고 상호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함께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성애-혼인을 기반에 둔 결혼한 가족이 아닌, 다양하게 친밀한 관계를 구성하고 실천하는 삶의 방식들이 존재한다. 이를 드러내고 독려하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가는 여러 실천을 배울 수 있는 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한 관계를 구축해가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여성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듣지 않는

“감히 헤어지자고 했다.” 이별통보가 교제폭력의 주된 범행동기로 짚어진다.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거절살인’이라는 말이 따라붙는 교제폭력은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묵살하고 제압하며 나타난다. 이는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남성 개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여성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만인 사회가 있다.

데이트폭력에 함께 나타나는 스토킹 문제가 오래전부터 이야기됐다.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며 접근해 위협을 느끼게 하는 스토킹은 경범죄로 취급되었고 범칙금 몇 만원이 전부였다. 2021년 스토킹처벌법이 만들어졌지만, 이를 적용하는데 여성의 위치는 고려되지 않았다. 스토킹을 처벌하려면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피해자가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호소하고 입증해야 한다. 여성의 의사에 반하는 폭력이라는 스토킹의 문제를 남성의 위치에서 바라보며 가해자를 두둔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연인관계 회복을 위해 마음을 전한 것에 불과해서’, ‘부재중 전화 기록일 뿐 실제 통화로 이어지지 않아서’, ‘연락한 기간과 횟수가 연속적이라고 볼 수 없어서’라며 여성이 느끼는 위협은 가볍게 치부되거나 부정당하기도 했다.

동의 없는 성관계를 범죄라 보지 않는 현행 강간죄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좌표다. 폭행과 위협을 강간죄 성립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여성의 의사와 무관하게 벌어진 성폭력이어도 폭행이나 위협이 있었는가를 중심으로 협소하게 판단해왔다. 2022년 전국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 상담 4765건 중 62.5%가 직접적인 폭행과 협박 없이 발생한 것이었다. 지위와 권력의 차이로 강요된 상황에서, 음주와 약물로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폭행과 협박 없이 성폭력은 발생한다. 자유롭고 명확하게 의사를 드러내기 어려운 조건을 성관계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동의로 간주한다. 남성의 시선으로 ‘속으론 좋은데 겉으론 싫은 척하는’ 것이라며 여성의 거부를 ‘진정한’ 거절로 보지 않고, 폭력은 폭력이 아닌 것으로 뒤바뀐다. 여성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듣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폭력을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평등 사회로 나아갈 때

여성폭력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제기해온 피해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싸워온 여성운동으로 여러 제도와 정책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국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뿌리내리고 있는 성차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문제제기를 제대로 듣지 않으며 회피해왔다. 성별화된 폭력이라는 관점 없이 여성폭력을 치안의 문제로 다루어왔다. 교제폭력 대책 강화를 이야기하지만,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면 여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성이 안전한 사회, 모두가 안전한 관계는 안전대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폭력에 취약한 여성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나아갈 때 가능하다. 그 열쇠말인 성평등의 기치를 분명히 하는 사회에서 여성폭력이라는 재난을 멈춰 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