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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성폭력 대응, '처벌과 감시'를 넘어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

한 초등학생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사회는 성폭력 범죄에 관한 논의로 뜨겁다. 연일 쏟아지는 정부의 대책, 그동안 수사과정이나 재판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경험했던 사연들이 인터넷매체, 신문 등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성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공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이 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우선,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작동되는지 진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폭력 신고율 6%에서 보듯이,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은 드러나지 않은 영역이다. 성폭력 사건 30%가 가족 내에서, 80%가 피해여성이 아는 사람이라는 상황은 성폭력 사건의 가시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또 다른 한편, 성폭력에 대한 개념이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현실(성폭력의 심리·정서·언어·성적 차원을 무시한 채 신체적 폭력으로만 의미화한 것) 역시 성폭력 사건을 사회화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최근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폭력 사례가 속속 보고되고 있는 현상은 그만큼 어떤 행위가 성폭력인지조차 몰랐던(?) 우리 사회의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성폭력은 여성과 아동의 존엄성을 해치는 명백한 인권침해이고, 성폭력이 인권침해임을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는 여성과 아동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또한 성폭력 담론이 남성 중심의 사회질서에서 작동되다 보니, 성폭력 관련 입법들과 그 법의 작동과정은 남성주의 시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수사과정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면서 발생하는 2차 성폭력이 존재하고, 재판과정에서는 피해자가 재판부에게 항거불능 상태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을 낳게 했다. 그럴 때, 지금 쏟아지고 있는 전자팔찌, 야간통행제한 등 '처벌과 감시' 중심의 대안은 어찌 보면 매우 제한적이고 한계적인 접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때문에 과연 이런 조치가 지금 우리에게 우선순위인지 묻고 싶다. 성폭력사범 몇몇만 가두거나 이들에게 전자팔찌를 끼우면, 모든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정치인이 이른바 '정서와 인기'에 영합한 정책을 쏟아내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성폭력 사범은 일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특별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성산업과 가부장적인 질서를 유지해온 사회구조와 성의식의 반영임을 직시하며, 이런 책임으로부터 뒤로 숨은 정치인에게 각성을 요구한다.

현재 한나라당 및 열린우리당, 정부가 내놓은 '처벌과 감시, 격리' 중심의 대안은 이미 사회적으로 드러난 사건에 대한 후속조치라는 점에서 잠재적 피해자를 근원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는 미흡하다. 잠재적 피해자와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미 성폭력이 발생한 상황 이후에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보다는, 성폭력 예방 중심의 접근과 피해자에 대한 지원체계를 우리사회가 어떻게 마련할지에 관한 논의로 중심을 바꿔야 한다. 인권침해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처벌이 손쉬운 대처는 될 수 있을지언정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성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공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성폭력'의 개념을 성인지적(gender) 시각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여성주의 운동진영에서 일찍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여성차별철폐협약은 "사적,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신체적, 성적, 심리적 해악과 여성에게 고통을 주거나 위협하는 강제와 자유의 일방적 박탈 등 성별제도에 기초한 모든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매우 제한된 협의의 성폭력 담론을 넘어 여성주의 시각으로 확장된 성폭력 담론은 드러나지 않는 성폭력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성폭력 범죄가 발생했을 때, 성폭력피해자를 보호·지원하는 인권친화적인 형사·사법절차를 마련하고, 관련 법집행공무원들의 인권교육을 통한 인권감수성을 높이는 일은 시급히 해야 할 과제이다. 성폭력에 대한 피해자 유발론이나 성폭력 범죄를 가쉽성 기사로 처리하는 언론의 접근도 시급히 교정해야할 태도이다. 또한 성폭력범죄의 형량에 관해서는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정리해보도록 하자. 성폭력 범죄자의 재범방지를 위해서는 교육과 치료가 병행된 재활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사회적으로 성인지적 시각에 기초한 성폭력 예방교육 및 홍보를 강화하며, 성산업을 유지시키는 회식문화의 변화를 이루어내자. 지금 당장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해야 할 과제가 많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