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기획> 직접민주주의의 씨앗 ② 국민발의제

조례제정 과정을 통해 엿본 국민발의의 가능성

올해 초 국회 정문 앞에서는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FTA를 반대하며 전국에서 상경한 농민들, 파병반대를 외치며 노숙농성을 펼친 국민들, 그럼에도 결국 국회의 결정은 분노와 허탈함만을 안겨주었다. 국회가 민의를 팽개치고 국민은 국회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역할이 일상적으로 진행되어 국민은 정치적 냉소에 빠졌다. 민의 배반의 절정이었던 탄핵정국에서 마침내 국민발의제 등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하자는 요구가 일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방자치단위에서의 주민발의를 통한 조례제정 운동은 국민발의제의 가능성과 도입 효과를 타진케 한다.

전라남도 학교급식조례제정을 시작으로 서울·경기에서 같은 내용의 조례제정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며 부산에서 부산보육조례, 경기도 성남시에서 공공의료기관 설립조례운동이 자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조례제정운동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현 지방자치제도의 한계 둘 다를 드러낸다.


정치적 관심·의식 월등히 고취

지난해 9월 전남에서 직영급식 원칙과 식재료의 우리농산물 사용, 무상급식 대상확대 등의 내용을 담은 학교급식조례를 주민들이 발의하여 전남지방의회가 통과시켰다. 조례제정을 위해 주민들에게 밀착해 운동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진정한 주권자로 한 발짝 다가갔다. 당시 학교급식조례제정전남운동본부 공동대표였던 전종덕 도의원(민주노동당)은 "행정에서 객체로 있던 사람들이 주체로 일어섰다"며 "선거 때만 자신의 대표를 뽑던 형태에서 상시적으로 행정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전 의원은 또한 "처음에 주민들은 행정이나 정치적 과정에 낯설어 하고 복잡해하다가 주민발의 이후 도의 전반적인 도정과 의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주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대의제 밖의 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민 하나 하나가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의 혼란을 우려한다. 이에 대해 전 의원은 "집행되는 과정에서 설사 혼란이 있더라도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이 더 많다"고 말한 후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어떻게 혼란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혼란야기는 핑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여전히 한계 많은 현행 주민발의제

지난해 7월부터 의료체계가 취약했던 성남에서는 공공병원 설립을 위한 조례제정운동이 진행되었다. 주민들이 의료에 대한 많은 필요를 느꼈던 만큼 자신들의 생활과 관련된 일을 직접 구상하고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2주만에 청구인 정족수 1만 5000명을 초과하는 2만명이 서명했고, 건강권 확보 시민 걷기 대회는 7천여명이 참여해 병원 설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난 3월 25일 성남시의회는 '시립병원설립조례'를 안건으로조차 상정하지 않았다. 시의회의 파행적인 운영으로 주민들의 요구가 좌초한 것이다.

그러나, 주민발의를 통한 조례제정 과정에서 얻는 성과는 '급식조례제정 성공'에 못지 않다. 성남시립병원설립을위한범시민추진위원회 김현지 사무국장은 "조례안 심의가 진행되는 시의회에 주민 100여명이 방청을 와서 방청석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관심이 많아지고 자치사안 결정 과정도 많이 알게 됐다"며 "주민들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이 고양되는 등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남의 주민들은 의회가 주민들의 요구를 파행적으로 거부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의회의 결정만을 바라보는 주민의 처지와 주민의 요구에 아랑곳 않는 의회가 주민의 요구를 배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 사무국장은 "주민들은 '이렇게 많이 원하고 있는데도 자치단체장이나 시의회에서 안 받아 주면 안 되는 거구나'하며 많은 한계와 좌절감을 느꼈다"며 "시의원들이 개인적인 이해로 반려될 수 있는 구조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성남 사례는 주민발의는 허용되지만, 여전히 결정은 의회가 하는 현 구조를 넘어 주민투표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주민투표의 씨앗, 국민발의로 자라야

해외의 사례는 국민발의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 21개 주가 주민에게 법률 발의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평균 5%(2%에서 15%)의 서명으로 발의안을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유권자의 1/50 이상의 서명으로 조례의 제·개정과 폐지를 요구할 수 있다. 최근 병원의 존속·확충, 미군기지의 정리·축소 등이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된 조례들이다. 스위스는 1989년 '스위스사회주의청년단'이 주도하여 발의된 '군대폐지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투표결과, 발의안 통과는 부결됐지만, 군대개혁안을 담은 군대법 통과에 기여한 바 있다.

아직까지 우리 헌법 40조는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국민들이 자신의 삶의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은 여전히 '입법기관'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파병동의안에 반대하는 평화의 목소리를 담은, 국민의 먹거리를 좌우하는 한-칠FTA 비준안에 대한 거부의 뜻이 담긴, 최저임금 현실화를 강제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발의제를 이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