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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진보운동의 새로운 전략이 움트기를

[기획] 평택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의미 ④ (끝)

인권운동과 평화운동, 반제·반미운동 등 전체 사회운동 진영의 눈길이 평택으로 모아지고 있다. 지난 7월 10일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군기지 확장 대상 지역인 평택 대추리에 모여 평화대행진을 진행하며 '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반도 평화 실현'을 한목소리로 외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은 50여 년이 넘는 역사 동안 왜곡되어온 한미 관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고 있고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 미국의 일방적 군사 제국주의 전략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미국이 군사 재편 전략을 스스로 강제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한 폭로와 거스름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 군사재편 전략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운동', '대중국·대북을 겨냥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대항해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평화운동', '미일동맹의 강화에 발맞춘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견제하고 동북아 평화를 지키는 운동' 등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 앞에 수식어로 붙는 운동의 의의들은 '무겁고 거대하다'.


팽성 들녘에서 다시 살아난 민주주의

하지만 7월 10일보다 훨씬 이전부터 날마다 평택에서 촛불을 밝혀온 이들이 있다. 미군기지 확장 대상 지역인 팽성읍 주민들은 330여 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촛불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처음 촛불을 들고 모인 이유가 '미국의 군사재편 전략에 반대하기 위해'라거나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라는 식의 '거대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한평생 살아온 내 집, 내 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학술적인 논리로 미 제국주의의 부당함이라든가 전문가적인 논리로 미 군사재편 전략의 문제점을 조리있게 설명해내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 땅은 우리 목숨, 끝까지 지킨다'는 각오로 정부, 나아가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정부는 미군기지의 평택으로의 이전과 확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주민들의 의사를 배제해왔다. '미국이 결정하면, 우리는 강제로 집행하고, 너희들은 죽은 듯이 따르라'는 게 우리 정부의 일관된 태도였다. 땅만 바라보고 농사를 업으로 삼아 평화롭게 살아온 팽성 주민들에게 정부는 더 이상 '나랏님'이 아니다. 이들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의 내용이 바로 나의 문제이자 민주주의의 문제임을, 아무리 '나랏님'이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훼손한 경우에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경찰들이 그게 미쳤지.…아니 우리나라 국민이먼은 농민을 받들으고 농민의 뜻을 받어줘야지. 농민을 갖다가 그냥 다 싹 죽이먼 저희는 어떻게 밥먹고 살을 거여? 다 농민들 세금 내고 다 이래서 밥먹고 사는 거 아녀 저희가. 그런건데 그거를 몰르고 저희 당정 살 궁리만 해고. 미군들만 덮어주고 위해주고 허먼 미군들이 저희들 밥멕여줘? 지금 뭐여. 미군들도 다 우리 한국나라서 다 돈주고 다 멕여살리는 거라고 그러대?" (대추리 김월순 씨(67세), [출처] 평택범대위 www.antigizi.or.kr)


산리즈카 투쟁, 일본의 '고도성장'에 브레이크를 걸다

일본에서는 이미 1966년부터 산리즈카에서 시작된 나리타공항 건설 반대 투쟁의 경험을 통해 정부 정책의 민주주의 절차 훼손의 문제점과 지역 주민 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들을 쌓아왔다. 1966년 7월 일본 정부가 공항예정지를 결정할 당시, 정부는 지역 주민들과 일체의 대화도 하지 않고 극비리에 사업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가 국제공항 건설 예정지로 나리타시 산리즈카 지역이 결정되었음을 공개하자 주민들은 즉각 토지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주민들의 투쟁은 일본 사회운동 세력들과 연대투쟁을 결정하면서 운동의 범위는 더욱더 확장되었다. 주민들과 사회운동 세력들은 1978년 나리타 신공항이 개항한 후에도 관제탑을 점거하는 등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지속된 산리즈카 투쟁에서 1983년부터 투쟁세력 내부의 입장 차이가 커지면서 저항운동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1991년 일본 정부와 산리즈카 농민이 최초로 만난 토론회 이후 결국 1993년 일본 운수성은 사건 발생 후 27년이 되는 날 정식으로 농민들에게 사죄를 했다. 정부의 사죄로 60년대 이후 지속되어왔던 정부 프로젝트의 결정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이는 전후 관료 주도의 민주주의를 뒤짚는 새로운 민주주의로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사죄했지만 결국 공항은 지어졌고 농업은 피폐해졌으며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농민들과 함께 싸웠던 사회운동 세력들도 공항 건설 이후 운동에서 이탈해갔다. 그러나 농민들은 1992년부터 나리타원탁회의를 개최해 공항 주변을 새로운 대안공동체로 만드는 '실험마을' 구상을 제안해 현재까지도 이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산리즈카 투쟁은 일부 사회운동 세력조차도 당연시했던 기술혁신과 근대화, 고도성장이라는 가치에 저항하는 대안적 가치에 대해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전략에 대해서 큰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공항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농업은 정부의 방침대로 근대농법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공항을 만드는 이론과 대형기계를 사용하여 화학비료나 농약을 마구 사용하는 것은 근대농업과 같은 논리였습니다. 즉 저는 머리는 반권력으로, 신체는 권력융합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며 농업 속에서도 공항에 반대하는 이론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기농법을 제창한 산리즈카 농민 이시이 씨, [출처] <참세상>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


라르작 투쟁, 기지확장 반대를 넘어 군사주의 반대로

군사기지 확장에 저항한 프랑스의 한 농촌마을 라르작의 투쟁 사례도 주민들의 성공적인 투쟁 사례로 유명하다. 1970년 당시 국방장관 드브레가 자국의 군사기지로 1만4천 헥타르를 더 확장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에 확장 지역에서 살던 107명의 주민 가운데 103명의 주민들이 '103인 위원회'를 조직해 정부 정책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대부분 농민들이었던 주민들은 각종 집회와 행진뿐만 아니라 단식, 병역기록 반납, 입법부 선거 거부, 세금 납부 거부 등 다양한 행동들을 전개했다. 1972년에는 주민들이 에펠탑 아래에 '라르작을 살립시다'라는 슬로건을 써넣은 양떼 60마리를 풀어놓았고, 이듬해에는 26대의 트랙터를 끌고 파리까지 행진을 하기도 했다.

결국 1977년 프랑스 법원은 '군사기지 확장은 주민들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라고 판결해 주민들의 투쟁에 힘을 실었고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라르작의 군사기지 확장에 대한 계획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발표함에 따라 10여 년에 걸친 라르작 주민들의 투쟁은 승리를 거두었다. 라르작 주민들은 10여 년간의 투쟁을 통해서 단순히 지역에만 국한되는 군사기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핵무기 반대, 병역거부 등과 같이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투쟁,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은 무장한 신자유주의적 제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거대한' 투쟁이기도 하지만,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이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새로운 삶과 사회의 가치를 재구조화하는 '현장' 투쟁이기도 하다. 산리즈카에서 농민들과 함께 했던 사회운동 세력들이 공항 건설 이후 농민들보다 더 깊은 패배의식에 빠짐으로써 산리즈카 투쟁을 단지 또 하나의 정치투쟁의 장으로서만 인식했던 것임을 스스로 폭로해버린 일본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큰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은 단지 계기로서의 투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문제, 사회 전반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문제, 나아가 진보운동의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을 산리즈카와 라르작 투쟁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