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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에이즈, ‘막연한’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

한국에서 최초로 에이즈 환자가 보고된 것은 1985년의 일이다. 이렇다 할 예방법도 치료법도 없어 에이즈를 ‘20세기 흑사병’, ‘죽음의 질병’이라고도 부르던 시기였다. 질병에 대한 정보가 부재한 자리를 공포와 배제가 채웠다. 여타의 감염병에 비해서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는 유독 공포의 대상이자 차별과 배제의 근거로 작동하곤 하는데,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가 감염 이후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거나, 심지어는 의료 기관에서조차 에이즈 환자라는 이유로 입원이나 치료를 거부하는 식이다.

지난 12월 9일, 국회에서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이즈예방법) 제19조 전파매개행위죄의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현행 에이즈예방법은 모든 감염병 관련 법안 중 유일하게 감염인의 ‘전파매개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을 가지고 있다. ‘에이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매년 12월 1일을 국제 에이즈의 날로 지정한 것은 1988년의 일이지만, 편견과 차별의 해소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사회적 인식, 서비스 제공 기관, 법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에이즈에 덧씌워진 낙인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 이후에도 남아있는 공포

에이즈가 발견된 지 40년이 지나 과학과 의료 기술도 발전한 지금, 에이즈의 기제나 병증에 대한 연구는 많은 진전을 이뤘으며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의 감염원인과 감염경로 또한 비교적 명확히 밝혀져 있다. 약물 복용과 치료를 통해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HIV 감염인의 기대 수명은 비감염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늘어났다. 에이즈는 이제 ‘걸리면 곧 죽는 병’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질병’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곧장 질병에 대한 공포를 종식하지는 않았다. 에이즈를 유발하는 바이러스의 감염 확률이 낮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오랜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HIV 감염인에 대한 거부와 배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에서 에이즈의 주된 감염경로인 성행위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콘돔을 사용하면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으며, 꾸준히 의료적 조치를 받아 체내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을 경우(Undetectable) 콘돔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감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Untransmittable) 사실이 2016년 국제 에이즈 컨퍼런스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U=U 캠페인은 UNAIDS를 포함한 국제기구의 지지를 받으며 세계 각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HIV 감염인의 성적 권리가 실현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과학적’ 사실을 거친 끝에 ‘막연한’ 공포와 거부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명확한 근거가 없기에 오히려 더욱 강력한 배제와 낙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배제와 낙인을 만들어낸 조건을 살펴야 한다.

 

에이즈를 ‘금기의 단어’로 만들어온 조건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이즈예방법)은 1987년 제정되었다.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이 유입되면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막연한 공포에 기대어 도입된 법률이었으며, HIV 감염인 격리 및 강제치료, 전파매개 행위에 대한 금지 및 처벌을 주된 내용으로 했다. 이 시기 에이즈는 ‘외국에서 유입된 미지의 질병’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국제교류가 점점 활발해지며 에이즈는 외국/인의 질병보다는 ‘동성애자’들의 질병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이는 HIV/AIDS에 대한 1980년대 초창기 연구의 관점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이 당시 학계에서는 에이즈를 GRID(Gay-Related Infectious Disease), 즉 ‘게이와 연관된 전염성 질병’이라고 칭했으며, 보다 노골적인 게이 암(Gay Cancer)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문란한 동성애자들에게 내리는 신의 징벌’이라는 식으로, 에이즈는 반동성애와 성 엄숙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정치권과 종교계가 자신들의 신념을 퍼트리기 위해 에이즈를 들먹이는 발언은 21세기 현재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내 성적지향 차별금지 조항이 에이즈 발생의 원인”이라거나 “차별금지법 통과되면 에이즈가 창궐한다”라는 식의 발언이 정치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는 실제 HIV 감염인 중 남성 동성애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반동성애를 위한 도구로 에이즈를 사용하려는 의도적 발언들이다.

HIV/AIDS에 대한 불안과 공포, 거부와 배척을 조장해온 것은 질병이나 바이러스 그 자체가 아니다. 에이즈를 도구 삼아 성소수자 혐오를 확산시켜온 반동성애집단의 공세, 섹슈얼리티를 사회적 문제로 다뤄본 경험이 부족한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에이즈를 제대로 이야기하거나 공론장에 올리기도 어려운 상황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에이즈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거부감을 해체하는 과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에이즈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감염인 인권 증진을 가로막아온 조건들이다.

 

공포와 배제가 낳은 효과

HIV 바이러스는 모태감염이 아닌 경우 주로 성접촉, 수혈, 비위생적 의료기기 사용 등에 의해서 감염이 이뤄지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감염경로가 ‘성접촉’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남성 간 성관계는 혈액이나 체액이 점막에 직접 접촉할 가능성이 큰 편에 속한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남성 동성애자 집단이 HIV 감염에 취약하며 이 집단에서 에이즈에 대해 활발히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자명하다. 두 가지 명제는 서로 대비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이즈를 동성애자의 질병이라고 낙인찍는 세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흔히 전자가 강조되고 후자는 가려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낙인은 실제 HIV바이러스 감염 취약계층인 MSM(Men who have Sex with Men, 남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남성) 집단 내에서조차 에이즈 관련 이슈를 언급하기조차 어렵게 만들어왔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배제는 감염 취약계층인 성소수자 커뮤니티뿐 아니라 감염인 당사자 커뮤니티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2017년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감염인이 스스로에게 화가 나거나(75%),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느끼며(64.4%), 자존감이 낮고(59.6%),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51%)고 대답했다.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응답도 36.5%에 달했다. 남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운 만큼 자신을 비난하거나 혐오하게 되는 식이다.

감염 취약계층 집단과 감염인 집단에서조차 에이즈에 대한 공론장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현실은 감염인들이 감염 사실을 알게 되는 경로에서도 드러난다. 제정 초기 감염인 색출과 분리를 중심으로 했던 에이즈예방법은 이십여 년이 지난 2000년대 중반, 자발적 검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익명 검사, 신속 검사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정책이 대표적 변화이다. 국제적으로도 에이즈 예방을 위해 자발적 검진 확대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그러나 <2021년 HIV/AIDS 관리지침>에 따르면 2019년 신규 감염인 중에서 자발적인 검진을 통해 감염 사실을 알게 된 경우는 30% 이하였으며 70% 이상은 질병 원인 확인 검진, 수술 전 검진, 정기건강검진을 통해 감염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지난 20여 년간 변화해온 법 제도의 방향과는 상반되는 결과이다. HIV 검사에 대한 접근성을 아무리 높인다고 해도, 검사 이후 양성 판정이 나왔을 때 받게 될 배제와 낙인이 존재하는 한 자발적 검사로의 접근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막연한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

<2017년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의 특징은 HIV 감염인들이 직접 조사연구원으로서 연구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해당 연구 결과 보고서에서 윤가브리엘 나누리+ 대표는 연구사업의 가장 큰 성과로“15명의 감염인 조사원들의 역량 강화”을 꼽았다. 감염인들이 직접 “공동의 질문을 분석하고, 한국적 상황에 맞는 질문을 만들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토론하며 적극적으로 ‘권리’를 이야기하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로도 걷어낼 수 없었던 ‘막연한 공포’가 HIV 감염인의 ‘구체적 목소리’로 조금씩 대체되는 과정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HIV 감염인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사회적 발언을 시작하며 감염인 운동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인권이 있다”라는 말에서 출발한 감염인들의 외침은 에이즈 치료제 도입이라는 생존권 투쟁을 거쳐 에이즈 환자가 이용할 수 있는 요양병원 건립, U=U 캠페인을 포함한 에이즈 인식 개선, 질병의 비범죄화 요구까지 폭넓게 펼쳐왔다. 에이즈를 ‘금기의 단어’로 만들며 감염인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도록 해온 사회는, 역설적으로 감염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온 투쟁을 통해서 조금씩 변해왔다. 국가의 에이즈 예방 정책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