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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대다그대

내 인생의 집회

7월에는 “내 인생의 집회”를 아그대다그대 이야기합니다.

 내가 가장 기억하는 집회는
대학교 1학년 때 4․19 기념투쟁으로 한 가투인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잡혀갔을 때이다. 
당시에는 백골단이 있었고 
화이바로 머리를 무지하게 맞고 배도 발로 맞았다. 
그 기억보다 나를 더 괴롭게 한 건 
전경 한 명이 울부짖듯이
체포된 7명을 향해 분노에 차 퍼부어댄 말을 들었을 때이다.
"너희들은 화염병을 던지고 
조금 맞으면 되지만 
우리 전경들은 화염병을 잘못 맞으면
몸에 불이 붙을 수도 있다. 
며칠 전 내 동료가 화염병에 맞아 병원에 입원중이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고 
그래서 다음날 나와서 
선배들한테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는 현실에서 운동하는데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물론 선배들은 
전경들과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전경들을 방패막이로 하는 전․의경 제도-구조적 폭력 때문이라고 하며 
"네가 피한다고 구조적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 다친 전경들을 보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지방에서 올라온 몇 명의 전경들......
구조적 폭력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고 
그 전경의 울부짖음은 아직도 내 귀에 선하다. 
(바람소리) 

 집회는 진화한다. 
80년대의 집회는 전쟁이었다. 
90년대의 집회는 문화제 형식이 많았다.
2000년대 집회는 글쎄? 
경직되지 않고, 자발적이라야 한다.
참가자가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주체가 되는 집회가 지금 촛불을 통해서 보인다. 
그런데 80년대, 90년대만큼의 치열함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표현이 다른 것일까. 
축제와 저항이 공존하는
집회의 전형을 어떻게 만들까. 
(래군) 

 91년 열사정국 때 5월, 6월 내내 거리에서 보낸 기억이 떠오른다. 
그토록 가려했던 청와대 길은 
한국은행 앞 신세계 백화점 쪽에서 항상 경찰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최루탄을 쏘면 흩어졌다가 
최루탄을 쏘지 않을 때는 다시 모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러다 이번 촛불집회에서 
대규모 시민들이 효자동까지 경북궁 역을 훨씬 지나 
청와대까지 가까이 갔을 때
‘아~ 그래도 우리가 17년이나 싸워서 여기까지 왔구나.’ 
그런 뿌듯함이 느껴졌다. 
물대포를 쏴도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켜내는 시민의 힘이 느껴졌다.
집과 사무실에 있으면,
온몸이 아프고 골골한데, 
이상하게 촛불집회에 가면 
사람들의 에너지 때문에 몸에서 피가 돌고 있음을 느낀다. 
(승은) 

 1995년 거리에서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이었던 듯.
광주민중항쟁의 역사를 살려내자는 외침이었다. 
그렇게 종로를 처음 밟아봤다.
하루는 한 선배가 나를 다시 봤다며 놀려댔다.
최루탄이 터지고 뿌연 연기가 걷히는 동안 
여전히 경찰들 앞에서 쉬지도 않고 항의하고 있더라는 거다. 
난 몇 마디 안 한 것 같은데,
그냥 서있던 자리에 서있었던 건데, 
그랬나보다. 
요즘은 집회 나가면 그렇지 않은 내 모습이 자꾸 눈에 띈다. 
적당히 피하기도 하고 
씨도 안 먹히는 얘기하면 
내 입만 아프다는 생각에 그냥 돌아서기도 한다.
2년 전 평택에서 싸울 때 걸린 재판이 신경 쓰여 그렇게 되기도 한다.
2008년을 밝히고 있는 촛불을 함께 들면서
물대포를 쏘아대도 자리를 지키고
경찰에게 일장 연설을 하듯 항의를 하기도 하고, 
조금씩 예전의 '열혈청년'의 모습을 되찾는 듯도 하다. 
아, 내가 이런 얘기할 정도로 늙진 않았는데, 
흠, 오늘 지쳐서 그런가,
뭔가 무력함이 여전히 손가락 끝을 감싸고 있다. 
(미류) 

 1996년 3월 29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난 학교 선배들을 따라 처음으로 집회에 나가 
종로 거리에서 차를 막고 섰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펑! 펑! 
하얀 연기가 포물선을 그으며 뒤로 돌아 도망가고 있던 내 앞으로 떨어졌다.
그 때 알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최루탄'이라는 것이구나. 
하얀 연기를 헤치며 그야말로 살기 위해 뛰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이 쪽으로 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까만 옷의 무장한 전경. 
그는 시위대들을 잡아들이기는커녕 
메케한 연기 속에서 시위대를 안내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가 가라고 하는 방향으로 뛰었고, 
다행히, 
난 살아남았다. 
그날 나보다 1살 많던 노수석 
'열사'가 같은 거리에서 전경의 곤봉에 맞아 죽었다. 
(돌진) 

 95년의 5․18 특별법 제정 투쟁은 많은 95학번들을 거리의 투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96년, 
그 중 노수석이라는 연세대 학생이 거리에서 죽었다. 
그가 죽었던 집회는 에 나도 있었고,
내가 그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인가 곧바로 
그의 시신이 있는 연세대에서 바로 옆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는 그의 시신을 
그와 함께 싸웠던 동지들 곁으로 옮겨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경찰의 벽은 정말 두터웠다.
정말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몇 시간을 싸워도 그 벽은 뚫을 수 없었고
어느덧 저녁이 될 무렵 방송이 나왔다. 
유족들이 경찰과 장례식을 조용히 지내기로 합의하여 
시신이 연세대로 온다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열지 못했던 그 두터웠던 경찰벽이 열리며
버스가 들어왔다. 
나와 같이 호흡하던 죽어간 동지에 대한 안타까움에,
동지의 마지막 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허망함에
모두 ‘벗이여 해방이 온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정말 목이 메이고 눈물이 멈추지 않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해
다시 한 명의 95학번이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초코파이) 

 2000년 1700여명에 달하는
대우차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정리해고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부평의 거리를 뜨겁게 달궜던 그 해.
난 꽃병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었다. 
붉은 마스크를 쓰고 쇠파이프를 
아스팔트에 찍으면서 ‘혁명의 투혼’을 불렀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던 공권력에 
우리가 물리력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통쾌함과 
치기어린 면이 없지 않았지만 
젊고 넘치는 정의감과 혈기로 가득했던 시간들이었다. 
결국 그런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량해고는 예정대로 이뤄졌고 
그 후에 연쇄적으로 이뤄진 정리해고로 
노동진영은 큰 패배주의에 빠기긴 했었지만,
요즘처럼 무안무치격의 무자비한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낄 때면 
그 때의 기억이 불쑥 솟아나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곤 한다. 
(성진)

 

이상하게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집회가 없네...
왜지? 
겁이 많아서 뒤에 숨어있어서 그런가~? 
^^;; 
석진// 그때가 우리가 시작하던 때네요... ㅜ.ㅜ
성진//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너였나? ㅋㅋㅋ 
(아해) 

 비 오는 날 새벽, 
쇠고기반대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은
‘처음처럼’과 ‘바위처럼’, ‘광야에서’와 ‘아침이슬’을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고, 
기차놀이를 하며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친구와 재미있게 그 사이에서 놀았던 나는 
어느 순간 흔히 '운동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깃발을 보았고 
깃발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무심한 표정과 딱딱한 몸짓으로 변두리에 서 있었다. 
순간, ‘민중들과의 소통,
대중과 함께하는 운동’이라는 우리가 생각하던 고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렇게 '각'잡고 있어야 할까?
왜 이 놀이터에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것일까?
운동을 하는 사람은 특별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민중들과 대화를 원하고 소통을 원하고,
함께하는 운동을 원한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직접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민중들이 다가오기만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직접 행동을 하지 않는 다면 
이미 운동은 우리만의 운동이고 
그들만의 운동으로 사로잡혀 있을 것 이다.
난 매번 그런 ‘운동권’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한다.
다음 집회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그 사이에서 놀아봐야겠다.
(재영)